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막 5장 - 밀알 하나도 놓치지 않고(3)
“내 육체의 주도권을 너희들에게 넘기는 일은 결코 없을 거란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을 텐데.”
“주도권을 양도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보다 긴밀히 협력하자는 것이지요.”
카일로파드의 말에 이븐이 나직이 웃었다. 누구도 정직해질 의향은 없다. 이븐은 더 많은 비밀이 자신의 수중에 남아있기를 바랐다.
“말이나 못 하면.”
이븐은 깊게 빨아들인 담배를 손가락으로 비벼 껐다. 상한 손가락 끝이 금세 아물었다. 식탁 위에 꽁초를 올려둔 그는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사람처럼 한 대를 더 피워 물었다. 메마른 입 안이 텁텁했다.
“이렇게 하지. 내가 너희들 사냥개 노릇을 하는 거야. 지목하면, 물어다 바치겠어.”
“베르자크 씨, 당신들 인간······.”
카일로파드는 곧 말을 멈추고 자신의 말실수를 사죄한다는 의미로 이븐을 향해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이런 식의 저급한 도발은 이븐이 먼저 시작했으니 그로서도 할 말은 없었다. 다만 이븐은 반쪽짜리 인간 취급에는 이미 익숙한 터라 개의치 않았다.
“인간들은 우릴 마물이라 부르지만 마물들, 적어도 지성을 갖춘 마물들은 인간과 많은 면에서 흡사합니다. 본능보다는 이해득실이 동기가 되어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다면 마물은 육체능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말미암은 실천력과 과단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뭐랄까, 인간보다 조금 더 꾸밈없이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요.”
카일로파드의 말주변에 이븐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마물들의 솔직함이야 사냥꾼인 이븐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욕망에의 충실성이 솔직함의 지표라면 이븐은 거짓과 위선이 이 노골적인 땅을 뒤덮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습다 생각하실지 몰라도 우리는 그런 마물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입니다. 밀고자 노릇을 할 수는 없지요. 자존심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적절한 단어가···”
“위상.”
카일로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추락한 위상은 다시 복구하기 힘들뿐더러 우리의 지위를 탐내는 이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들의 솔직함이 명분을 앞세우면 더욱 적나라해진다는 것이지요.”
체면까지 생각하는 마물이라니, 이븐은 노블 다이스와의 만남이 마물에 대해 그가 갖고 있던 상식의 신 지평을 열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이븐은 대화가 답보 상태에 머물렀음에도 초조함을 느끼진 않았다. 어차피 이 만남의 목적은 여기에 있지 않다.
“난 오늘 이 대화가 밀담으로 남을 거라 생각했는데, 네 계획은 다른 모양이지?”
“이미 겪어보신 바와 같이 우리들 마물에게는 정보에 접근하는 갖은 수단이 있습니다. 더욱이 이목을 끌 만한 합의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바 그 내막이 비밀로 남는 일은 열에 한둘, 그마저도 시간 앞에서 봉랍은 떨어지고 필체는 감정 당해 종내에는 오늘 우리가 입은 옷까지 모르는 이가 없게 될 겁니다.”
“그만.”
이븐은 장황한 수사에 넌더리가 나서 카일로파드를 제지했다. 그러나 처음의 의도와 달리, 잠시 말없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이븐은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닫힌 방문 뒤에서 소공녀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모른단 사실이 이븐을 점차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물이라는 것들은 시간을 주면 상처를 회복해 다시 덤벼드는 족속들인 것이다.
“오늘 회담은 여기까지.”
“진전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이라고 했어. 원래 물꼬를 트는 게 제일 큰일인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이븐은 시종일관 시건방지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이 카일로파드의 눈에는 적진에서의 허장성세로 비치기를 바랐다. 그에게 실속이 있다는 사실을, 그 실속이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카일로파드는 모르고 있어야 했다.
“자, 이제 알렉의 몸에서 감염인자를 제거해. 이 집에 사는 의사에 대해선 천천히 해도 좋아. 나도 괜한 말썽을 원하진 않으니까.”
카일로파드는 잠시간 가만히 이븐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 위로 양손을 올린 그가 천천히 박수를 친 것은 아마도 소공녀와 약속한 신호 때문일 터, 이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알고 있을 테지만 내게도 동료들과 약속해둔 신호가 있지. 그걸 확인하려면 창밖을 내다봐야 해. 혹시 이런 내 행동이 너무 위협적으로 느껴지거든 얘기하라고.”
이븐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눈을 감고 한 차례 머리를 흔든 뒤 창문을 열어젖혔다. 창문을 여는 소리가 엉뚱한 곳에서 메아리친다고 생각했던 이븐은, 곧 그것이 방문 열리는 소리와 겹쳤던 탓임을 알게 되었다.
“아가씨.”
카일로파드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서렸다. 그건 이븐도 마찬가지였다. 방 밖으로 걸어 나온 소녀의 모습이 그가 예상했던 모습보다 훨씬 양호했던 것이다. 물론 화상으로 붉게 물러터진 피부와, 그을려 어깨 높이에서 잘라낸 흑발은 예배당에서 보았던 모습에 비하자면 끔찍한 몰골이었으나, 거동조차 하지 못할 거라는 이븐의 예상을 비웃듯 소공녀는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요구한 대로 해줄 테니까 기다려.”
