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막 5장 - 밀알 하나도 놓치지 않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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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열려 있었다. 가장 먼저 끼쳐오는 것은 알코올의 냄새였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약품들의 냄새가 그 뒤를 따랐다. 코를 깊숙이 찌르고 머리 뒤쪽을 관통해나가는 듯한, 불쾌할 정도로 청결한 냄새 사이에서 이븐이 분간해낼 수 있는 것은 상처와 고름의 불길하고 정직한 악취였다. 진료와 주거를 겸하는 의사의 집이었다.
폐와 심장 그리고 혈액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한 이래 의학은 전에 없던 일대 변화를 겪었다. 많은 것들이 변했고, 그러는 와중에도 어떤 것들은 여전했다. 이븐이 지금 와 있는 곳은 바로 그런 과도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가림막 뒤에 놓인 의자는 아마도 수술대겠지만 그보다는 고문 의자를 연상시켰다.
혹자는 마물의 등장이 의료의 혁신을 앞당겼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보다 진보적이고 과감한 이들은 마물 특유의 회복력을 인간 신체에 적용시킬 방안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마물의 체액을 혈관에 주입하는 요법은 병세가 절망적인 이들이 매달리는 것이었지만 냉큼 달아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기꾼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줬을 뿐이었다.
이런 시도는 민간에서 훨씬 원시적인 형태로 시행되어서 교황은 마물의 장기를 매매하는 것을 금하고자 했는데, 들개인간의 간을 삶아먹은 이가 감염인자는 웬만한 고온에서는 파괴되지 않는단 사실을 증명해준 뒤로 나이로드 교황의 이 같은 노력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접객실과 진료실 모두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이븐은 계단을 타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커튼을 쳐놓은 탓에 대낮인데도 컴컴했다. 손마디 관절로 나무판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븐이 고개를 돌렸다. 식탁을 앞에 두고 카일로파드가 앉아있었다. 이븐이 다가가 의자를 당겨 마주 앉았다. 카일로파드의 희고 얇은 피부 아래에 깔린 초조함을 읽어낸 이븐이 속으로 미소 지었다.
“혼자 오셨군요.”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좋은 출발입니다. 바라건대 지금부터 있을 우리의 회담 동안에도 그처럼 신중한 태도가 유지되기를.”
여전히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말씨였으나 꾸며낸 듯 억지스러운 느낌이 드는 까닭은 여유가 사라진 탓이었을 것이다. 이븐은 등받이에 기댄 채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기척이 없었다.
“여기 사는 의사도 감염시켰나? 그렇다면 전에 얘기했던 조건에 의사도 추가하는 걸로 하지. 아니, 아예 이 도시를 조건으로 걸어두자고. 모르델반트를 떠날 때 지긋지긋한 거머리들을 데리고 가는 거야.”
“그렇게 해드리죠.”
소공녀의 안전을 보장하는 안건이 그만큼 절박했던 때문인지, 아니면 이븐이 제시한 조건이 하찮았던 것인지 카일로파드는 흔쾌히 동의했다. 이븐이 이어서 말했다.
“그 외에는 요구할 게 별로 없어. 우리들이야 단순한 족속들이니까. 이건 요구라기보다는 충고에 가까운데 이 회담이 끝나는 즉시 모르델반트를 떠나도록 해. 계속 여기 남아 요행을 바란다면 글쎄, 모든 사냥꾼이 나만큼 인내심이 있는 건 아니라서.”
“그것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카일로파드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이븐은 비소를 흘렸다. 짐짓 거드름을 피우는 이븐의 태도는 물론 계산된 것이었다. 그는 담뱃갑을 들어 이로 담배를 빼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성냥을 흔들어 끄던 이븐이 성냥과 카일로파드를 번갈아 살폈다.
“아, 미안. 놀랐나?”
카일로파드는 대꾸하지 않고 손을 저어 그를 향해 끼쳐오는 담배 연기를 흩었다. 이제 이 마물의 얼굴 위에는 감출 수 없는 불쾌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 루퍼트 데어도크에 대해 얘기해보지.”
