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막 4장 - 핏물을 닦아내고(1)
6막 분루
4장 핏물을 닦아내고
“알렉은 괜찮은 것 같더군요.”
예배당의 장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막심이 깨어나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이븐의 말에 대꾸했다.
“그거 다행이군.”
외투가 단순히 보온이나 장식을 위한 의복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옷을 한 꺼풀 벗어냈을 뿐인데도 그의 모습은 어딘지 초라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피로 젖은 셔츠와 목에 감은 붕대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피를 많이 흘려서 당분간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제가 듣기로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몸은 튼튼한 양반이니까 어떻게든 이겨내겠죠.”
막심은 이븐이 건네준 수통의 냄새를 맡아보더니 다시 이븐에게 되돌려주었다.
“술은 안 마셔.”
부상과 피로로 막심의 눈 밑이 시꺼멨다. 그는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두어 차례 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스타샤가 측랑의 기둥에 기대어 치안청의 경관들이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븐이 다가가자 스타샤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이븐의 편 손 위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은 뒤 말했다.
“뭔 것 같아?”
“머리카락이군.”
“사방에 널려 있어.”
이븐은 받아든 머리카락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굴리며 찬찬히 뜯어보았다. 뿌리가 없는 걸로 보아 뽑아낸 것이 아니라 잘라낸 것인 듯했다.
“신체 변이가 소공녀의 특기였군. 머리카락을 거머리로. 그렇다면 거머리가 다시 머리카락이 됐단 건······.”
“아니, 신체 변이는 부차적인 거지. 진짜 능력은 조종에 있다고.”
스타샤가 이븐의 말을 끊었다.
“오펜하른에서는 이것보다 더했지.”
들것에 실려 예배당 밖으로 옮겨지고 있는 수녀들의 시체를 훑어보던 그녀의 눈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그러나 그 눈은 예배당 안의 어떤 것이 아니라, 여기에 없는 어떤 장소를 바라보는 듯했다.
“사람들이 녹아내렸어. 말 그대로 빌어먹을 눈처럼 녹아내렸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육신이었던 것들로 곤죽이 된 땅을 밟아본 적 있어? 그때 냄새가 잊히지 않아.”
이븐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는 스타샤가 계속 말을 이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사람 몸속에는 또 얼마나 장기가 많은지. 난 장기라면 다 빨간색인 줄로만 알았지. 핏물에 버무려진 것만 봤으니까. 시체 녹은 물 위에 덩이져 떠다니던 그 내장들··· 어떤 건 허옇고 또 어떤 건 누렇고······.”
이븐은 스타샤의 말을 들으며 시신을 운반하는 경관 곁에서 일을 거들고 있는 메이윌을 보았다. 수녀복 위로 두른 하얀 앞치마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뿐 아니라 새벽까지 이어진 광기의 현장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다른 수녀들 역시 시신 사이를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일로파드와 소공녀의 목적은 단지 이븐 하나였던 듯, 다른 수녀들은 환자들과 함께 감염된 수녀들의 감시 아래서 병실에 갇혀 있었다. 감염되어 죽은 이들의 수는 사십을 조금 웃돌았을 뿐이었다.
“테니아가 우릴 불러 모았지. 확실히 사냥꾼 하나로 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여섯 명이 모였어.”
스타샤가 말을 멈추고 돌연 웃어 보였다.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코끝으로 몇 번 끊어 숨을 내뱉는 그녀의 몸이 조금 들썩였다.
“말하고 보니 지금은 그 여섯 명 중에서 세 명만 살아있네. 전에 케넌하고 있을 때도 얘기했지만 에이델이 그때 죽었지. 왜 죽었는지 알아? 병신같이 어떤 여자애 하나를 구하려고 했었거든.”
“‘그때 그 여자애’가 소공녀였군.”
이븐이 사냥 중에 스타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맞아. 사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녹아서 발밑에 흐르는 그 시체들이 악취를 뿜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남작의 능력이 그렇게 광범위하게 발휘될 수 있었던 건지, 죄 뒤틀리고 문드러진 것처럼 보였거든. 어쨌거나 싸움이 일단락된 뒤에 한 가지는 분명해졌지. 에이델이 뒤져간다는 거.”
스타샤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칼이 흔들리며 공기 중에 번진 체취가 이븐의 코에 닿았다.
“그 계집애는 깜찍하게도 우리가 있던 곳에 여자 하나를 보내서 자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기까지 했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여자도 망할 거머리가 머릿속에 들어찼던 거였어.”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주시하던 스타샤가 또 한 번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고 웃던 그녀는 소공녀가 꼭 그러했던 것처럼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깜찍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이렇게 뒤질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어디까지 알고 이 일을 벌였는지 궁금할 따름이야. 우리의 계획에 알렉의 행동 경로까지, 거기다가 메이윌과 내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어.”
“그래, 그거. 저 수녀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
스타샤가 고개를 까딱여 턱으로 메이윌을 가리키며 물었다. 메이윌은 이제 경관의 옆에서 시신의 이름을 확인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이븐은 어쩐지 대화가 빗나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들개인간들 잡을 때 미끼가 필요했거든.”
“그런데 오늘 새벽에는 널 잡을 미끼 역할을 했고. 내 팔자라고 뭐 늘어진 건 아니지만 정말 기구하다, 기구해.”
그 말을 끝으로 스타샤는 기대고 있던 기둥에서 몸을 떼며 시신들을 향해 나아갔다. 이븐은 스타샤가 메이윌의 앞치마를 뺏어들다시피 하고 그녀를 예배당 밖으로 쫓아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충분한 숙면은 대체로 명징한 사고로 이어진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건 아직 잠기운을 다 벗어던지지 못한 인간의 입에서 나온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잠들기까지 머릿속에서 끌고 다녔던 질문들은 깨고 난 뒤에는 오히려 더 헝클어질 뿐 아니라 이 질문이란 것들은 답변 제시에서의 서로의 서로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며 아우성이었다.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의 벌어진 아가리처럼, 혹은 개흙 위로 대가리를 쳐드는 갯지렁이들처럼.
이븐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의자를 당겨 창가에 앉았다. 해의 위치로 가늠한 시간대는 오전 열 시쯤이었다. 시신의 수습을 지켜보고 치안청 경관들에게 추가적 조치에 대해 일러두고 나서야 이븐을 포함한 사냥꾼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븐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해답을 기다리는 질문들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노블 다이스는, 적어도 카일로파드와 소공녀는 두 차례에 걸쳐 사냥꾼을 자신들의 수중에 넣으려 했다. 왜, 무엇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미 세워둔 가설이 있었다. 경쟁 세력의 견제를 위한 장기짝이라는 것. 그 대상이 하필 이븐이었던 것도 그가 여타의 사냥꾼들과 다른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들이 처음 접근했던 루퍼트보다 더 훌륭한 조건을, 이븐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이븐은 가구를 새로 해 넣을 필요 없이 집과 가구가 함께 내놓아진 임대 계약처럼 보였을 것이다.
- 작가의말
매 장마다 제목을 붙이는 게 고역이네요. 이 장의 제목도 마음에 안 들어 조만간 바꿀 것 같습니다.
스타샤의 대사 일부를 수정하였습니다. - 18.1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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