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막 2장 - 거머리 늪(1)
6막 분루
2장 거머리 늪
스타샤가 모르델반트의 시체들과 싸운 것이 불과 오늘이었으므로 카일로파드의 다음 활동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는 것이 셋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따라서 알렉이 건네준 의뢰서들을 검토하는 작업은 형식적으로 이루어졌고 자세히 살피더라도 혹 놓친 것이 없을까 하는 수준의 관심만이 동원되었다. 교구에 의뢰서를 보내고 그것을 연락원이 받아 다시 사냥꾼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해당 의뢰는 이미 며칠 전의 것이 되는 탓이었다.
“베르만이었나?”
의뢰서를 휙휙 넘기던 스타샤가 맥락도 없이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이븐이 대답 없이 눈썹만 치켜 올리자 스타샤가 부연했다.
“그, 왜, 웨인이 키우는 병아리.”
“베른트.”
“그래, 베른트. 어떤 것 같아?”
“괜찮던데. 실력도 성격도.”
뭔가 더 말할 것 같았던 스타샤가 다시 입을 다물고 의뢰서를 검토하자 이번에는 이븐이 물었다.
“갑자기 왜?”
탐문을 나갔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여관으로 복귀한 둘과는 달리 막심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거리는 이미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포장된 길이 띄엄띄엄 놓인 가로등의 불빛 아래서 점점이 끊어져 있었다. 마지막 의뢰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스타샤가 대답했다.
“의뢰서 보고 있자니 영감탱이 더럽게 바쁘겠구나 싶어서.”
“부펜하르크도 비슷하지 않나?”
“그렇긴 하지. 그러고 보니 이러면 베른트가 크라덴슈타트 교구로 발령 나겠는데.”
“은퇴 계획이 이렇게 또 무너지는군.”
크라덴슈타트는 루퍼트가 소속되어 있던 교구였다. 어쩐지 이븐은 웨인을 더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미 그 자신보다 두 배 이상 나이를 먹은 노인이 아직도 사냥꾼으로 뛰고 있다는 사실이 이븐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가 베른트를 체스바덴 교구 사냥꾼으로 눌러앉히는 방향으로 케넌을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문이 열리며 막심이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돌아올 걸 그랬네. 어째 내가 제일 열심히 돌아다닌 것 같아?”
“오셨습니까, 막심.”
의자가 두 개뿐이었으므로 막심은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고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베개를 겹쳐 등받이를 만든 그는 다리를 곧게 펴고 반쯤 누웠다. 막심이 이븐을 향해 물었다.
“성과는 좀 있던가?”
“웬걸요. 단안경은커녕 그냥 안경 쓴 이를 봤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방식을 좀 바꿔야 할까 봐. 단안경 같은 거야 벗으면 그만이잖나.”
막심이 뻗은 두 다리를 엇갈려 포개며 말했다. 스타샤는 등 뒤의 막심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븐을 향한 시선을 유지한 채 말했다.
“지성과 자의식을 가진 마물들, 특히 군주급 마물들은 꼴같잖게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저마다 특징적인 외형을 고집하는 놈들이 있지. 굳이 사냥꾼의 눈을 피할 생각도 없고, 잡을 테면 잡아보라는 식으로 말이야. 왜, 연쇄살인범들이 표식을 남기기도 하잖아. 그런 거랑 비슷한 셈이지.”
“확실히 카일로파드라는 놈도 그런 것 같더군. 자기 입으로 그랬지. 자신이 죽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우리가 놈을 죽일 수 없을 거라고. 우리가 놈을 찾는 것보다 놈이 다시 우리를 찾아오는 게 빠르겠는데.”
웨인과 함께 셋이서 루퍼트를 쫓던 때를 떠올리며 이븐이 말했다.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누워있던 막심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문에서 제일 가까웠던 것은 이븐임에도 불구하고 문고리를 먼저 잡은 것은 막심이었다.
“내려와··· 보셔야겠어요.”
계단을 뛰어 올라왔던 모양인지 소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막심, 이븐 그리고 스타샤가 차례로 소년을 따라 내려갔다. 여관의 로비에는 주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 남자의 다리에 붕대를 둘둘 말고 있었다. 탈진한 듯 소파에 기대어 앉은 남자의 셔츠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알렉!”
이븐이 달려 나가 알렉의 부상을 살폈다. 풀어헤친 셔츠 아래로 보이는 상처는 다행히 깊지 않았으나 문제는 붕대를 감고 있는 다리였는데, 피가 붕대를 적시며 끈질기게 새어나왔다. 큰 핏줄을 건드렸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으므로 좋지 않은 신호였다. 막심이 다가와 여관 주인을 밀치고 붕대를 풀었다.
