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막 1장 - 개죽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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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며 스타샤는 자신이 잠깐 졸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에 기대었던 오른쪽 어깨가 쑤셔왔다. 수 개의 쇠못이 박힌 심장이 오른쪽 어깨 어디선가 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통증은 그렇게 간헐적이고 끈덕지게 박동했다. 어깻죽지를 칼로 갈라내면 핏물이 아니라 녹물이 나올 거라고, 스타샤는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선잠에 몸을 내맡길 수 있었던 것은 취기 덕분이었고, 좀 전의 사냥으로 말미암은 피로 때문이었다. 다만 모르델반트의 시체 안치소 의뢰를 맡기로 했던 결정은 그야말로 적절해서 가외의 소득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옆에 내려놓았던 외투를 뒤적이며 마주 앉은 남자에게 말했다.
“왜 안 깨웠어요?”
“그야 엽사님이 너무 곤히 주무시기에······.”
“스타샤라고 불러요. 간지러운 호칭은 질색이니까.”
스타샤의 날선 대꾸에도 남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소매로 콧수염의 맥주 거품을 문질러 닦으며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스타샤. 그때 잔베르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벌써 이 년 전인가.”
“다르나브···”
“알렉, 알렉이라고 부르십쇼. 이븐의 친구면 내 친구기도 하니까.”
뼈대 있는 무인 가문 출신이라고 했던가. 알렉쟝드르 다르나브는 호방한 인상이었다. 자주 웃어 눈가에 잡힌 주름은 그를 모르던 사람도 어느새 친근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래요, 알렉.”
스타샤는 식탁 위에 조그만 유리병을 올려놓았다. 역시 유리로 된 마개로 막아두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가죽끈을 둘둘 말아 봉해놓은 것이었다.
“마일스아이렌 연구소에 건네줘요.”
알렉은 유리병을 들어 그 안에 든 새까만 거머리를 흥미롭다는 듯 뜯어보며 물었다.
“글라트펠트가 아니라?”
“마일스아이렌이 제일 크니까.”
제국 내의 주요 교구에는 크든 작든 항마연구원의 연구소가 부속되어 있었다. 잔베르처럼 연구원 한 명이 연구소 노릇을 하는 곳도 있는가 하면 글라트펠트처럼 북부의 거점 연구소를 자처하는 곳도 있었다. 개중에 규모가 가장 큰 곳은 역시 교황청이 있는 마일스아이렌의 연구소였다.
“글라트펠트 교구 연구소도 마일스아이렌 못지않습니다. 결과를 빨리 받아보려면 그 편이 나을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해요.”
스타샤가 쉽게 수긍한 데에는 그녀가 항마연구원의 활동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한몫했다. 그녀가 보기에 항마연구원은 실험실에서 수상쩍은 일이나 벌이는 괴짜들인 주제에 일선의 사냥꾼들에게 머리를 잘라 오라거나 장기를 적출해 보내라는 지시를 거리낌 없이 해대는 기관이었다. 스타샤가 몇 년 전부터는 아예 그런 성가신 지시들을 ‘실력 부족’을 핑계로 무시해온 탓에 재료의 조달은 부펜하르크 지역의 또 다른 사냥꾼인 테니아가 도맡아왔던 것이다.
“뭐, 덧붙일 말씀이라도?”
“종이랑 펜 있어요?”
알렉이 유리병을 가방 안에 조심스레 보관하고 종이와 펜을 꺼내 스타샤에게 건네주려 하자 그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러고는 받아 적으라는 듯 거머리에 대한 그녀 나름의 분석 결과를 읊기 시작했다.
“노블 다이스와 관련. 모르델반트 시체 안치소의 시체에서 발견된 것으로 데어도크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과 동일함. 감염된 마물을 권속으로 활용하는 데······”
그러나 말을 꾸며내는 것은 그녀의 장기가 아니었으므로 스타샤는 금세 막혀 더듬거렸다.
“활용하는 데··· 사용? 사용 괜찮나, 사용? 활용, 사용 이상하지 않아요?”
“권속으로 부리는 데에 활용.”
스타샤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알아서 잘 적어줘요. 권속으로 써먹는 데에 활용되는 것으로 보임. 권속의 머리통이 터지고 밖으로 나오면 시들시들해짐. 꼭 홀아비··· 아니다, 이건 쓰지 마요. 빠른 분석과 결과 보고 요망. 이든벨 교구 소속 스타샤 메이츠니르.”
