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막 1장 - 개죽음(1)
6막 분루(憤淚)(*)
우리는 모두 비정한 진실 속에서 비참하게 버르적거리다 개처럼 죽을 것이다.
- 프리드리히 자켄바흐
거짓 위안을 주는 이는 거짓 친구다.
- 베소니아 지역의 격언
1장 개죽음
“에이델은?”
다급하게 묻는 스타샤의 말에 문 옆에 기대선 남자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 뒤에서 그녀가 데려온 반백의 늙수그레한 의사가 초조한 듯 안경을 추어올렸다.
“말을 해! 머리 흔드는 게 무슨 뜻인데?”
버럭 고함을 지르는 스타샤에게로, 남자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정신은 있어. 춥다기에 이불을 둘둘 말아놨고.”
남자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채로 스타샤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녀의 뒤로 의사가 따라 들어갔다. 방 안은 후덥지근했다. 침대 발치에 놓인 화로에는 새로 더해놓은 듯한 장작이 불씨에 천천히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의사 데려왔어.”
침대를 둘러싸고 서 있는 세 명의 눈이 스타샤에게로 모였다. 한껏 주눅 들어있는 저 울상들, 스타샤는 뺨을 한 차례씩 올려붙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죽음을 예비하고 있는 그 표정들이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그녀를 앞질러, 의사가 침대로 다가갔다. 벗은 외투를 덩치 큰 남자가 받아들어 벽에 박힌 못에 걸었다.
“어디, 좀 봅시다.”
의사의 주문에 침대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조심스럽게 이불을 풀어냈다. 땀과 피로 젖어 축축해진 이불을 걷어내자 처참하게 망가진 육신이 드러났다. 산성 용액이라도 끼얹은 듯 붉게 물러터진 오른팔의 화상은 똑바로 쳐다보기 괴로울 정도였고, 가장 심각한 것은 복부의 자상이었다. 하얗게 질린 배 위로 저주스럽고 끈질기게 피가 흘러 나왔다.
외투를 받아들었던 남자가 다가와 에이델의 힘없는 손을 쥐고 말했다.
“델, 이 친구야, 스타샤가 의사 선생님 모셔왔어. 자네 이제 한시름 덜었네. 그렇지?”
“데릭··· 틀렸어···. 내가 알아. 내가······.”
“어허, 엄살은!”
그렇게 다독이는 데릭의 옆에서 의사가 헛기침을 하자 그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손은 여전히 꽉 쥔 채였다.
“팔 좀 잡아주십시오.”
건너편의 남자가 의사의 말에 에이델의 오른팔 손목을 잡았다. 얼굴이 길고 하얀 남자는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있어 음험한 인상을 주었다. 잡힌 손목으로부터 전해오는 고통을 참으려 에이델이 이를 물었다.
“뷔센, 자네 꼭······ 사신 같아.”
목소리를 짜내 잇새로 말한 에이델이 신음성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데릭이 잡은 에이델의 손등을 두드리며 함께 웃었다. 의사가 가방에서 약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고는 에이델의 오른팔에 들이부었다. 그의 몸이 고통으로 말려들었다. 말없이 서있던 여자가 베갯잇을 찢어 에이델의 입에 물렸다.
“괴사가 진행됐고, 파손된 장기를 잘라내야 할 겁니다. 누가 의료 지식이 좀 있다고 그랬는데······.”
“접니다.”
의사의 말에 베갯잇을 찢었던 여자가 답했다.
“좋습니다. 성함이?”
“테니아.”
테니아의 손은 이미 피로 온통 칠해져 있었다. 의사가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물을 다시 떠와야겠는데.”
“루퍼트 시켜.”
데릭의 말에 스타샤가 차갑게 대꾸했다. 뷔센이 손을 외투에 문질러 닦고 양동이를 집어 들었다. 테니아가 의사에게 설명했다.
“장기 손상으로 핏물이 찼고 감염의 위험이 있어 물로 세척했습니다. 핏물은 대롱으로 빼냈고요.”
“좀 더 전문적인 기구가 저한테 있을 겁니다.”
그는 다시 가방을 뒤져 도구를 꺼냈다. 그는 두 개의 관이 연결된 고무주머니를 데릭에게 건네고 수술칼과 가위가 든 손가방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드러난 내장을 살핀 그가 앰풀에 주사기를 꽂았다.
“안 돼요······.”
에이델이 베갯잇을 뱉어내고 말했다. 새하얗게 질려 핏줄이 도드라진 그의 얼굴이 기괴스러웠다.
“진통제는··· 그만둬요. 난 제정신인 채로······.”
의사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주사기를 거두고 다시 환부를 살폈다. 이번에는 가위를 든 채였다.
“절개 부위를 고정해야 합니다. 거길 잡고, 네, 그렇게 잡고 계십시오.”
의사가 가위를 댔다. 뷔센과 데릭이 에이델의 어깨를 잡았다. 생살을 잘라내는 소리에 스타샤가 한 차례 몸을 떨었다.
*
“밤을 못 넘길 겁니다.”
칼라일은 말을 가려서 하는 의사가 아니었다. 테니아가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숨기려 고개를 돌린 그녀가 코를 훌쩍였다.
“주요 장기들이 다 훼손됐고 부러진 늑골이 폐를 찔러서··· 의식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밖에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없을 것 같지만, 일단 오늘은 여기 있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에이델도 고마워 할 거예요.”
칼라일은 말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층계를 내려갔다. 반대로 층계를 올라오는 스타샤에게 테니아가 물었다.
“누구였어?”
