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극2. 공모자들(1)
막간극2. 공모자들
문이 열리고 복면을 쓴 남자가 몸을 반쯤 내밀었다. 얼굴을 확인한 그는 여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젖히며 옆으로 비켜났다. 여자는 응접실을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러 집무실의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당기려는 순간 남자가 뻗은 손으로 문을 지그시 누르며 여자를 제지했다.
여자가 남자를 돌아보았다. 복면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더욱이 남자는 이 상황에 대한 적절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문 너머로 말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물론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게헤만이 바인라이히 지방을 할양하면······.”
성량이 풍부하고 울림이 깊은 목소리였다. 여자가 말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려던 차에 문을 열어주었던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잡아 정중하게, 그러나 동시에 확고하게 밀었다. 여자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 소파에 앉았다. 방 안에서 한 차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기다리자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진 남자가 살집깨나 있는 다른 남자를 배웅하는 모양새였다. 키 큰 남자는 상대를 배웅하면서도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의 얼굴과 그녀를 들여보내준 남자를 눈으로 한 번씩 재빠르게 훑어봤다.
“정말입니다. 의회는 제풀에 무너지고 말 겁니다. 제 대주교직을 걸어도 좋습니다.”
대주교의 말에 뚱뚱한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여자는 그 남자의 이름까지는 떠올릴 수 없었지만 뒤르발 백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뒤르발은 교황령과 인접해 있었고 여자는 교황청의 사냥꾼으로서 해당 지역의 사냥을 도운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대주교 각하만 믿고 있겠습니다.”
악수를 청해 오는 백작의 손을 마주잡은 대주교가 다른 손으로는 백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너희 의심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믿음 깊은 이에게 영광 있으라.”
보통 앞의 절은 생략하고 신자에 대한 축복의 말로 쓰이는 해당 구절은, 대주교의 은근한 목소리 때문에 외려 협박처럼 들렸다.
“환난에서 건지신 손을 잊지 않으니 복되고 복되도다.”
그에 대꾸하는 백작의 말도 의미심장했다. 그의 말은 도움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도움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었다. 백작이 응접실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제야 대주교가 여자를 향해 알은 체를 했다.
“아블린, 이렇게 보니 참으로 반갑군.”
“저 또한 그렇습니다, 드로크만 대주교 각하.”
“들어가서 얘기하지. 자네도 들어오게, 다모크.”
복면을 쓴 남자, 다모크가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들은 차례대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드로크만이 책상 뒤에 앉고 그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켜 보이자 아블린도 머뭇거리다 앉았다. 다모크는 그들과는 조금 떨어진 채 앉지 않고 서있었다. 아블린은 그를 볼 수 없으나 그는 아블린을 볼 수 있는, 아블린으로서는 무척이나 불편한 위치 선정이었다.
“이거 원, 불편해서야.”
마치 아블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드로크만이 말했다. 물론 그에게 독심술 따위의 능력이 있을 리는 만무하므로, 그의 불평이 향한 곳은 교황청에서 드로크만이 머무는 동안 그에게 내어준 방의 가구들, 특히 책상과 의자였다. 건장한 체구뿐 아니라 야전사령관의 외투를 연상시키는 옷 때문에 그는 성직자라기보다 군인처럼 보였다.
나이 쉰을 넘긴 뒤로 하얗게 센 머리에는 검은 머리칼이 한쪽 이마로부터 뒷머리까지 가지런히 두 줄을 그으며 이어져 있어 독특한 인상을 자아냈다. 선이 굵고 강직해 보이는 얼굴과 근엄한 수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으로 반짝이는 두 눈과 맞물려 그를 노련해 보이게도, 동시에 교활해 보이게도 했다.
“보고는 잘 받았네. 국경에서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더군.”
“죄송합니다.”
즉각적으로 따라붙는 아블린의 대꾸에 드로크만이 잠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무서울 만큼 진지했던 그의 표정은 점차로 풀려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변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아블린이 고개를 들고 드로크만의 얼굴과 마주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네. 그 소식은 자네도 들었을 거야. 분쟁에 마물을 이용하는 비인도적 행위를 금하는 선언문을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란 것 말일세.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지. 그리고 내가 이번 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자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더군그래. 제국수색대도 다 허명(虛名)이더란 말이야.”