알렉은 ‘권속의 체외로 나왔을 경우 활동성이 현저히 감소되는 것이 확인됨. 당해 사안의 긴박성에 따라 조속한 분석 및 결과 통지를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되는 간이 보고서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본 뒤 고이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이제 부펜하르크로 돌아가시렵니까?”
“아뇨, 당분간 붙어 있을 거예요. 왜요, 불편해요? 외지인 심부름꾼 노릇하려니까?”
“그럴 리 있겠습니까. 여기 일 도와주면 고맙지요. 단지 저는, 스타샤 씨도 바쁘실 텐데······”
스타샤와의 대화는 언제나 그녀의 악의 없는 공격성 —이를테면 앞뒤로 크게 팔을 흔들며 걷는 행인의 뒤를 따라 걷다가 그 팔에 얻어맞는 식의— 으로 곤혹스러웠으므로 또 다른 인물의 등장은 알렉에게 고마운 것이었다.
“알렉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 이븐! 이거 참······ 반갑구먼. 그래, 그··· 참 반가워······.”
알렉은 얼른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리고 창가 쪽으로 붙어 이븐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스타샤가 그를 쳐다보며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넸다.
“늦었어.”
“잔베르에 들렀다 오느라. 성과는 좀 있었나?”
“똥개처럼 발발 싸돌아다니며 여기저기 휘젓는 모양이야. 일부러 이러나 싶기도 하고. 알렉, 그것 좀 보여줘요.”
알렉은 예의 거머리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이븐에게 건넸다. 유리병의 내용물을 들여다보는 이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익숙한 형태였고, 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이븐이 그것을 관찰하는 동안 스타샤가 물어왔다.
“국경 일은 어떻게 됐어?”
“그 얘기는 나중에 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이븐은 유리병을 들지 않은 쪽 손으로 자신의 코끝을 매만졌다. 그 의미를 파악한 스타샤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븐이 손끝으로 유리병을 두들기며 물었다.
“죽은 건가?”
“아냐, 조금씩 움직여. 마물 하나에 수십 마리씩 군체로 들어 있는 걸 보면 그 하나하나의 능력은 보잘것없는 모양이야. 아, 알렉, 이 내용도 추가해줘요.”
그렇잖아도 알렉은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며 어느새 꺼내든 종이에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던 중이었다. 이븐이 식탁 위에 유리병을 내려놓으며 반론을 제기했다.
“글쎄, 기생충처럼 몸 안에서 번식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그때 우리가 밟아 죽이려고 했을 때도 수 개로 분열했잖아.”
“보통 그런 경우면 뭐랄까, 생명력이 대단해서 주변의 생명체를 먹어치우려고 덤비는데 그렇진 않잖아.”
스타샤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주점의 문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저 인간이 여긴 웬일이야?”
“케넌이 붙여주더군.”
이븐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짓했다.
“막심, 여깁니다!”
문간에 서있던 남자는 이븐을 발견하고는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작은 체구만큼이나 날렵한 몸짓이었다. 그는 우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알렉과 악수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막심 에카르트입니다.”
“알렉 다르나브입니다. 연락원을 맡고 있죠. 그웬돌라드에서 사냥꾼 회합이라도 열리는 모양입니다그려.”
막심 또한 알렉과 마찬가지로 늘 웃는 얼굴이었는데 어째선지 그의 미소는 교활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이븐은 족제비라는 막심의 별명이 그토록 적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렉과 인사를 나눈 막심은 마치 이제 막 발견했다는 듯이 스타샤 쪽으로 향해 서며 과장되게 말했다.
“스타샤! 전장의 장미는 피를 머금고 만개한다더니, 당신의 미모가 칼이라면 이제 숫돌을 그만 괴롭히는 게 어떤가. 내 보기엔 이보다 날카로울 순 없을 듯하니.”
“안녕, 막스. 이마가 더 넓어졌네.”
심드렁하게 대꾸한 스타샤는 마지못해 옆으로 비켜 앉으며 자리를 내주었다. 그녀의 옆에 앉은 막심은 조금은 억지로 꾸며낸 듯한 미소를 걸친 채 넉살 좋게 받아 넘겼다.
“조명 때문에 그래.”
공연히 조명을 탓해본 그는 간식을 재촉하는 아이처럼 양 손바닥으로 번갈아 식탁을 두드리며 쾌활하게 말했다.
