5막 3장 - 우리 중의 하나(2)
*
“하임벤어! 하임벤어 할 줄 아는 사람 없소?”
흩어진 관심을 다시 모으기 위해서 이븐은 두 번째로 같은 말을 소리쳤다. 식탁을 둘러싸고 카드를 치던 무리 가운데 하나가 손짓으로 이븐을 불렀다. 이븐이 그를 향해 다가가자 나머지 무리들의 눈이 그에게로 모였다.
“말릭, 에체보냐 말릭.”
“말릭은 말고요. 말릭은 바빠요. 바쁘다, 알아요?”
이븐이 기대하지 않은 답변에 고개를 가로로 젓자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용병은 또 다시 의미 없는 답을 내놓았다.
“비에이스트파 투르게네프.”
“투르게네프도 바빠요. 여기 하임벤어 할 줄 아는 사람 없습니까?”
이븐이 다시 고개를 돌려 허공을 향해 소리치자 카드를 치고 있던 또 다른 용병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미탸!”
다행히 미탸가 입 닥치란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인 듯, 여관의 한 편에서 머스킷을 정비하고 있던 용병이 벌떡 일어나 이븐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잠시 이븐이 알아들을 수 없는 베소니아어로 간단한 회화가 있은 후, 달려왔던 용병이 이븐을 향해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침구. 나 족금. 하임벤 족금.”
그러면서 용병이 자리를 옮기잔 뜻으로 여관의 구석을 가리켰으므로 이븐은 그를 따라 이동했다. 정비가 끝난 머스킷이 벽에 일렬로 기대어 서 있고 그 옆에서는 또 다른 용병이 총신의 그을음을 긁어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전 이븐입니다.”
“미탸. 안니욘, 이반.”
“그래요, 미챠. 베소니아어를 좀 물어보려고 합니다.”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게 미탸는 여전히 웃으며 별로 미덥지 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쓰빈, 시에쓰빈이 무슨 뜻입니까?”
이븐의 질문에 미탸는 소리 내어 웃으며 옆에 있던 다른 용병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우습기는 마찬가지인지 표정이 퍽 유쾌했다. 미탸는 이것이 자신에게 걸어오는 장난인지 가늠해보는 얼굴이 되었다가 곧 이븐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는 진지하게 답했다. 발음에 제법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개새끼.”
“네?”
갑작스런 욕설에 당황한 이븐에게로, 미탸가 손짓을 섞어가며 의미를 설명했다.
“시에쓰빈, 개새끼. 개새끼, 시에쓰빈.”
왼손을 들어 올리며 시에쓰빈,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개새끼를 연발하던 미탸는 곧 두 손을 합쳐 보였다.
“개새끼?”
“개새끼.”
이븐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그는, 그러나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던 듯 준비해왔던 다음 질문을 던졌다.
“아이스··· 반테. 아이스반-테는 무슨 뜻이죠?”
“아에스판티앗?”
“아에스반테.”
“아에-스본데.”
“아에스본데! 맞아요. 아에스본데가 무슨 뜻입니까?”
이븐이 한 단어로 오인했던 그것은 하나의 문장이었던 듯, 미탸가 두 단어를 끊어서 설명했다.
“아에, 나.”
“나라는 뜻이군요. 나, 아에. 좋습니다. 그럼 스반데는?”
미탸는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다는 듯,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잠시간 두들기더니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는 등 몸짓을 섞어 무엇인가를 요청했다. 이븐이 용케 뜻을 알아듣고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 건네주자 미탸는 그것을 받아들고 두 손바닥 사이에 넣었다. 그는 이윽고 어느 한 손에 동전을 숨기더니 이븐을 향해 주먹 두 개를 내밀었다.
“야바위?”
모르는 단어인 듯, 미탸는 고개만 갸우뚱거렸을 뿐이었다.
“사기꾼?”
이번에는 미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는 주먹 쥔 손을 펴서 이븐에게로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방금 그가 건네줬던 동전이 없었다.
“속이다?”
손가락을 튕겨 딱 하는 소리를 낸 미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븐이 한 말을 반복했다.
“소기다. 소기다.”
“스본데, 속이다. 아에스본데는······.”
“나 소기다. 나, 소기써! 테냐 아에 스본데, 체카로바. 너 나 소기써, 나픈 놈!”
이번에는 표정 연기까지 곁들여 가며 미탸가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이븐은 나잘이 죽어가며 했던 말들을 더 떠올려 보고자 노력했으나 그 이상으로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최초의 의심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는 데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문득 이븐은 은화에 생각이 미쳤다.
“‘감사합니다. 그건 가지세요.’가 베소니아어로 뭡니까?”
*
“어디 갔었어요?”
회의 때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던 것을 마음에 담고 있는 탓인지 아블린의 말이 퉁명스럽게 들렸다. 마을이 용병들의 주둔지가 되면서 주민들은 일부를 제하고는 인근의 도시로 이주할 것을 명령 받았는데, 이븐을 포함한 사냥꾼들이 머물게 된 이 집 역시 그렇게 해서 생긴 빈 건물이었다. 하나 있는 방은 아블린이 썼는데, 앉을 데가 마땅치 않아 이븐은 벽에 기대어 섰다.
