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막 4장 - 안개 속의 군무(2)
말을 꺼낸 아블린은 그러나 곧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이븐은 무거운 침묵과 눈빛으로 그녀를 추궁했다.
“마르셀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물욕이 조금 과한 사람이죠. 마르셀은 저택과 별장을 한 채씩 소유하고 있어요. 이븐 당신도 알겠지만, 사냥꾼한테 어디 돈이 나올 구멍이 있나요. 교단의 지원금이 넉넉하다고는 해도 몇 번 사냥에 나서면 거덜 나기 십상이죠. 마르셀이 피해자의 유품을 가로챈다는 의혹은 여러 차례 제기되었고 그 일로 징계를 받은 적도 있어요. 그뿐 아니라······.”
아마도 그녀의 습관인 듯, 아블린은 자신의 황동 코를 왼손 엄지로 매만졌다. 그녀의 말은 마르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금반지들과, 또 그가 피우고 마시던 엽궐련과 고급술(酒)을 상기시켰다. 마르셀의 겉옷에 덧대어진 담비 모피를 보았을 때 이븐은 어렸을 적 그의 아버지가 검은담비를 사냥해 판 돈으로 지붕을 새로 했던 일을 떠올렸다.
“의뢰인들에게 금품을 요구한다는 얘기도 들려요. 그런 소문들이 사냥단의 신뢰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지만, 안드로스 단장님도 마르셀을 쉽게 내칠 수는 없는 거겠죠. 어쨌거나 마르셀은 사냥단의 터줏대감이고 명실상부한 실력자이기도 하니까요.”
“허영심과 명예욕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고요.”
회의석상에서 아블린을 향해 노성을 내지르던 마르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븐이 덧붙였다. 아블린은 다른 말을 더 하기에는 망설여진다는 듯이 고개만 가만히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면 마르셀이 말릭과 공모 관계에 있다고 추측해도 무리는 아닐 듯싶습니다. 동기는 충분하니 적어도 그 가능성만큼은 가벼이 여길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이븐, 정말로 사냥꾼 중에 전쟁을 원하는 이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우리 사냥꾼들은 누구보다도 전쟁의 위험성을 통감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생트바이룬의 분리주의자들이 일으켰던 반란은, 그곳을 지옥으로 바꾸어 놓았죠. 진지한 사냥꾼이라면 누구도 그 꼴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봐야겠죠. 아블린,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둘의 눈이 마주쳤다. 이븐은 자신이 내뱉을 선언이 만용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충분한 신중과 확신을 그것에 담았다.
“말릭의 정체를, 마르셀에게 얘기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할 경우엔, 만약 둘이 정말 공모하고 있다면 이븐 당신이 위험해져요. 말릭은 이미 자기 동료를 둘이나 희생시킨 작자예요.”
“아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개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마르셀이 말릭과 일을 꾸미고 있다면 분명 말릭에게서 어떤 반응이 있을 테죠. 이렇게 해서라도 마르셀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어떤 제동도 걸지 않는다면 전쟁은 기정사실화될 테니 말입니다. 오늘 밤에 마르셀이 돌아오거든 제가 말을 해놓겠습니다. 물론 저도 그리 할 테지만 아블린, 마르셀의 행동을 주시해주십시오.”
동료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난감함은 아블린이 이븐보다 더할 터였다. 이븐 스스로도 마르셀과 아블린의 관계에 비하자면 자신은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릭에 대한 의심과 전쟁 억지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는 지금, 이븐과 아블린 사이에는 그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르게 신뢰가 형성되었다. 고민 끝에 아블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어요. 정말로 그렇게 하겠다면, 더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죠.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이 대화에 대해서는 함구하겠어요.”
*
소란이 발생한 새벽에 이븐은 깨어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그러나 동시에 신속하게 옷을 갖춰 입고 마르셀을 깨웠다.
“아블린을 깨워주십시오. 병영에 일이 생긴 듯합니다.”
침상에 누운 채로 몸을 돌리는 마르셀을, 이븐이 끌어당겨 바닥에 팽개쳤다. 모포를 걷어치우며 마르셀이 노성을 터뜨렸다.
“염병할, 이게 무슨 짓인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긴급한 일입니다.”
아블린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 역시 자다가 깬 것은 마찬가지인지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졸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븐은 더 설명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그 자신은 밖으로 나갔다. 이븐은 말을 매어둔 곳으로 달려갔다. 새벽의 찬 공기가 급속히 그의 폐부를 찔러 들어왔다. 이 야밤의 사냥에서 사냥감은 마물이 아니었다.
이븐의 말이 밤새 안장을 얹어두었던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이븐은 말의 콧잔등을 한 차례 쓰다듬어 준 뒤 단숨에 그 위로 올라탔다.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던 용병들이 이 침착한 사냥꾼을 보고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곧 그의 진의를 파악하고 베소니아어로 뭔가를 외쳐댔다. 이븐은 그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말을 몰고 나갔다. 말이 입김을 뿜었다.
방향은 게헤만 진영 쪽, 그렇다면 추격의 성패는 전쟁터였던 들판에서 얼마나 속도를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에 앞서 추격에 나섰던 무리들이 곧 이븐의 눈앞에 나타났다. 용병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움직여 줄지는 미지수였다. 이븐은 아직 이 공모 관계의 실체가 얼마나 거대할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에쓰빈!”
이븐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베소니아어가 추격조의 입으로부터 튀어나왔다. 어느새 그들을 따라잡아 나란히 달리게 된 이븐은 마침내 목표물이 시야에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그의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아 그것은 낯익은 이의 등이었으며, 자신에게로 옥죄어 오는 의심의 눈길을 반전시켜보려는 자의 가소로운 뒷모습이었다.
게헤만 진영으로 달아나는 네 모습에 대한 목격자가 필요했겠지. 하지만 그 계산에는 내가 포함되었나? 포함시켰다 한들 나라는 상수를 너무 낮춰 잡은 건 아니었나, 말릭? 이븐은 사냥의 흥분과 추격의 열기로 돌연 즐거워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말에 박차를 가하며, 그는 자신을 울리는 고동이 말의 것인지 본인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오른손이 외투를 젖히고 권총을 잡았다.
이윽고 울려 퍼진 총성은 곧 실체로 화해 말릭이 타고 가는 말의 엉덩이를 스치며 붉은 선으로 남았다. 말이 놀라며 뜀박질이 불안정해졌다. 사냥꾼에게는 사냥의 성공을 확신하게 되는 어떤 순간들이 존재했다. 그러한 순간들은 쫓는 마물의 혈흔으로 짐작한 출혈량으로도, 그리고 맹진해오던 저돌성을 잃고 급작스레 유순해진 성정으로도 그것의 도래를 알려왔다. 지금 이 순간 이븐을 확신케 하는 것은 균열이었다. 정체가 탄로 난 이가 던지는 최후의 수는, 그러나 의심 많고 사려 깊은 이에게는 한갓 무모한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
이븐은 총구를 위로 들어 허공에 탄환을 발사했다. 총성을 들은 말릭의 말이 다시 한 번 주춤거렸다.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이제 말릭은 지척에 있었다. 이븐은 권총을 집어넣고 왼손으로는 잡은 고삐를 두어 차례 내리치며 말을 재촉했다. 뻗은 오른손이 잠시간 허공을 할퀴다가 마침내 말릭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말이 길게 울었다.
- 작가의말
당초 계획했던 분량을 채우지 못한 탓에 내용이 조금 늘어지고 있습니다. 5장에서 확실히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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