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막 4장 - 안개 속의 군무(1)
5막 비주
4장 안개 속의 군무(群舞)
“제가 같은 사냥꾼 동료를 의심해야 한단 말씀이시군요.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겁니까? 전 적어도 사냥단 안에서는 마음을 좀 편히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이븐의 말에 케넌은 답을 고민하는 듯 잠시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탁자를 응시했다. 이윽고 케넌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실어 나른 정보는 뜻밖의 것이었다.
“헤르돈 교구에 소속된 사냥꾼인 다모크 자한은 그곳의 대주교, 히셀 드로크만의 심복 노릇을 하고 있지. 드로크만 대주교에 대해서는 알거나 들어본 바가 있나?”
“야심 많은 양반이라는 것 외에는 모릅니다.”
이븐이 사냥단에 들어감으로써 간접적으로 교단의 일원이 된 것은 고작 이 년 전의 일이었다. 웨인은 여러 모로 훌륭한 스승이었으나 그 자신이 교단 내부의 정쟁에 휘말리기를 싫어했던 만큼 이븐에게도 미묘한 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지식을 전수해준 바가 전무했다.
“난 자네가 오늘 여기서 이루어진 대화를 다른 곳에 옮기지 않을 만큼의 분별력을 갖추었다고 믿네.”
케넌이 뜸을 들였다. 말수가 적은 만큼 입을 열어야 할 때면 대체로 꾸밈없고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케넌이었으므로, 이븐은 자신의 분별력에 대한 케넌의 판단에 동의를 보내기보다는 순전히 케넌의 다음 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드로크만 대주교의 이해와 관심은 교황 성하의 그것과는 다르네. 그분의 관심은··· 글쎄, 황제 폐하의 이상과 더 합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 교황 성하께서 교단 내에서 그분과 뜻을 같이 하는 일군의 사람들을 곁에 두시듯, 드로크만 대주교 역시 뜻이 통하는 무리들 사이에서 좌장의 역할을 도맡는, 교단의 주요 인사야.”
“아, 젠장, 케넌!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다 얘기해버려요.”
참지 못하고 소리친 것은 스타샤였다. 이븐과 케넌 간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로 줄곧 잠자코 있던 그녀였지만 그 내용에 대한 경청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던 듯, 자칫 지리멸렬해지려는 얘기에 재촉을 가했다.
“뭣하면 제가 대신 설명할게요. 그래도 되죠? 드로크만은 교황이 하는 일이라면 사사건건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인물이야. 로덴치오 추기경, 살리오든 대주교가 각각 교황의 오른팔과 왼팔이라면 드로크만은 그 앞에 놓인 바위쯤 되는 인간인 거지. 그자가 나이로드 교황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한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야.”
목이 말랐는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던 스타샤는 그 안에 담뱃재가 담긴 것을 깨닫고 곧 내려놓았다. 그녀는 마른 목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다모크는 사냥단에서도 알아주는, 드로크만의 따까리야. 그 인간이 사냥단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 중 하나라는 건 나도 인정해. 이름뿐인 뒷방 늙은이들보다야 다모크가 사냥꾼으로서는 더 훌륭한 인간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러면 뭐 하냐고. 누구든 드로크만한테 대들라치면 미심쩍은 죽음을 당해 사라지거나 없던 병을 갑자기 얻어서는 속세에 미련을 버리고 훌쩍 떠나버리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면 우리는 이렇게 얘기하지. ‘그림자’가 다녀갔다고.”
스타샤가 여과 없이 쏟아내는 말들에 조금은 난처한 표정이 된 케넌이 가만히 덧붙였다.
“그림자는 다모크의 별명일세.”
“그 그림자라는 것도 필시 드로크만 옆에 노상 붙어있다고 해서 붙은 별명일 거야.”
케넌이 꽤 비밀스러운 대화를 진행하면서도 스타샤에게 자리를 피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은, 둘 사이에 공유되는 모종의 정치적 지향이 있는 때문인 듯했다. 그러나 이븐은 가능하다면 웨인과 같은 회색분자로 남고 싶었다. 그가 보기엔 교황의 충복을 자처하는 케넌 역시 다모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건 이븐이, 대주교의 지위가 그 행동의 정당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면 교황이라고 해서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탓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인의 가치와 신념에 기반을 둔 선택이지, 결코 정오(正誤)를 쉬이 판가름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 그는 자신을 믿어도 되겠느냔 케넌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던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 역시, 진흙탕 속에 발을 들여놓고 만 것이었다.
