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막 5장 - 믿는 자에게 진실 있나니(2)
아블린의 거친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이어진 그녀의 고성은 그들 가운데 잠깐 머물렀던 침묵을 난도질했다.
“더는 들어줄 수 없군요. 당신이 대단한 증거인 양 떠들어대는 것도 실상 억측과 당신의 편견 위에 쌓아올린 것들일 뿐이에요. 저는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이 자작극일 거라 의심했던 사람이에요. 그건 잊었나요? 그렇다면 참으로 편리한 기억력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네요. 당신이야말로 대답해보세요. 누구의 사주를 받았죠? 나를 모함해서 당신이 얻는 게 대체 뭐죠?”
“제게 베소니아어를 가르쳐준 용병이 있었습니다.”
이븐은 여전히 아무런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의 말투는 시종일관 싸늘하게 식어 있어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감사의 의미로 돈을 주려 했더니 그렇게 말하더군요. 작은 호의에 대한 대가로 돈을 받는 일은 ‘티라크’나 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이븐은 잠깐 말을 멈추고 마르셀을 살폈다. 지금부터는 그의 역할이 중요했다. 마르셀로부터 충분한 집중을 얻어냈다고 판단한 이븐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기억나십니까? 나잘이 죽어가면서 했던 말은 ‘티라크 아에스본데 시에쓰빈’이었습니다. 창녀, 날 속였어, 개자식. 나잘은 당신을 보고 말했던 겁니다, 아블린.”
“죽어가는 사람이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요! 그 앞에 오는 말이 ‘네 엄마’가 아니었다고 확신해요? 창녀라는 말을 남자한테 못 할 이유는 또 뭐겠어요. 원한다면 내가 당신한테 해줄까요, 이븐? 이 더러운···”
“그만-!”
마르셀의 노호였다. 들어 올린 그의 손가락이 이븐을 향했다.
“베르자크! 더 이상 그녀를 모욕하지 말게. 이건 경고일세.”
마르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목에 핏대가 섰다.
“아블린은 지난 수년 동안 사냥단을 위해 봉사해 왔네. 자네같이 풋내 나는 애송이 따위가 함부로 능멸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어디서 그따위 버르장머리로 선배를 욕보이려 들어, 들기를!”
아블린마저 놀라서 마르셀을 쳐다보았다. 주먹 쥔 이븐의 손을 그 자신의 손톱이 파고들었다.
“마르셀,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설명해드릴···”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 소속 교구로 돌아가게. 당장 짐 싸서 돌아가란 말이야! 같은 사냥꾼을 의심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더군다나 전쟁터까지 와서 고생하는 동료를 협잡꾼 취급하다니 두고 볼 수가 없어. 그래, 저 혼자 안전한 곳에 눌러앉아 내려다보면 우리들이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마지막 말은 이븐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븐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서 케넌에게 똑똑히 전하게. 나, 마르셀 바스케즈가 오늘 받은 모욕을 기억한다고, 내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준비해놓아야 할 거라고 말이야.”
이븐은 눈을 뜨고 자신에게로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중년의 사냥꾼을 직시했다. 마르셀의 경련하는 구릿빛 피부 위로 분노가 기어 다녔다. 이븐은 심장의 박동이 목울대를 두드리는 것을, 종내 입 안으로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갖은 욕설과 저주의 말들을 어금니로 씹어 삼켰다.
“그냥 두어라. 그는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이니 둘이 모두 구덩이에 빠지리라.”(*)
*
벽에 걸린 거대한 송곳니는, 그것의 주인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븐은 가능성 있는 몇 가지 마물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항목을 하나씩 소거해나가며 결국 이 송곳니는 그가 본 적 없는 마물의 것임을 인정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이븐은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빠르고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케넌을 보고 목례했다.
“들어가세.”
케넌이 밀어젖힌 문을 이븐이 넘겨받았다. 집무실의 풍경은 전에 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넓었고, 방의 주인이 그것을 꾸미는 데에 조예가 없었으므로 또 그만큼 휑했다. 케넌이 거대한 책상 뒤에 앉자 이븐도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이토록 빨리 복귀하리라 짐작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케넌의 눈동자에는 이례적으로 의구심이 떠올라 있었다.
“졸속으로 처리한 것이 아니었기를 바라네.”
이븐이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기대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
“아블린이었습니다. 배후는 모르겠습니다.”
케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가 빈 재떨이를 이븐의 앞으로 옮겨놓자 이븐이 사양의 의미로 손을 들어보였다. 그러면서 이븐은 스타샤가 있었더라면 마음 놓고 함께 담배를 피웠을 자신을 생각하고는 우스워져 실소를 머금었다.