어린아이 같던 천진함은 머리칼과 함께 타버린 듯, 소공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저 독기 가득한 눈빛이, 이븐을 일순 얼어붙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죽었다고 믿었던 마물이, 그러나 곧 살아있단 사실을 알게 되고 이젠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는 일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못 되었다.
“너희 마물들의 회복력은 정말이지 놀라울 뿐이군.”
이븐이 창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좀 전과 같았다면 이븐의 말에 카일로파드의 대꾸가 즉각 따라붙었을 테지만 지금 그는 소공녀의 안전 문제로 노심초사하고 있어 그럴 여력은 없는 듯했다. 소공녀가 감았던 눈을 떴다.
“됐어. 이제 가.”
“확인을 해야지, 아가씨.”
이븐은 허리에 걸고 있던 원기둥 모양의 통을 꺼내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불붙인 성냥을 던져 넣었다. 창틀에 올려둔 통의 입구에서 천천히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연기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 이븐이 통을 잡고 밖으로 팔을 뻗었다.
“이제 가. 됐으니까 가라고.”
“저쪽에서 답신이 와야 해.”
“너희들은 다 사기꾼이고 양아치야.”
소공녀의 말에 이븐이 웃었다. 웃음으로 떨린 팔 끝에서 연기가 춤을 추었다. 소공녀는 이븐과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 양팔을 몸에 붙이고 곧게 서있었는데 주먹 쥔 두 손에 담긴 것은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마도 여벌이 있었던 듯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전에 본 것과 달랐으나 여전히 고풍스러웠고, 그래서 상처 가득한 몸과 대비되어 더욱 기괴해 보였다.
이븐은 스타샤가 군주급 마물에 대해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특징적인 외형을 고집··· 잡을 테면 잡아보라는 식이지··· 저런 의복을 이동 중에 구김 없이 보관하려면 마차가 필요할 터, 이븐은 이들의 이동수단을 추측해보았다.
그는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붉은 연기는 여전히 한 줄기, 이븐이 든 통 안에서 나오는 것 하나뿐이었다. 이븐이 소공녀를 노려보자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거짓말이야. 카일! 이 나쁜 놈들이 또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야! 지금 여기로 오고 있을 거야. 내, 내 눈을 가린 다음···!”
“얌전히 있어!”
이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일로파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가씨, 무얼 보셨습니까?”
“몰라! 본 건 없어. 그치만, 또 소피한테 나쁜 일을 할 거야! 난 저 아저씨 못 믿어!”
“이봐, 이건 오히려 내가 너희들을 의심해야···”
울먹이던 소공녀가 돌연 창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븐은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봐! 저기! 이제 가! 끝났으니까 가란 말이야!”
그 말대로 멀찍이, 스타샤와 막심이 있는 데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븐은 통을 다시 창가에 내려놓았다. 그 잠깐 동안 몰아친 흥분이, 지금까지 지루하게 이어졌던 결론 없는 회담보다 그를 더 피로하게 만들었다. 이븐은 조금 탈력한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둔 채 말했다.
“먼저 가. 도망칠 시간을 주지. 게다가 난 더 확인할 게 있으니까. 너희들이 동의한 조건, 잊지 않았겠지?”
이곳의 의사와, 나아가 모르델반트의 다른 감염자에 대한 얘기였다. 카일로파드가 다가와 소공녀의 손을 잡았다.
*
카일로파드는 진료소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뒤를 따라 소공녀 소피가 조급하게, 동시에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모르델반트에서의 일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베르자크는 과연 위협적인 상대였고 그건 다른 두 사냥꾼도 마찬가지였다. 계획에 없었던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아무렇지 않은 듯 가장했지만 카일로파드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멍청한 베르자크가 마음을 바꿔먹고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면 그도, 소공녀도 이 도시의 허름한 진료소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자크도, 그 동료들도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그러지 못했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우둔하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예배당에서의 싸움은 타격이 컸다. 마수로 전신을 감싸는 변이는 많은 힘을 소모하는 기술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힘의 보충이 필요했으나 여건이 좋지 않았다. 더욱이 소공녀의 회복에도 힘을 부어넣은 것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소공녀는 소중한 존재였고, 죽게 내버려둔다면 공작은 카일로파드로 하여금 소공녀의 뒤를 따르게 만들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로를 확보했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그는 힘을 회복할 것이다. 소공녀도 마찬가지였다. 오펜하른에서 쿼그마이어와 아메나이타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한 마을을 집어삼키면 되는 것이다. 베르자크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카일로파드를 막았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 했다.
그러나 그는 웃을 수 없었다. 진료소의 문 앞에 선 카일로파드와 소공녀를 향해 두 여자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델반트에 있는 유일한 사냥꾼 일행은 이븐의 것뿐이라고 믿고 있었던 카일로파드였지만, 그는 두 여자가 사냥꾼임을 직감했다.
오른쪽의 여자가 등 뒤로 감추고 있던 철창을 꺼내들고, 왼쪽의 여자가 양손에 든 곡도를 서로 맞대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자 소공녀가 카일로파드의 뒤로 숨으며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카일로파드가 평정심을 잃고 부르짖었다.
“베-르-자-크-!”
그의 몸 위로 그림자가 덮쳤다.
- 작가의말
6막 5장 - 밀알 하나도 놓치지 않고(4)로 이어집니다.
이븐의 대사 가운데 인칭 대명사를 잘못 쓴 부분이 있어 수정했습니다. - 18.07.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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