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막 4장 - 핏물을 닦아내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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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내에서 그대로 변이가 풀리면? 정확한 기제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뇌의 활동에 관여하는 게 분명하고, 그렇다는 건 감염부위에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뇌가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야.”
“지금 이 거머리처럼 활동성 있는 감염인자는 체내에 있을 때 그 주인이 명령을 하달하는 게 더 어려워. 말하자면 인간의 몸이 담장 같은 장애물이 되는 셈이지. 주인으로부터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경우 명령 하달 체계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판단, 이 경우에는 본능이란 말이 더 적절하겠지, 아무튼 그런 본능 때문에 체외로 빠져나오는 경우가 많아. 그 주인에게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말이지.”
이론보다는 행동과 실천에 더 많이 기울어 있는 삶을 사는 스타샤였지만 그녀 역시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젠체하는 학술 용어의 사용은 그녀의 성미와 맞지 않았지만, 반론을 펴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 또한 그녀의 특기였다. 막심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신할 수 있어? 다 잘 될 거란 식의 낙천성이야말로 사냥꾼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아니던가?”
스타샤는 이 난처한 상황에 짜증이 솟구쳐 고개를 돌렸다. 방 안에서는 이븐이 남자와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네, 그럼 이건 제가 글라트펠트 연구소에 직접 전하겠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가 무어라고 대꾸했으나 부상으로 기운이 빠진 탓인지 말소리가 작아 스타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네, 알렉도 몸조리 잘하십시오.”
이븐이 방을 나오며 문을 닫았다. 그의 손에는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살아있습니다. 머리카락으로 변하지도 않았고요.”
감염인자를 매개로 권속을 부리는 경우 감염된 권속 자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보다도 설정된 권역 안에 존재하는 매개체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유리병 안에 든 거머리가 말하는 것은 알렉이 여전히 소공녀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알렉이야. 본인의 의식을 유지하면서도 감각 정보를 본체에 공유할 정도라면 소공녀도 상당히 공을 들였을 테고 그럼 그 감염인자, 그러니까 거머리가 한두 마리가 있는 게 아닐 거란 말이지.”
막심이 신중하게 말했다. 그들은 지금 소공녀를 쫓아 일을 마무리 짓느냐, 연락원의 안전을 우선시하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죽은 수녀들을 부검해보는 건···”
“경우가 다르지. 그건 숙주가 죽은 거고 지금 우리가 하려는 건 주인, 본체를 죽이는 거니까.”
이븐의 말에 막심이 즉각 반박했다. 이번에는 스타샤가 방법을 제시했다.
“아니면 그 수녀가 너한테 그랬던 것처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이븐이 피식 웃었다.
“그건 소득은 없고 영혼에 상처만 남을 것 같군. 소공녀가 또 다시 그때와 같은 일을 시도하리란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려는 일을 눈치 채면 알렉에게 해를 입힐까 걱정이야. 루퍼트의 죽음에는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었지.”
이븐이 루퍼트의 머리가 그들 앞에서 터져 버렸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가 막심을 보며 말을 이었다.
“카일로파드와 소공녀는 부상으로부터의 회복과 자신이 설정한 권역을 변경하는 일을 위해서 아직 모르델반트를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지금, 권속을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해서는 근처에 있어야 할 테고요. 알렉의 몸에서 안전하게 감염인자를 제거하는 방법은, 제가 생각하기에 하나뿐입니다.”
“교섭이군.”
막심이 나직이 말했다. 이윽고 스타샤가 제기한 반론은 이븐 역시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뭘 걸고? 마물 따위와 교섭해야 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우리 쪽에는 낼 수 있는 카드가 없어. 뒤쫓지 않겠다는 거? 그건 말에 그칠 뿐이란 사실을 우리도 알고 저쪽도 알 거야.”
이븐이 스타샤를 쳐다보며 불렀다.
“스타샤.”
“불안하게 이름 부르지 마.”
“루퍼트 데어도크가 왜 노블 다이스에 협력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난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진 알겠는데···”
“맞아, 내가 협상 카드가 되겠어.”
스타샤가 콧바람을 내보내고 막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븐의 계획을 대체할 만한 방안이 그들에게 없다는 사실은 이 논의가 예정된 결말로 향할 것임을 의미했다.
“소공녀가 회복해서 여길 떠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합니다. 알렉을 계속 저 상태로 내버려 둘 수 없고, 이들의 계획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건 기회인 거죠.”
“좋아. 그렇다면 방법은?”
“알렉.”
알렉은 여전히 소공녀의 영향권 아래 있을 터, 그렇다면 그가 얻는 시각적, 청각적 정보는 고스란히 소공녀에게도 전달될 것이었다. 말없이 듣고 있던 스타샤가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이븐이 다시 방문을 열었다.
그 사이 알렉은 잠들어 있었다. 침대 옆의 의자에 앉은 이븐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때 이른 재방문에 어리둥절해진 그는 곧 이븐의 말을 듣고 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알렉,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듣고만 계시면 됩니다.”
“어려운 일이야 아니지마는···”
“자세히 설명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이븐은 뒤를 돌아 스타샤와 막심을 살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븐은 교섭을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정보를 취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근방에 있다는 것도. 우리는 언제든 색출 작업을 실시할 수 있다. 이번만큼은 확실히 끝내주겠다고 약속해줄 수 있을 것 같군. 하지만······.”
“이게 헛짓거리가 아니어야 할 텐데.”
뒤에서 스타샤가 신랄하게 말했다. 알렉이 괜스레 멋쩍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네가 정보를 얻기 위해 감염시킨 몸에서 감염인자를 모두 제거한다면 다음을 약속하겠다. 첫째, 네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너를 쫓지 않겠다. 둘째, 나 혼자 찾아가 카일로파드와 얘기를 하겠다. 너희들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걸로 아는데 말이지. 셋째, 둘째 사항의 연장선상에서 내가 너희들의 두 번째 루퍼트가 되어 줄 수도 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스타샤가 당혹감을 표출했지만 이븐은 말을 이어갔다.
“앞의 둘은 확실히 약속하지. 세 번째 사항은 만나서 더 자세히 얘기하는 걸로 하고. 이제 내가 대답을 들을 차례인 것 같은데.”
이븐이 말을 마치자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벽에 기댄 스타샤가 시계추처럼 앞뒤로 오른다리를 움직여 바닥을 긁는 소리만이 주기적으로 들렸다. 이븐은 병자 앞이라는 것도 잊고 담배를 빼내 입에 물었다. 그가 불을 붙이려는 차에 돌연 알렉의 안구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분명 알렉의 것이었지만 전혀 친숙하지 않았다.
“장소는 내가 정할 거야. 이 아저씨를 풀어주는 건 네가 우릴 만나서 얘기한 다음이고.”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6막은 다음 5장에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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