“살펴주시고, 또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블린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드로크만이 몸을 뒤로 누이고 손깍지를 끼며 편한 자세를 취하자 아블린이 참아왔던 말을 뱉었다.
“그럼 소속 교구 변경의 건도 거두어 주실 수 있을는지요.”
“무슨 말인가, 그게?”
드로크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과장되게 올라간 한쪽 눈썹은 의아함보다는 호기심 쪽을 가리키고 있는 듯했다.
“카디난 대교구로 제 소속이 변경되었습니다. 마일스아이렌으로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고요.”
카디난 대교구라면 교황의 오른팔인 로덴치오 추기경이 관할하는 교구였다. 아블린 메리쿠르와 마르셀 바스케즈가 국경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남아있던 막심 에카르트까지 새로운 임무를 받고 그웬돌라드로 떠난 데에 따라 교황청의 사냥꾼 인력에는 공백이 생겼다.
케넌은 카디난 대교구의 소속 사냥꾼 두 명을 교황청으로 불러들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 후 국경의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자 케넌은 사냥꾼을 여럿 파견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판단으로 그녀를 다시 불러들이면서 아예 소속 교구까지 바꿔 버린 것이었다.
“허, 아블린, 설마 하니 자네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뜻으로 내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모양인 건가? 케넌도, 로덴치오도 내 손이 닿지 않는 인물들이야. 오히려 둘이 공모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걸세.”
“제가 오해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이 사실을 모르셨단 것도, 그리고 안드로스 단장이 어떤 방해도 없이 저를 불러들여 교구를 바꿔버릴 수 있었단 것도 제 미천한 지성으로 쉽사리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블린의 말은, 케넌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드로크만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 아니냐는 질타였다. 그녀의 눈에 일말의 분노와 설움이 담겨 있는 것도 스스로를 쓰이다 버려졌다고 여기는 탓이었다.
“이번엔 케넌 그 친구가 빨랐어. 그건 인정하자고. 게다가 정보 통제를 기가 막히게 한 모양인지 난 자네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네. 그래, 어쩌면 내가 마일스아이렌으로 오는 중에 정보원과 엇갈린 걸 수도 있겠어.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왜 자네 같은 인물을 교황청에서 내보낸다는데 가만히 있었겠느냔 말이야. 안 그런가, 다모크?”
“그렇습니다.”
다모크의 갈라진 쇳소리에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었다. 아블린은 땅에 파묻혀 썩은 시체가 말을 한다면 꼭 저런 식일 거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지금껏 한 마디 말도 않은 채 기척을 지우고 있었던 탓에 그의 대꾸는 아블린을 새삼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잘 되었네. 이걸 기회로 생각하자고.”
드로크만의 말에 아블린이 대꾸 없이 그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분노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그마저 아니라면 어떤 다른 감정 때문인지 거친 호흡으로 가슴이 오르내리는 중에 그녀의 연갈색 단발은 어깨에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대주교가 말을 이었다.
“로덴치오 그 늙은 쥐를 자네가 감시해주게.”
드로크만은 그렇게 말하면서 추기경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대주교 각하께 감시원은 충분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감시원 노릇 따위 하지 않겠다는 아블린의 당돌한 대꾸에 드로크만은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아블린이 계속해서 말했다. 조금의 틈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여문 어조였다.
“저는 교황청에 있고 싶습니다.”
교황청의 사냥꾼이란 직책이 명시적으로 그 영예를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교황도 결국은 주교일 뿐이라는 관점에서, 마일스아이렌 역시 제국 내의 여타 교구와 다를 바 없는 일개 교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전대 교황이 가장 실력 있는 사냥꾼들을 자신의 곁에 둔 이래로 사냥꾼들 사이에서 이 직책은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카디난 대교구 소속도 충분히 명예로운···”
“아닙니다, 각하. 저는 명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단지 각하께서 교황의 자리에 오르실 때 가장 가까이서 크게 쓰임 받고 싶을 따름입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었던 드로크만은 점점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메아리친 웃음소리가 되돌아와 그 진원을 증폭시키는 식으로, 대주교는 주체할 수 없이 웃어댔다. 그러던 웃음소리가 바람 불어 끈 촛불처럼 한순간에 그쳤다. 고개를 젖힌 채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대주교는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고 아블린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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