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막 5장 - 밀알 하나도 놓치지 않고(1)
6막 분루
5장 밀알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마차를 따라 옆에서 걷던 이븐이 물었다. 그의 말은 마차를 끄는 중이었다. 내리막길이 끝나고 평지에 접어든 덕택에 밧줄로 엉성하게 만든 마구(馬具)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이븐이 마차의 속도를 제어하며 끌었고, 그래서 그의 등은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땀에 절어있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여자가 답했다.
“장례 치른다. 그 다음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비용은?”
이븐이 재차 묻자 이번에는 앞서 걷던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자꾸 캐물어 대는 거야!”
이븐이 잠시 입 안에서 말을 고르는 동안 뷔센의 안장으로부터 용수철이 삐거덕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안장 위에서 그의 몸이 졸고 있는 사람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현지 인적 자원 활용에 관한 조항을 적용하면 조력자 자격으로 임무 중에 사망했으니 교단에 보상의 책임이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유가족에게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경우엔 제가 오스왈드와 당신들의 관계에 대해 보증해드릴 수 있겠군요. 거기다가 마을에서 처치한 마물 가운데 상당수는 당신들 몫으로 돌릴 수 있을 테고요.”
“돈으로 달래겠다고? 하, 이디나르의 궁둥짝에 대고 맹세컨대 네깟 놈들이 주는 돈은 한 푼도 안 받을 거야.”
그렇게 말한 앰버가 숫제 맞으라는 듯 뒤를 돌아 침을 뱉었기 때문에 이븐은 잠깐 멈춰 섰다. 차분한 반응은 언제나 올가로부터 나왔다.
“후한 조건을 말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븐이 올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왼손으로 오른쪽 갈빗대를 붙잡고 씨근덕대고 있었다.
“사냥꾼이 되십시오. 훈련을 받고 정식으로 사냥단의 일원이 되라는 뜻입니다. 파스귄트 마을의 일은··· 그 내막에 대해서 충분히 짐작하는 바가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더 파헤치지 않는 조건으로 두 분 모두 사냥단에 합류하는 걸로 합시다.”
그 거대한 마물을 처치하고 나서 마을을 둘러보았던 이븐이었다. 그는 헛간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자물쇠와 내부의 흔적을 보고 추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올가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미 내 발로 나온 곳이므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 없다.”
이건 앰버도 몰랐던 모양인지 고개를 홱 돌려 올가를 쳐다보았다. 올가가 나직이 말했다.
“수습기간 중에 나왔다. 넉 달 동안 배웠고 도중에 스승이 죽었다. 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예나첸까지 닿으려면 아직도 서너 시간을 더 가야했다. 외투를 벗겨 덮어놓은 시체에서 흘러나온 추깃물 냄새가 부정할 수 없이 코끝을 간질였다. 올가는 땀 때문에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말을 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일이 너무 많았다. 부상을 입고도 다음 임무를 받았다. 그런 일이 계속됐다. 마지막에는 위험하니 자기 혼자 가겠다고 했는데 결국 죽었다.”
사냥단은 언제나 인력난에 시달렸다. 교단의 전폭적인 지원, 대의를 위해 몸 바친다는 낭만 따위를 모두 감안하더라도 그 민낯은 평균 근속 연수가 오 년에 미치지 못하는 직업인 것이다. 드넓은 그웬돌라드 지역의 담당 사냥꾼이 고작 세 명이라는 것, 거기다 지금처럼 무슨 일이라도 생겨 두 사냥꾼이 한 자리에 모이면 그웬돌라드의 삼분의 일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은 이븐이 느끼기에 당찮은 사실이었다.
“다흐트만에서 더 올라가면 모르델반트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들어보셨습니까?”
“안다. 가본 적도 있다.”
이들을 사냥꾼으로 양성할 수 없다면 이븐이 생각하는 차선책은 그웬돌라드에 묶어두는 것이었다.
“모르델반트, 루단을 거쳐 교황령으로 이어지는 길에 마물의 출현이 잦습니다. 최근에 저도 거기서 몇 마리 잡았고요. 모르델반트는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니까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기 좋을 겁니다.”
“이것 봐, 우린 집 지키는 개가 아냐. 돈 냄새를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우리 같은 용병들이라고.”