“마일스아이렌의 사냥꾼 두 명이 국경에 가 있다고 하셨지요. 그럼 헤르돈의 다모크 얘기를 꺼내신 이유가 궁금해지는데요.”
“다모크는 일례이자 전형일세. 그와 같은 인물, 요컨대 드로크만 대주교가 내세우는 사냥꾼들의 미래에 대한 약속에 감화된 이들은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네.”
“미래에 대한 약속이라. 최종 해결책만큼이나 거창하게 들리는데요.”
“현 사냥꾼 제도에 대한 대주교 나름의 수정안이지. 그 얘기는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하도록 하세나. 지금은 현안에 집중하지.”
케넌의 그와 같은 연기(延期)가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 혹은 정말로 현안이 다급해서인지 이븐은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일단 케넌 역시 별 수 없는 정치적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고 나자 그의 담백해 보였던 행동들은 이제 관찰과 분석, 그리고 나아가 해석을 요했다.
“마르셀 바스케즈, 아블린 메리쿠르. 동부 국경에 파견된 사냥꾼들일세.”
“둘 중에 다모크 같은 인물, 그러니까 드로크만 대주교의 밑에서 나이로드 교황 성하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전쟁을 부추기는 인물이 있을 거라는 뜻입니까?”
얼마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한 질문이었던 듯, 케넌은 잠깐 생각을 정리해보는 기색이더니 곧 긴 답변을 내놓았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네. 자네도 알다시피 마일스아이렌에는 나와 같이 현장에서 물러나 있는 이들을 제하자면, 직접 뛰는 사냥꾼은 세 명일세. 앞서 말한 마르셀과 아블린, 그리고 막심 에카르트가 그런 사냥꾼들이지. 국무장관은 동부 국경에 두 명의 사냥꾼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해왔고, 공교롭게도 그런 요청이 있기 바로 며칠 전 막심이 지원 요청을 받아 남부로 떠났네. 내게 선택지는 없었고, 나는 국무장관의 요청에 따라 둘을 파견한 걸세.”
“국무장관이면 황제의 사람인데, 그러니까 단장님은 헤르돈 대주교가 황제와 한패라는 것을 확신하시는 모양이군요. 아무튼 그럼 지금 국경에 가 있는 둘 중 하나가 은밀히 대주교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겁니까?”
“둘 중 하나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으며, 둘 다 아닐 수도 있네. 어쩌면 애초부터 제외된 막심이 대주교의 사람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이 모든 건 내 과대망상의 소산일 수도 있지.”
케넌이 이처럼 확신 없이 굴기는 처음이었는데, 그건 스타샤도 마찬가지였던 듯 그녀는 답답해져서 또 다시 소리쳤다.
“제기랄, 그냥 케넌이 한 명 콕 집어 봐요! 그렇게 찔러서 맞으면 맞는다, 아니면 아니다, 하는 식으로 반응이 있겠죠.”
“요청을 그대로 따르는 대신 명단을 바꾸는 식으로 반응을 끌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요.”
케넌은 두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뜬 눈은 여전히 무감정했지만 이븐은 거기서 어떤 결의를 읽어낼 수 있었다.
“일단 저들이 원하는 박자에 맞춰 춤을 추세나. 이 곡이 끝나면 그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 보자고.”
*
이븐은 감았던 눈을 뜨며 긴 회상으로부터 깨어났다. 아블린은 여전히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이븐은 다시 한 번 그녀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제가 여기 오게 된 건, 사냥단 내부에서도 말릭과 같이 전쟁을 부추기려는 인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장님의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현재로서는 말릭이 벌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 가담하는 마르셀의 혐의점이 짙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아블린, 다시 묻겠습니다. 마르셀은 믿을 만한 인물입니까?”
오랜 유예 끝에 아블린이 내려놓은 답은 이븐이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답을 함으로써 답을 회피하는 식의 답변이었다.
“마르셀은 그 자신이 사냥단의 역사와도 같아요. 팔 인의 사냥꾼 중 하나이고, 마일스아이렌의 사냥꾼이기도 하니 뛰어난 실력가인 데다가 최고참으로서 존경받는 사람이죠.”
“아블린, 저는 사냥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만큼 알고 있는 정보가 적고, 또 그래서 당신과 같은 조력자의 제보에 온전히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피상적인 수준 이상의 정보를 내놓으라는 은근한 독촉이었다. 아블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셀에 대해서는··· 안 좋은 소문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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