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극2. 공모자들(2)
“말해보게, 아블린. 사두충(似頭蟲)을 사냥해본 적 있나? 내가 듣기로 그것들은 무척 특이한 생존 전략을 구사한다던데.”
물론 아블린에게는 사두충을 사냥해본 경험이 있었다. 직립보행이 가능하고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음에도 사두충이 항마연구원에 의해 비인간형 마물로 분류된 데에는 그것이 인간보다는 차라리 거대하게 키워놓은 불가사리와 더 유사한 때문이었다.
평상시에는 바닥을 기어 다니는 이 마물은 어두운 밤이 되면 두 개의 촉수로 땅을 딛고 꼿꼿이 서서 사람을 흉내 내 행인을 유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머리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실상은 거대한 돌기에 불과한 가짜 머리인데, 이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의 사두충의 모습은 사람으로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해가 일찍 떨어지는 산촌에 주로 서식하죠. 네, 사냥해본 적이 있습니다.”
“나이로드는 사두충의 머리 같은 작자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자를 진짜 머리로 여기고 목을 베어 버리리라 다짐하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어. 기껏해야 몸통을 한껏 약 오르게 만들 뿐이겠지. 몸통이 살아있는 한 머리는 얼마든지 다시 자라날 테고 필요에 따라 갈아치워 버리기까지 할 테지.”
드로크만의 눈은 기이한 열정으로 빛났다. 불끈 쥐고 천천히 흔들어 보이는 대주교의 주먹을 보면서 아블린은, 어째선지 그의 손이 살인자의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교황청의 핵심은 로덴치오야. 아둔한 자들은 로덴치오를 교황의 오른팔이라 생각하지만 그들은 데트로스 전 교황의 일에서 배운 바가 조금도 없는 이들일 뿐이지. 맥혼 로덴치오는 누구의 오른팔도 아니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인간이야. 명심하게, 아블린. 모든 일의 시작과 끝에 로덴치오가 있네. 그자를 잡아야 이 장기판 위에서 장군을 부를 수 있어.”
드로크만의 음산한 목소리에 아블린은 한 차례 몸을 떨었다. 두려움, 격정 혹은 경외. 자리에서 일어난 드로크만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큼지막한 손으로 감쌌다. 무엇에 대한 동의인지, 그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아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사람들이 자네를 찾아.”
“그렇겠지.”
에릭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나 그의 펜은 오래 전부터 같은 곳을 맴돌던 중이었다. 구태여 일러주지 않아도 도스피앙을 연호하는 군중의 함성이 서재까지 넘어 들어왔다.
귀를 파고들어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저 질서정연한 혼돈은 인민의회 대의원이자 혁명을 이끌어온 삼 인의 거두 가운데 하나인 에릭 도스피앙의 심장을 갉아먹었다. 지금은 도스피앙을 연호하는 저들 군중도 죄인의 목을 계속 칠 수 있다면, 그 구경거리를 매일같이 즐길 수만 있다면 누구의 이름이라도 외칠 것이었다.
‘혁명에 피는 필연이지만 결코 축제적 흥미 위에서 흘러서는 안 된다.’
지난 주 그가 의회에서 했던 연설은 급진좌파의 노골적인 야유를 받았다. 세스페르를 필두로 한 급진좌파는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민중이 원하는 것은 지금 끌려나온 테레도르 왕이 곧이어 흘릴 피처럼 붉고 자극적인 선명성이었으므로.
뢰헤(*)의 거리거리마다 급진좌파의 기관지(機關紙)인 《적수(賊首)》를 큰 목소리로 읽어주는 이들이 있었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아이들은 왕비의 목까지 베자는 후렴구가 들어간 노래를 불렀다. 에릭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짓눌렀다. 혁명이 미친 말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고삐는··· 아니, 마차는 도착했나?”
“어디 도착만 했겠나. 벌써 발트만이 왕의 죄목을 읊었네. 이제 정말 집행될 거야. 늦기 전에 나오라고.”
그렇게 말하는 필리프 페실은 자못 즐거운 듯이 보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혁명을 시작한 이상 결국엔 왕의 목을 치게 될 것이었다. 에릭은 학생이던 시절, 왕비와 함께 학교를 찾아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덕담을 해주었던 젊은 테레도르의 모습을 떠올렸다.
‘네 눈에 총기가 가득하니 장차 큰일을 맡겠구나.’
도스피앙은 추진력을 잃었다, 도스피앙은 겁쟁이가 다 됐다, 도스피앙은 이것이 전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도스피앙은······. 그러나 그 도스피앙이 왕의 사형 집행을 밀어붙이자 세스페르까지 조금 놀란 기색이 되었다.
이 일을 위해 에릭과 필리프는 자기들 사람이었던 의장까지 갈아치웠다. 필리프의 먼 친척이라는, 성(姓)이 다른 혁명재판소의 검사는 생각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한 사람을 재판에 세우고 그를 단두대가 있는 광장까지 끌고 나오는 데에 걸린 시간은 불과 사흘. 그리고 모두가 기다려온 끝이 지금 당도한 것이다.