그녀가 칼라일과 대화를 나누던 동안 스타샤는 방문자를 맞고 있었다. 그들이 빌리고 있는 집의 주인을 찾아온 손님이 아니었고, 그들을 꼭 지목해왔던 터여서 스타샤가 불려 나갔던 것이었다.
“애 엄마.”
스타샤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한 테니아가 다시 물으려던 차에 그녀가 무심한 어조로 짧게 덧붙였다.
“죽었대. 그 애.”
테니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떨궜다. 연달아 찾아드는 나쁜 소식이 그녀의 의지력을 붙잡고 위태롭게 흔들었다.
“에이델한테는······.”
“알았어.”
평소였다면 자신을 눈치 없는 인간 취급하는 테니아에게 분개했을 스타샤였지만 그녀는 간단히 대꾸하고는 문을 밀어젖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데릭이 에이델을 붙잡고 그 특유의 재담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자네 그거 아나? 사냥단 역사상 침대 위에서 죽은 사냥꾼은 딱 두 명뿐인데 그 중 한 명은 자다가 기습을 당한 거였어.”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 그 말에 에이델이 웃고 데릭도 따라 웃었다. 웃으면서 튄 피를 데릭이 닦아주었다. 그 잠깐의 웃음마저 견디기 힘들다는 듯, 에이델이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여들었다.
“다른 한 명은?”
“나야. 늙어죽을 거거든.”
이번에는 뷔센이 피식 웃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에이델이 웅얼거렸다.
“그럼 자네가 세 번째인 걸로 해. 내가 곧 두 번째가 될 것 같으니까.”
“이 친구 자꾸 그러네.”
대화가 의도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자 골치가 아파진 데릭이 자신의 뒷머리를 들쑤셔 헝클어뜨렸다. 그의 검은 머리칼은 그렇잖아도 산발이 되어 있어서 짐승의 갈기처럼 보였다.
“내가··· 멍청해 보이겠지······. 생판 처음 보는 어린 애 하나 살리겠다고······.”
말을 이어가던 에이델이 기침으로 몸을 들썩였다. 데릭이 얼른 손짓하자 뷔센이 주전자를 들어 컵에 물을 따랐다. 컵을 받아든 데릭이 에이델에게 조심스럽게 물을 먹였다.
“멍청하다니, 이 친구야! 내가 이런 말 잘 안 하는 거 자네도 알 테지만 꽤 멋있었어, 응? 막 뛰어들어서 막아내고, 안 그래?”
“근데 난 후회 안 해. 내가 미래를 지킨 거야.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거 아닌가?”
에이델의 눈에는 이제 초점이 없었다. 천장을 보며 말하는 그의 손을 붙잡고 데릭이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러나 자꾸만 멀어져가는 그의 정신을 붙잡은 것은 데릭의 말이 아니었다.
“죽었어, 그 애.”
스타샤의 말에 다시 한 번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그녀가 싸늘하게 덧붙였다.
“방금 애 엄마가 왔다 갔어. 걔 죽었다고.”
“스타샤!”
테니아가 비명 같은 외침으로 그녀를 만류하거나 말거나 스타샤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이제 세상 다 살았다는 듯이 혼자 만족해서 떠날 것처럼 지껄이지 말란 말이야! 미래를 지킨다는 게 대체 무슨 헛소리야! 그럼 너는 누가 지켜주는데? 네 한 몸 간수나 잘할 것이지 그 애새끼 하나 살린다고 누가 알아줄 거나 같아? 병신같이, 병신같이 누워서, 곧 뒤질 놈처럼······.”
점차로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좆같은 새끼들, 내가 다 죽여 버릴 거야. 다 죽여 버릴 거라고. 알아? 그 새끼들을 찢어발겨 놓고 말 거야. 찢어발겨서······.”
여태껏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루퍼트가 조용히 다가와 스타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제야 그녀에게도 에이델의 낮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데릭으로부터 뿌드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편안하게 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마취제와··· 자네들이 공모해서 선사해준 거짓말 속에서······. 그런데, 그러면 사냥꾼이 아니겠지.”
웃으려는 듯,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고통이 밀려오는 듯 에이델은 숨을 가쁘게 쉬다가 간신히 남은 기력을 쥐어짜내 말을 이었다.
“난 실패했어···. 하지만 틀리지 않았어. 스타샤, 난 다시 그렇게 할 거야. 그리고 다시 이렇게 죽을 거야. 실패했지만··· 난 실패했지만 자네들은, 뷔센, 스타샤, 테니아, 루퍼트······.”
죽음이 임박했다는 예감은 누구에게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불현듯 찾아왔다. 멀찍이 물러나 있던 스타샤와 루퍼트가 에이델을 향해 다가갔다. 에이델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데릭, 자네들은 나보다 훨씬 뛰어난······.”
말을 마치지 못하고, 에이델이 왈칵 왈칵 입으로 피를 쏟아냈다.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물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먹먹히 들려왔다.
“아무것도··· 안 보여······.”
데릭이 에이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사신의 품으로부터도 빼앗아 올 수 있을 만큼 강인해 보이는 팔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그런 식으로 놓칠 것이었다. 모두 알고 있었고, 감내하겠다는 다짐이 그들을 여기에 모았으므로 누구 하나 고개 돌리는 이가 없었다.
*분하여 흘리는 눈물(표준국어대사전).
- 작가의말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등장인물의 행동이 지나칠 정도로 비정하게 그려진 듯하여 인용구와 에이델의 대사, 묘사 일부를 추가하였습니다. - 2019.10.12.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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