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막 5장 - 믿는 자에게 진실 있나니(1)
5막 비주
5장 믿는 자에게 진실 있나니
말릭을 심문하는 자리에 사냥꾼들의 출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다만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고성과 의자 따위의 가구가 넘어지는 소리는 생생했는데, 실상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이거나 알아들어도 의미 없는 소리였으므로 이븐을 포함한 사냥꾼들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간혹 마르셀이 이븐이나 아블린의 의견을 물어 왔지만 둘은 모종의 합의라도 보아두었던 모양인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마르셀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자네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도무지 입을 다물고 아무런 얘기도 해주질 않으니, 나를 빼놓고 무슨 꿍꿍이속들인가 말이야!”
“나오는군요.”
이븐의 말에 마르셀과 아블린의 눈이 문을 향했다. 방문이 열리며 용병 두 명이 말릭의 뒤로 묶은 두 팔을 잡고 나왔다. 이븐에 의해 말에서 떨어진 뒤에도 그와 격투를 벌였던 터라 말릭의 오른뺨은 부어오르고 광대뼈 부근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이븐이 그들 무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용병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났습니다.”
말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븐이 말을 이었다.
“뻐꾸기 둥지. 그땐 금발이 아니었고 수염도 없었지만. 그날 당신이 잡아들인 불쌍한 대학생들은 잘 지냅니까?”
말릭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갯짓으로 용병들을 재촉했다. 이븐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이븐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 이븐이 나직이 말했다.
“당신은 자신이 전쟁의 고삐를 손에 쥐고 원하는 방향으로 틀었다 믿겠지요. 나는 계획을 세우는 데 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말릭, 그걸 무너뜨리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지요. 누굴 엿 먹이는 데엔 타고났단 말입니다. 나 같은 사람들의 손에 진실이 쥐어지면 그건 곧 교수대의 밧줄이 되어 필히 누군가의 목에 걸리고 맙니다.”
“그거 아시오, 베르자크?”
눈빛, 표정, 어투, 억양, 심지어 목소리마저 바뀌어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이븐이 쉽사리 말릭에게서 느껴지는 기시감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실은 당신 같은 사람들이 채굴하는 것이 아니오. 나 같은 사람들이 세공하는 것이지.”
이븐이 옆으로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다. 그가 말릭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마음껏 가지고 노십시오. 황철석도 바보들의 손에서는 황금이 되는 모양이니 말입니다.”
말릭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 뜻 모를 대화의 의미를 추궁하고자 마르셀이 얼른 이븐의 곁으로 다가와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이븐은 말없이 투르게네프와 이바셴코가 있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블린이 뒤를 따랐다.
“부하들이 당신의 도움을 이야기해주었소.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감사를 표하오.”
대령의 말이었다. 그의 앞에 놓인 탁자에는 불에 타다 만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다. 암호로 작성된 문서였고, 다시 그것을 해독한 깨끗한 종이가 그 옆에 놓여 있었다. 게헤만어였다. 잉크가 묻어 번들거리는 이바셴코의 왼손으로 미루어 보건대 암호 해독은 그녀의 공인 듯싶었다.
“그러나 말의 안장, 그리고 빠른 준비는 미리 알았음을 증거하오. 따라서 나는 당신에게 묻소. 알고 있었던 것이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어렴풋이’에서 대령의 얼굴 위로 이해하지 못한 이의 찡그림이 떠올랐으므로 이븐은 그야말로 어렴풋한 태도를 버리고 말을 명확히 고쳤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 그것에 대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분노를 하지 않을 이유 남지 않소. 그러니 말하시오, 사냥꾼. 기회는 당신에게 있소.”
“제 나름대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것을 보고 드리기에는 아직 미흡한 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령님, 저는 대비하고 있었고 보시다시피 성공했습니다.”
대령이 잠시 말을 멈춘 틈을, 마르셀이 얼른 파고들었다. 이븐이 그를 흔들어 깨웠던 이후로 마르셀은 설명에 목말라 몸이 달아 있었다.