“자, 사냥꾼 셋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시험할 임무는 무엇일까요?”
“상대는 노블 다이스야. 좀 진지해지자고.”
스타샤의 핀잔에도 막심은 전혀 진지해질 기색이 없었다.
“순례자여, 먼 길 위에선 들꽃을 보라. 운명의 까다로운 망치 아래서 인내는 놋그릇처럼 시험 당하노니 찌푸린 얼굴일랑 최후의 최후까지 남겨둠이 마땅하도다.”
“라이지히. 제목은 모르겠군요.”
막심과는 마일스아이렌에서부터 동행해왔던 이븐이었으므로 그는 이런 식의 대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막심이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겼다.
“훌륭해. 제목은 ‘길 위의 순례자에게’야. 내가 좋아하는 시지.”
“독서토론회는 그쯤 해둡시다. 요샌 그런 것들도 위험한 모양이니 말입니다.”
“아, 이건 순문학이라는 겁니다, 알렉. 복잡한 일에 얽힐 염려는 없지요.”
대화를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본인의 노력은 아무래도 거기까지일 수밖에 없겠다는 듯 알렉이 스타샤 쪽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막심이 가만히 놔두면 언제까지고 떠들 수 있는 위인이란 사실을 아는 스타샤가 얼른 끼어들었다.
“케넌한테서 대충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가 쫓고 있는 건 카일로파드야. 본인 말로는 자작(子爵)이라던데. 그러니까 이제 주사위의 여섯 면 가운데 네 개는 분명해진 셈이지.”
“오펜하른에 나타났던 건 백작이랑 남작이라고 했었나? 다모크가 후작과 싸운 적이 있다고 하니 남은 건 공작이랑 소공녀로군.”
“싸운 게 아니라 꽁지 빠지게 도망친 거겠지. 아무튼, 여기 모르델반트에서 그 자식과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 실마리를 찾았어.”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븐이 스타샤의 말이 끝나자 식탁 위의 유리병을 가리켰다. 막심은 상체를 앞으로 숙여 얼굴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유리병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 고향 맑게 졸졸 흐르는 개울에도 이런 것들이 있지.”
“어디 뇌수가 흐르는 데서 자란 모양이지.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 머리통 속에서 꺼낸 거야. 권속을 부리는 데에··· 활용되었다고 추측하고 있어.”
스타샤의 설명에 막심이 다시 허리를 곧게 펴며 물었다.
“카일로파드와 연관되었다고 보는 이유는?”
“루퍼트 데어도크를 죽였을 때 그의 머리에서도 같은 것이 나왔습니다.”
대답은 이븐의 입에서 나왔다. 막심은 숱이 적은 앞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확실해야 할 텐데 말이지. 오펜하른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의미한 희생은 없어야···”
“스타샤!”
알렉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가 막심의 멱살을 부여잡은 스타샤를 저지하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맥주잔이 넘어지며 굴렀다. 스타샤가 얼떨결에 멱살이 잡힌 막심의 얼굴에 바짝 대고 을렀다.
“입, 함부로 놀리지 마.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무의미? 에이델 무덤에 대고 똑같이 말해 봐.”
분노한 음성에 옅은 떨림이 녹아 있었다. 이븐은 멱살을 잡은 스타샤의 오른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지. 내가 생각이 짧았네.”
완전히 항복했다는 것처럼 막심이 양손을 들고 말했다. 틀어잡힌 옷깃으로 입이 눌려 발음이 불분명했다. 빠른 사과로 김이 빠지고 만 스타샤가 막심을 자리 밖으로 밀쳐내고 일어섰다.
“비켜. 담배 피우러 갈 거니까.”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주점을 나가자 막심이 옷을 툭툭 털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불같은 여자야. 자네도 데지 않게 조심하라고.”
냅킨으로 엎지른 맥주를 닦아낸 이븐이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바람 좀 쐬고 오죠.”
“같이 나가세. 나도 수녀원에 전해줄 게 있는데 너무 오래 앉아 있었구먼. 어, 아무튼 에카르트 씨,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뵙죠.”
알렉의 말을 막심이 마무리했다. 여전히 쾌활한 어조였다.
- 작가의말
스타샤는 성격 구성에 공을 들이는 캐릭터 중 하나인데 독자 분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궁금하네요. 스타샤의 성질머리가 좀 과하다고 느껴질 때는 제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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