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막 1장 - 저울 위에서(1)
7막 착종(錯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결한 영웅이 아니며 그렇게 되고자 하는 것은 최악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지저분하고 비열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싸울 줄 알아야 한다. 명예는 비명(碑銘)에 그럴듯한 한 줄 새겨 넣는 일 외엔 도무지 쓸데없는 것이다.
- 막심 에카르트
1장 저울 위에서
“뇌가 제일 중요한데······.”
연구원(硏究員)의 볼멘소리는 혼잣말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이븐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말임을 알았다. 그러나 이븐은 구태여 사냥꾼의 입장을 대변해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연구원과 사냥꾼 간의 입장 차이는 그가 십분 이해하고 있는 바였던 것이다.
사냥꾼에게 사냥이란 목숨이 걸린 일이었으므로 일단 상대의 가장 취약할 것으로 예상되는 부위를 깨부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머리였다. 거기다 사냥꾼의 그런 판단은 대부분의 경우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연구원의 소박한 기쁨과 자신의 목숨 사이에서 고르라면 그 답이 항상 후자가 되는 것은 명약관화였다.
연구원의 입장은 물론 이와 상반되었다. 아직 인간 두뇌의 비밀을 규명하는 일도 많은 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고 마물에 대해서라면 더욱 그러했으나 연구원(硏究院)은 마물 특유의 공격성이 뇌에 기인한다고 믿어 왔다. 마물을 죽이는 데에 들이는 비용과 노력을 절감하는 것이 연구원의 주된 관심사였단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이 창백하고 흐물흐물한 장기에 집착하는 것도 이해되었다.
“말이 많아서 한 방 쏴야 했습니다.”
이븐은 별로 진지하지 않게 대꾸하며 연구실을 가득 메운 생소한 장치와 병에 든 장기 따위를 흥미롭게 살폈다. 수술대처럼 평평한 철제 침대 위에 시체를 고정하던 연구원들이 이븐을 불안하게 힐끔거렸다. 이븐도 그런 낌새를 진즉에 눈치 챘으나 그는 오히려 이를 즐기고 있었다.
연구실은 신선한 마물 시체 따위에 흥분하는 저 괴짜들 무리의 성소인 것이다. 누런 용액 속에 떠 있는 이 내장들에 어쩌면 애칭이 붙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븐은 미소 지었다. 그가 유리병의 뚜껑을 열려는 모양새를 취하자 연구원 하나가 급히 다가와 그를 말렸다.
“어어, 그대로 두십시오.”
“죄송합니다. 워낙 신기한 게 많아서요. 그보다도 이건 대체 뭡니까?”
“그게··· 아마, 들쥐인간 비장(脾臟)일 겁니다.”
“비장이면 이쯤 어디 붙어 있는 겁니까?”
이븐이 자신의 몸에서 옆구리와 복부 사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연구원은 이븐으로부터 안전히 건네받은 유리병을 다시 선반에 올려두고는 대답했다.
“거기서 조금 더 아래로··· 네, 그쯤일 겁니다. 이 들쥐인간 비장을 보면 감염되지 않은 정상인의 것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쪼그라든 게 관찰되는데 이게 감염인자의 활동과 연관이 있을 거라 보고요. 그렇지, 이런 식의 장기 변형은······ 어, 손대지 마세요!”
연구원이 다시 황급히 다가와 이븐의 손으로부터 주둥이가 긴 플라스크를 뺏어 들었다. 이븐의 연구실 탐색도 곧 그를 호명하는 소리에 일단락되었다.
“베르자크 씨.”
카일로파드의 시체를 앞에 두고 한 연구원이 그를 불렀다. 이븐이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이븐 베르자크입니다. 성함이?”
그는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와 오물로 더럽혀진 자신의 장갑을 가리켜 보이며 악수를 사양했다. 대신 고개를 약간 까딱인 그는 소개와 용건을 연달아 말했다.
“니클라스 보르헤르트 선임연구원입니다. 상흔 몇 군데를 확인해주셔야겠습니다.”
이븐으로부터 흔쾌히 그러하겠다든지 하는 따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니클라스는 바로 시체의 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막심의 칼이 들어간 자국일 겁니다. 이렇게 생긴, 갈고리 모양의 칼이고 끝이 꼬챙이처럼 뾰족합니다.”