“의문이 있다면 제가 풀어드리는 것이 좋겠군요.”
질문을 받겠다는 것은 얼핏 어떤 의문점도 해결해주겠다는 열린 자세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은 제한된 정보만을 선택해 제공하겠다는 뜻이었다.
“너희들이 루퍼트를 내세워 싸우려 했던 대상은 누구지?”
“예상했던 질문이지만 답변은 조금 모호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부디 성에 차지 않더라도 보다 적절한 시기를 기약해주시길.”
카일로파드는 옷깃으로 단안경을 문질러 닦았다. 그 사이 이븐은 닫힌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미약한 기름, 화약 냄새 그리고 탄내를 코로 잡아챘다. 소공녀도 여기 있다.
이어진 카일로파드의 말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장황했다.
“베르자크 씨가 생각하시는 바와는 사뭇 다르게 탯줄 없이 태어난 자, 즉 마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닙니다. 우리를 위협해오는 사냥꾼, 용병 들에 대항할 만큼의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동시에 식량 자원을 두고 일어나는 경쟁이 과열되지 않을 만큼 서로 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과제가 우리에겐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바로 적정선일 것입니다. 쉬이 사냥 당하지 않고, 또 굶지 않을 정도의 개체수. 우리 노블 다이스는 바로 그런 개체수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아, 이거 정말 고맙군그래. 어쩐지 죽이고 죽여도 줄지를 않더라고.”
이븐은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기실 그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군주급 마물이 마물들의 개체수를 조절한다는 이야기는 지금껏 들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븐이 알고 있는 마물이란 요원의 불길과 같아서 번지고 뒤덮는 것만을 유일한 미덕으로 삼고 있는 짐승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마물들, 특히 통제되지 않는 마물들의 제거는 오히려 우리의 방향성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지요. 예컨대 베르자크 당신이 파스귄트에서 잡았던 적목사잠 같은 경우 말입니다.”
이븐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파스귄트를 입에 담는 카일로파드의 의중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븐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가장해 말했다.
“나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군.”
“다르나브 씨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지요. 이번 일로 그를 잃게 되어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실로 그러할 것이다. 연락원의 손을 거치는 의뢰서와 보고서는 사냥꾼의 행적을 재현하는 데에 모자람이 없었을 터이니. 이븐은 알렉의 감염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을 경우를 가정해보며 아찔함을 느꼈다.
“여하간 이런 우리의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 마물의 존재 가치는 확장에 있다고 믿는 이들 말입니다. 데어도크 씨는 그들의 의견을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단 우리의 의견에 공감해주셨습니다.”
카일로파드가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은 자세한 정보가 사냥단에 넘어갈 경우 두 세력의 공멸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븐은 잔베르에서 케넌, 스타샤와 회의를 가졌던 이후로 줄곧 그러한 계획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의 교섭과 회담을 밀어 붙였던 것도 이러한 계획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래서야 끝도 없이 겉돌 뿐이군. 서로의 꼬리를 물려고 뱅뱅 돌면서 말이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 드는 상황이 우스워 이븐이 말했다. 노블 다이스는 사냥꾼을 이용해 경쟁 세력을 잡으려 드는 한편, 이븐이 생각하는 사냥단 최고의 수(手)는 노블 다이스와 경쟁 세력 간의 싸움을 부추겨 어느 하나를 제거하고 이어 남은 하나를 사냥단이 제거하는 것이었다. 재밌는 것은 이븐이 생각하는 바를 카일로파드도 알고, 카일로파드가 그걸 안다는 사실 또한 이븐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루퍼트를 감염시켰던 것은 결국 완전한 통제 하에 두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돌려 말하자면 이븐이 다시 한 번 거머리 한 움큼을 삼키지 않는 이상 카일로파드도 더 자세한 정보를 내놓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스스로의 머리에 대고 총을 쏠 순 없었다. 뒤를 봐줄 사람이 너무 멀리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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