“의사를 불러요, 어서!”
버럭 고함을 지른 막심은 알렉의 오른다리를 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린 채로 젖은 붕대를 이로 끊어냈다. 그는 다시 힘주어 찬찬히 무릎 뒤쪽에 세로로 깊게 팬 상처를 붕대로 감았다.
“눕혀, 이븐. 상처 부위가 심장보다 낮으면 안 돼.”
막심의 지시에 스타샤가 다가와 이븐을 거들었다. 힘이 빠진 알렉의 몸이 제법 육중했다. 우습게도 그 무게 때문에 이븐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알렉도 오십이 가까운 나이지만 어떻게든 견뎌 내리라. 다친 다리를 소파의 팔걸이에 얹은 뒤 이븐이 알렉의 안색을 살폈다. 눈가가 해쓱했다. 알렉이 힘겹게 든 손으로 이븐을 가까이 불렀다. 이븐의 귓전에 대고 알렉이 끊어질 듯 위태롭게 말했다.
“수녀원··· 수녀원이네, 이븐. 거기 있어.”
*
알렉의 곁에 누군가 하나 남아야 한다는 스타샤의 주장은 막심의 반대와 그에 대한 이븐의 동조로 무산되었다. 말에서 내려 수녀원으로 들어서며 이븐은 마당을 살폈다. 마구간의 말들이 전에 봤던 것보다 두어 마리 많았고 —개중 한 마리는 이븐 자신이 기증한 것임을 감안하고서도— 핏자국이 흩어져 있었다. 이븐은 자세를 낮추고 피 냄새를 맡았다. 익숙한 냄새였다. 방문자 중 살아나온 이가 알렉밖에 없었다는 의미였다.
밖에서 바라본 수녀원의 불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모두 꺼져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이 해가 떨어지기 전이라는 의미였고, 이븐과는 달리 어둠 속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스타샤와 막심에게는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스타샤는 이븐이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었고 무엇보다도 막심은 교황청의 사냥꾼이었다. 케넌이 이븐에게 그를 붙여준 데에는 독서토론 따위의 한담이나 즐기라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 와본 적이 있나?”
이븐의 말에 반문하는 막심의 표정에 여유가 있었다.
“일 때문에 한 번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만 내부구조를 꿰고 있지는 못합니다. 현관으로부터 원장실로 이어지는 길 정도가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조언 하나 할 테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나는 교황령에 있는 주요한 기관 건물들의 내부 구조를 모두 외우고 있어. 필요할 때가 있거든.”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 보이는 이븐의 뒤에서 스타샤가 빈정거렸다.
“그거야 교황령이 코딱지만 하니까 그렇지.”
“대피가 완료된 다음 진입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인근 주민들의 대피는 치안청의 협조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녀원은 모르델반트 내에서도 조금 외따로 떨어져 있는 덕분에 그 주변에는 인가가 드물었지만 도시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찾기가 힘든 만큼 몇 채가 있기는 했다. 애당초 모르델반트의 수녀원은 가장 가까이서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봉사 정신에 기반을 두고 건립된 곳이었으므로 민가와의 인접성은 필연이었다.
“저 안의 수녀들은 운명에 내맡기고? 너 원래 그런 자식이었어?”
스타샤의 말이었다. 이븐이 염려하는 것은 수녀원의 마물이 뛰쳐나와 피해가 도시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그가 스타샤를 돌아보며 차분하게 답했다.
“더 나쁜 일이 있고 덜 나쁜 일이 있는 거지.”
“자, 싸우지들 마시고 이렇게 하지.”
다시 한 번 발끈하려는 스타샤를 제지하며 막심이 말했다.
“이븐, 자네 몸이 좀 특별하다고 들었는데.”
“어둠 속에서 싸울 수 있느냔 말씀이시라면, 네, 그렇습니다.”
“좋아, 자네와 내가 들어가자고. 스타샤··· 아니, 역할을 바꾸지. 내가 밖을 지키고 있을 테니 둘이 들어가. 신호를 주면 나도 따라 들어가도록 하지. 어때, 기가 막히지?”
딱히 기가 막힐 부분은 없었으나 이븐은 수긍했다.
“신호는 어떻게 드리면 되겠습니까?”
“유리창을 연달아 두 번 깨는 걸로. 그럼 위치도 알 수 있으니까.”
스타샤가 제안했다. 이븐이 수녀원을 향해 앞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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