가만히 듣고 있던 앰버가 이븐의 말을 보다 직설적으로 요약했다.
“제안보다는 권고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게다가 모르델반트에 붙어 있으면 돈 냄새는 끊이지 않을 겁니다. 그건 제가 약속드리지요.”
이븐의 말에 뷔센이 프흐흐- 하고 그 특유의 바람이 새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앰버가 다시 침을 탁 뱉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 자국이 있었다. 앰버가 올가를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어쨌거나 부상 때문에라도 한동안은 어디든 붙어 있어야 했다. 침묵 속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이븐이 입가를 조금 올려 웃었다. 뷔센을 따라나선 일로 뜻밖의 수확이 생긴 것이었다.
“그보다, 올가. 네 스승이라는 사냥꾼은 어쩌다가 죽은 거야?”
앰버의 물음에 올가가 앉아있던 자세를 힘겹게 바꾸며 답했다.
“어린아이를 구하다가 죽었다고 들었다. 자세한 건 모른다.”
안장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뷔센의 몸이 유난히 크게 휘청거렸다.
*
“어쩌자고 그 따위 것들을 약속한 거야? 자넨 스타샤하고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말이지.”
“내가 뭐?”
“아, 스타샤. 이건 인정하라고. 넌 신중한 인물은 결코 아냐.”
막심과 스타샤가 옥신각신하는 동안 이븐은 방금 소공녀가 알렉의 몸을 빌려 전한 말들을 되짚어 보았다. 이 시간부로 이븐을 제외한 두 사냥꾼은 알렉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즉 이 방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요구였다. 이어서 불러준 주소는 푀르만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이븐은 모르델반트에 대해 자신이 아는 정보를 모두 동원해 그것이 도시 장인들의 거주지역임을 기억해냈다.
“소공녀가 우리의 요구를 이행한다면, 저도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신호를 정하죠.”
그들이 있는 곳에서 푀르만 거리까지는 제법 멀었다. 더욱이 오전이었으므로 횃불을 치켜드는 식으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없었기에 방법에는 제약이 따랐다.
“그 계집애가 다 죽어간다고 해도 여전히 카일로파드가 남아있어. 너 혼자선 무리야.”
“대화를 하러 가는 것뿐이야.”
이븐은 스타샤의 말에 그렇게 대꾸했으나 진심은 아니었다. 스타샤는 여전히 이 교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또 다시 신랄하게 덧붙였다.
“너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자, 그만. 이미 던져진 주사위야. 나한테 피안개가 있으니 그걸 신호로 정하자고. 이 방에서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 이븐 자네가 좀 가져와 주겠나? 안장 주머니에 있어.”
피안개는 태우면 붉은 연기가 나는 가루였는데, 원거리에서도 가시성이 좋아 신호로 사용됐다. 마물의 뼛가루가 들어간다는 걸 제하면 이븐도 그 성분을 알지 못했다. 항마연구원에서 자랑하는 사냥 보조도구 가운데 하나였고 주로 여러 사냥꾼들이 참여하는 합동 작전에서 사용됐다.
“좋습니다. 정리해 보죠. 제가 가서 그들을 만나고 요구 조건을 얘기할 겁니다. 그들도 시간을 벌어야 하니 처음부터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여기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스타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막심이 이븐의 말을 넘겨받았다.
“소공녀가 요구 조건을 이행한다면 우리가 확인하고 신호를 보내도록 하지. 은제 무기를 피부에 가져다 대는 걸로도 어느 정도 확인이 될 거야.”
알렉이 듣고 있었으므로 막심 역시 요구 조건이라는 용어로 보다 자세한 내막을 감췄다. 전령 역할이 끝난 알렉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로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 후에도 우린 계속 여기 있으면 되는 거지? 망할 계집애하고 자작 나부랭이가 부리나케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고?”
스타샤의 말에 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 위로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The millstones of the gods grind late, but they grind fine(신의 맷돌은 느리게 돌지만 밀알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라는 격언은 엠피리쿠스의 『Adversus Grammaticos』가 출처인 것으로 여겨지며 그 번역은 전민희 작가의 『룬의 아이들 - 윈터러』를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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