“잠깐 용병들을 만나보고 왔습니다. 마르셀은요?”
“시체 더미들 처리하러 용병들하고 같이 나갔어요. 결국 태우기로 결정했어요. 그 문신 있는 시체 하나면 충분한 모양이에요.”
“그래도 증거가 더 필요할 텐데.”
아블린의 말에 이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서두르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사냥꾼으로서 그는 상황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블린이 말했다.
“마르셀이 증언해주기로 했어요. 제국 출신도 아니니까 문제없다는 거겠죠.”
문제의 시신을 보고 난 뒤로 마르셀은 용병들 일에 협조하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이븐은 아직 그것이 사냥꾼으로서의 투철한 사명감에서 기인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회의석상에서 마르셀이 보여준 고압적 태도와 달리 이번에는 이븐이나 아블린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허드렛일에 나섰다는 사실도 꺼림칙했다.
“베소니아어 좀 할 줄 아십니까?”
“아뇨, 엄마가 마먀라는 것 말고는 몰라요. 그건 왜요?”
이븐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망설였다. 그러나 이미 방문을 두드리기 전에 결정을 내린 그였으므로 곧 입을 열었다.
“나잘이라는 용병이 죽어 가면서 했던 얘기 기억하십니까?”
“베소니아어로 했으니 알아들었을 리가······. 잠깐만요, 뭔가 알아낸 거죠? 그렇죠?”
진상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븐만이 아니라는 것처럼, 아블린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에스본데, 시에쓰빈. ‘날 속였어, 개자식’이란 뜻입니다.”
아블린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당연히, 그리고 즉각적으로 한 인물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졌다.
“말릭. 하지만 정말로 말릭이 이 일을? 그래요. 제가 했던 말처럼 이 모든 게 자작극일 수도 있겠죠. 그래도 이건, 정말이지······.”
아블린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연갈색 단발이 고개를 따라 좌우로 도리질 쳤다. 이븐의 말이 전해다준 충격이 여실히 그녀의 표정으로 드러났다.
“시체를 옮겨다 놓고 마물을 끌어들인 것까지는 그자가 벌인 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지만, 동료 용병의 목숨을 이용했다는 건······ 글쎄요, 너무 과한 가정이 아닐까요. 저는 지금까지 이게 만약 자작극이라면 마물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한 어느 멍청이의 소행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습니다. 죽어가는 입장에서 순찰 명령을 내렸던 상관을 원망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이븐의 의심을 떠받치고 있는 근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블린에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 이븐은 다음 의제를 꺼냈다.
“제가 말릭한테 나잘이 했던 말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봤을 때, 그자가 했던 대답은 기억하시겠죠.”
“나잘의 말이 마물에 대한 설명이었다고 했죠. 기어 다니고 낫 같은 걸로 공격하고··· 그리고 루보미르가 죽었다고 했죠.”
“저도 나잘이 했던 말이 다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그가 한 말에는 루보미르나 그 비슷한 단어는 들어있지 않았죠. 물론 별명으로 불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에스본데 시에쓰빈’을 제하면 단어가 몇 개 남지 않아요. 거기에 루보미르가 죽었다는 사실과, 마물에 대한 정보가 모두 담겨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쏟아지는 정보가 아블린을 혼란스럽게 만든 듯, 그녀는 잠시간 귀고리의 깃털 장식을 매만지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마침내 정리해서 던진 말은, 그녀 스스로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정말로 낫 같은 걸로 공격하고, 거기다 기어 다니는 주검수채가 있었죠. 잠깐만, 그렇다는 건···?”
“마르셀의 지적대로, 보통의 주검수채는 기어 다니지 않고 뒷다리로 땅을 차면서 갑니다. 나잘의 마물에 대한 설명은,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말릭에 의하면 나잘이 했다고 하는 마물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마주한 주검수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말릭은 알고 있었군요. 우리보다, 그리고 죽은 용병들보다도 훨씬 전부터.”
이븐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훨씬 전은 아닐 겁니다. 마물에 대해 정확히 설명한 것 외에도, 그가 루보미르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잊으면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나잘이 루보미르를 이름이 아닌 다른 무엇, 예컨대 별명으로 부르며 그의 죽음을 알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잘이었다면 제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되는 개자식에게, 역시 속아서 죽은 동료의 죽음을 전해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말릭은 자신의 눈으로 루보미르의 죽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건 지혈이었나요? 지혈이었던 게 확실해요?”
맥락 없이 던져져, 생뚱맞은 질문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이븐은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지금 나잘의 상처를 손으로 누르던 말릭의 행동에 숨은 저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븐은 여전히 신중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말릭이란 자의 정체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블린에게 상황을 충분히 이해시킨 지금이, 이븐은 본래 묻고자 했던 질문을 던질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는 아블린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마르셀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븐은 자신이 쏘아 보내는 시선이 아블린의 시선을 밀고 나아가, 그녀의 머릿속에까지 미쳐 그곳에 들어있을 진실을 뚫어볼 수 있길 바라며 덧붙였다.
“우리가 그를 믿어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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