“이븐, 내게도 설명하게. 이게 다 무슨 일이고,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말이야. 말릭이 게헤만의 첩자였고 자네는 그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마르셀, 참으로 뻔뻔하시군요.”
아블린이 말했다. 그녀의 표정 위로 숨길 수 없는 경멸이 드러났다. 마르셀은 의혹이 더해진 표정으로 얼른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블린이 뭔가를 더 말하려는 차에 이븐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에 답했다.
“말릭은.”
눈을 감으며 운을 뗀 이븐이, 다시 눈을 뜨며 눈동자로만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면면을 훑었다. 이바셴코는 이 대화를 도무지 알아듣질 못해 불만스러운 표정이었고, 투르게네프의 턱에는 호두의 무늬를 연상케 하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아블린은 마르셀을 쏘아 보았고, 그런 마르셀은 다시 이븐을 쏘아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이븐이 말을 이었다.
“게헤만의 첩자 따위가 아닙니다. 그는 제국수색대원이고 일이 틀어지자 게헤만의 첩자인 체하려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아블린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으므로 그녀 역시 조금 놀란 표정이 되어 이븐을 바라보았다. 이븐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대령의 표정이었다. 왜 놀라지 않지? 이 침묵을 분노한 음성으로 깨트린 것은 역시나 마르셀이었다.
“그럼 자네가 어젯밤에 내게 했던 말은 뭔가? 말릭은 믿을 수 있는 자라며? 마물을 끌어들이려 시체를 용병들 진영에 내던지고 간 게헤만 군의 행태를, 교황 성하께, 케넌에게 보고하겠다고 하잖았는가! 자네 지금 나를 놀릴 심산인가?”
“무슨···!”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아블린이 탁자를 짚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마르셀. 제가 여기 온 것은 안드로스 단장님이 당신들을 못 미덥게 여긴 탓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유능해서 마물들을 처치하고 남은 시간에 다른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지요.”
다시 한 번, 이븐이 주위를 눈으로 훑었다. 아블린의 시선은 아래로 떨어져 탁자를 향하고 있었다.
“저는 사냥단에 전쟁을 부추기는 인물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를 색출해내라는 밀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아블린에게 서로 다른 정보를 흘려야 했습니다. 한 명에게는 말릭이 의심스럽다 말하고, 다른 한 명에게는 말릭이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고 말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말릭은 행동에 나섰지요.”
“이븐, 당신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나를 모함하다니요. 그럴 수는 없어요.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다시 생각해봐요, 이븐.”
아블린의 말은 협박처럼 들리기도, 또 간청처럼 들리기도 했다. 마르셀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이븐과 아블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 덩치 큰 사내는 이제, 이븐의 눈에는 우둔한 짐승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둔한 짐승도 속이 시커먼 인간보다는 나았다.
“그렇지, 말은 다른 곳에서 샜던 거예요. 시, 시에쓰, 그게 뭐였죠, 이븐? 당신이 용병들한테 묻고 다녔던 그 베소니아어 말이에요! 제국수색대원이라고 했나요? 말릭은 용병으로 행세하던 자였어요. 충분히 용병들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요!”
이마의 땀이 미간을 타고 흘러내리며 아블린의 황동 코 위에 맺혔다. 그 땀방울 속에 의심 많은 사내의 축소된 초상이 담겨 있었다.
“아블린 메리쿠르. 처음부터 초점은 당신에게 맞춰져 있었습니다. 내가 말릭의 정체에 대해 마르셀에게 말했다는 확신을 당신에게 심어주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 작가의말
공지에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심연의 사냥꾼들』은 5막 5장이 마무리되는 대로 휴재 기간에 들어갑니다. 감사합니다.
‘발굴’을 ‘채굴’로 고쳤습니다. 18.5.24.18:28
추가사항: 6월 22일 연재를 재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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