“설명해보게.”
마일스아이렌으로 향하는 길에 보고할 내용을 정리해두었던 이븐이었으므로 설명은 어렵지 않게 시작되었다. 이븐은 그가 도착했던 당시 마르셀의 반응과, 이어진 주검수채 사냥과, 나잘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게헤만 병사의 시체를 둘러싼 마르셀과 아블린의 설전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또한 이븐은 그가 깔아두었던 덫과, 말릭의 탈영, 이후 벌어진 심문에 대해서, 투르게네프, 아블린, 마르셀이 했던 말들에 대해서 가능한 한 그대로 복원해 설명했다. 마르셀이 전하라고 했던 말도, 그가 직접 들었다면 흡족해 할 만큼 원형을 유지해 전달했다. 케넌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손이 다 가리지 못한 이마에는 주름이 패여 있었다.
“마르셀은 최선의 선택만을 하는 인물은 아니지.”
“케넌, 당신의 완곡어법이 오늘은 꽤 거슬리는군요.”
케넌의 진청색 눈동자가 이븐을 향했다. 다문 입술이 말려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며 이븐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문장을 뱉어냈다.
“자네가 제시한 증거만으로는 부족하네. 더욱이 배후를 밝히지 못했다면 섣불리 그 배후를 자극한 셈이 될 수도 있어.”
“그 외에도 몇 가지 부수적인 증거들이 있긴 합니다. 죽은 용병들을 숲에 배치시킨 것이 그녀였다는 점, 그리고 시체가 게헤만 병사의 것으로 밝혀진 뒤에 있었던 회의에서 그녀가 용병들을 가리켜 ‘우리 진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 그것이지요. 마르셀의 경우엔 시종일관 ‘용병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건 이븐이 아블린을 의심하기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발화자의 특정한 단어 사용에 십분 주의를 기울여 그것의 저의를 짐작하는 것은 이븐의 주된 수사기법이었다. 케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증거라고 부르기 어렵네. 자네의 의심이 편견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정도만 증명할 수 있을 뿐이지. 지금 아블린이나 마르셀을 여기로 불러들인다고 해도 응하지 않을 걸세. 내게 그들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네만, 피하고 싶은 일임에는 분명하네.”
“그런데, 케넌.”
그렇게 운을 뗀 이븐은 말을 정리하느라 잠깐 뜸을 들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아블린은 처음에는 용병들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를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냥꾼들 가운데 일을 꾸미는 이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은 저를 속이기 위한 행동이었단 겁니다. 일단 선수를 쳐서 제가 할 말을 뺏어간 다음, 설득된 척 결국에는 협조하는 것이 아블린의 계획이었을 거라고 봅니다.”
“내가 자네에게 내린 밀명의 성격에 대해 추측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걸세. 그러니 또 다른 첩자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이라면 관두게.”
이븐에게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던 날 둘을 제하자면 함께 있었던 이는 스타샤뿐이었으므로, 케넌은 이븐의 말이 암시하는 것을 알아채고 논의를 막았다. 실상 이븐도 그쪽으로 사유를 전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므로 그는 빠르게 수긍했다.
“예,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저는 더 이상 이런 일에 관계되고 싶지 않군요. 저는 마물 사냥꾼을 발품이 많이 드는 백정 정도로 알고 있었고, 이런 제 이해를 계속 유지하고 싶습니다.”
“기억해두게. 자네가 정쟁에 대해 관심이 없을지라도 정쟁은 자네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갖고 있단 사실을 말일세. 자네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닌 한, 땅이 흔들리면 자네의 몸도 흔들리고 말아.”
“이젠 날개까지 돋아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물론 케넌은 웃지 않았다. 굳은 표정 그대로,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뒤적여 유독 정갈하지 못하게 찢어진 종이를 찾아냈다. 내용을 확인한 그는 그것을 이븐에게 건넸다.
“스타샤의 전언일세.”
티 나게 반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이븐은 종이를 받아들고 엉망으로 써내려간 글씨를 해독했다. 내용은 간략했고, 부족한 정보는 상상을 촉발시켜 오히려 행간에 넘쳤다. 이븐의 감상은 단순했다.
“사냥에 나설 때군요.”
5막 마침.
*마태복음 15장 14절에서 따옴.
- 작가의말
공지하였던 대로, 『심연의 사냥꾼들』은 휴재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6월 22일, 6막으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가)6월 22일 연재를 재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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