“나가지.”
자리에서 일어나던 에릭이 조금 휘청거렸다. 책상 모서리를 짚고 선 그에게 필리프가 다가와 목깃의 단추를 채워주었다. 에릭이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쳐둔 외투를 집어 들자 필리프가 말렸다.
“기다려 보게. 내가 골라줄 테니.”
“광대놀음 하자는 게 아니네, 필리프.”
옷장을 열어 뒤적이는 필리프를 향해 에릭이 핀잔을 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피로가 묻어났다.
“그새 또 잊었나, 에릭? 대중들은 보이는 것만 믿어. 그리고 기왕 여기까지 밀어 붙였으면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이용해먹자고. 최대의 효과를 얻어야지.”
에릭이 한숨을 쉬었다. 군중의 목소리는 이제 성난 것처럼 들려왔다. 에릭도 점차 조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청색은 얼른 버리라니까.”
필리프가 옷장에서 진청색 외투를 옆으로 밀어 치우며 말했다. 이윽고 그의 까다로운 안목이 골라낸 옷은 살바도스 황실의 상징색도, 게헤만 왕실의 상징색도 아닌 암녹색의 디토슈트였다. 에릭은 순순히 필리프의 도움을 받아 외투를 걸쳤다.
연설이 있을 때면 그가 늘 그러는 것처럼 에릭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심호흡을 했다. 어쩌면 군중을 상대로 한두 마디를 던져야 할지도 몰랐다. 그가 서재를 나와 발코니를 향해 나아가자 필리프가 뒤를 따랐다.
“이거 아슬아슬했군.”
발코니에서 형장을 내려다보며 필리프가 말했다. 무릎 꿇은 테레도르 왕이 무어라 말하고 있었으나 군중들의 야유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사형집행인이 군중이 던진 음식물에 맞고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군중들 중 하나가 발코니에 선 도스피앙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군중들은 다시 도스피앙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군중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세스페르가 그의 친구들과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선수를 빼앗긴 데에 더해 군중의 관심마저 도스피앙에게 쏟아져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한 무리의 짐승들이야.”
표정만은 여전히 즐거워 보이는 채로, 필리프가 신랄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곁에 선 에릭만이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에릭이 불편함 심경을 최대한 숨기며 대꾸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게. 우리의 혁명은 민중들 덕에 가능했던 거야. 혁명가라면 그걸 잊지 말아야지.”
“그 민중들이 이제는 세스페르 같은 선동꾼에게 놀아나고 있지. 위정자라면 민중들이 그토록 쉬이 휘둘린단 것도 잊지 말아야지. 항상 얘기하는 거지만 우리의 공화주의는 계도적(啓導的) 공화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필리프는 그 후에도 몇 마디 더 말했지만 군중의 함성 소리에 묻혔다. 테레도르의 목이 단두대에 놓이고 있었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에릭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필리프가 주먹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칼날이 떨어지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장내가 고요해졌다. 그러나 곧 참았던 함성은 배가 되어 터져 나왔다. 노래를 부르는 이들, 휘파람을 부는 이들, 왕의 목이 담긴 바구니에 손을 대려다 사형집행인에게 저지당하는 이들······. 에릭은 자신이 준비했던 몇 마디를 지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러분.”
목이 잠겨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단두대를 둘러싼 군중들이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해졌다. 군중을 상대로 한 연설은 에릭 자신보다 필리프가 훨씬 능숙하단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만 했다.
“우리는 오늘 왕의 목을 쳤습니다!”
사람들의 빛나는 눈, 저 순박한 얼굴들, 작고 온순한 몸집, 대체 어디서 광기는 흘러 나와 단두대를 쉼 없이 굴리나. 에릭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동시에 묘한 흥분이기도 했다. 제 몸 어딘가에도 목줄을 갉는 짐승이 도사리고 있단 사실이, 그를 떨리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한 글자뿐입니다!”
에릭 도스피앙이 손을 들어보였다. 치켜든 검지가 하늘을 가리켰다.
“이제 왕‘들’의 목을 칩시다!”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왕들의 목, 왕들의 목, 하고 연호하는 소리가 광장을 뒤덮었다.
*게헤만 공화국의 수도.
- 작가의말
눈치 채셨듯이 막간극은 교단 내의 파벌 싸움, 그리고 국제 정세를 주로 다룹니다. 5막에서 이븐이 느낀, 진흙탕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는 낭패감은 점차 현실로 다가와 그에게 선택을 강요할 것입니다.
마지막 에릭 도스피앙의 연설은 제가 쓴 듯도 하고 어디선가 읽었던 것을 기억해뒀다 여기에 쓴 것 같은 찝찝한 느낌도 있는데, 만약 후자라면 당통의 연설이었던 것 같습니다. 몇 가지 키워드로 검색해보았으나 출처를 찾지 못했는데, 차후 알게 되면 수정하거나 출처를 명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릭과 필리프의 대사를 일부 수정했습니다. 2018.08.09.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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