이븐이 허공에 손가락으로 막심의 칼 모양을 대강 그려 보였다. 니클라스는 다음으로 벌어진 복부의 상처를 가리켰다.
“제가 손을 집어넣었다가 뺐습니다. 그렇게 빼낸 장기가 저기······ 어디 갔죠?”
“여기 있습니다.”
방금 전 이븐의 손으로부터 유리병과 플라스크를 빼앗아 들었던 연구원이 유리병에 담긴 새까만 장기를 들어 보였다. 그건 심장처럼 보이기도 했고, 소장을 둘둘 말아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마수와 연관되어 있음은 공들인 분석이 선행하지 않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였다.
그렇게 니클라스는 몇 군데를 더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고 그럴 때마다 이븐은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적절한 답을 주었다. 스타샤와 막심이 글라트펠트에 도착한 직후 부상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버린 까닭에 연구원에 협조하는 일은 이븐이 전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건 뭔지 아시겠습니까?”
니클라스의 말에 이븐은 상흔을 자세히 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겨드랑이로부터 허리로 이어지는 몸의 측선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흉터였다. 이븐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모르겠군요. 최근에 생긴 상흔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런 흉터가 몇 군데 더 있습니다.”
니클라스는 벌거벗은 시체의 몸 여기저기를 찔러 이븐에게 흉터를 보여주었다. 옆구리의 흉터처럼 큰 것도, 어떻게 발견했을까 싶을 정도로 잔 것도 있었다. 특징이라면 대체로 상체에 포진해 있다는 것이었다. 니클라스가 팔뚝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제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어째서 흉터가 남을 때까지 상처를 회복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가설은 있습니다. 가령 베르자크 씨께서 말씀해주셨던, 이자의 회복력은 마수에 집중되어 있다는 가설이 그 첫 번째입니다.”
“그 가설은 이 목의 상흔으로 반증되겠군요.”
니클라스가 맨 처음 지목했던, 목의 상처를 가리키며 이븐이 말했다. 예배당의 싸움에서 막심은 여러 차례 카일로파드를 갈고리칼로 찍어 당겼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반복해서 찔렀던 목의 상처만이 아주 옅은 흔적으로나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카일로파드의 회복력, 재생력은 마수뿐 아니라 몸 전체에 걸쳐 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다. 이븐이 막심이 행했던 공격에 대해 부연 설명하자 니클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전처럼 땀을 훔친 그는 팔에 걸려 안경이 비뚤어지자 이번엔 어깨를 들어 위치를 바로잡았다.
“두 번째는 재생하는 능력을 일부러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본인이 훈장처럼 생각하는 상처일 수도 있고, 혹은 그 외에 중요한 의미가 있거나······.”
“이 흉터를 훈장으로 생각하려면 무척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여야 했을 겁니다.”
이븐이 다시 흉터들을 살피며 말했다. 오래되어 희미해진 흉터였으나 이븐은 그것이 결코 치명상은 아니었을 거라 짐작했다. 폭이 좁고 굴곡이 있는 흉터는 전투에서 얻은 상처일 수 없었다. 폭이 좁다면 얇고 예리한 칼날일진대 보통 그런 무기가 빠른 속도에 의존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굴곡은 설명되지 않았다.
“저는··· 오히려··· 마치······.”
입 안에서 말을 고르는 이븐의 눈에 또 다른 연구원의 손에 들린 도구가 들어왔다.
“수술칼이 들어갔던 자국 같군요.”
이븐이 허리를 바로 펴며 말을 맺었다. 니클라스 역시 예상했던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체를 둘러싼 다른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작은 동요가 일었다. 수술칼 자국이 있는 마물은 항마연구원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항마연구원이 카일로파드와 관계가 있다고? 이븐은 의혹으로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니클라스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마물에게 흉터가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븐은 그 질문이 처음에는 조금 엉뚱하다고 느꼈다. 그건 마치 마물을 대상으로 한 발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븐은 곧 정말로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븐은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물이 되기 전에 생겼던 상처가, 역시 마물이 되기 전에 아물어 붙은 경우, 그렇다면 마물의 몸에도 흉터가 남을 수 있습니다. 제 몸에도 그런 식으로 남은 흉터들이 몇 개 있지요.”
그러나 마지막 문장을 말하면서, 이븐은 웃음기가 모두 가시는 걸 느꼈다. 그는 카일로파드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마치 자신이 좀 전에 했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뇌었다.
“마물이 되기 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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