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막 1장 - 저울 위에서(2)
*
“뭐래? 잘라야 한대?”
이븐이 있는 쪽으로 다리를 절며 걸어오는 스타샤를 향해 그가 말했다. 루퍼트와의 싸움에서 얻은 부상이 이번 싸움에서 덧난 것이었다. 책장 앞에 놓인 이동식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가 쏘아붙였다.
“재수 없는 소릴 하고 있어.”
그녀는 이븐이 책장 앞에 서서 손끝으로 책등을 훑는 양을 지켜보다가 또 한 마디 던졌다.
“안 어울리게 장서관엔 왜 와 있는 거야?”
“사냥꾼이 되기 전엔 책을 자주 읽었지.”
엄지와 검지로 책등을 잡아 꽂힌 책을 뽑으며 이븐이 답했다. 가죽으로 장정된 데다가 배에 은박을 입힌 고급스러운 책이었다. 제목은 고어(古語)였는데 이븐은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어가며 더듬더듬 읽었다.
“그래? 사냥꾼이 되기 전엔 뭘 했는데?”
“사냥꾼이었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스타샤가 이븐의 대답에 고개를 한쪽으로 홱 꺾었다. 이븐은 책의 제목이 『페르멜리아 반도 전쟁사』이거나 여하간 그 비슷한 무엇일 거라 결론 내리고 첫 장을 넘겼다. 다행스럽게도 본문은 하임벤어여서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짐승 사냥꾼이었지. 마물 사냥꾼이 아니라. 고조부가 잔베르 자작의 사냥터지기였거든.”
“그래서 가문 이름이 그 모양이었군. 그보다도 여전히 책하고는 거리가 먼 직업인 것 같은데.”
이븐은 고개를 들어 책에서 눈을 떼고 잠시 장서관의 책장을 바라보았다. 잔베르의 성당에도 규모는 이보다 작지만 역시 장서관이 있었다. 그가 살면서 읽은 책의 대부분은 잔베르 장서관에 비치된 것이었으나 정작 그 자신이 직접 장서관을 방문한 일은 손에 꼽았다.
“나한테 책 빌려다 읽히는 걸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하던 사람이 있었거든.”
이븐은 그렇게 말하면서 책을 덮어 다시 책장에 꽂아 두었다. 그는 또 다른 책을 집어 드는 대신 스타샤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위치를 물어 찾아왔다면 용건이 있는 때문일 테고, 그건 아마도 그녀와 막심이 치료를 받는 동안 이븐이 맡았던 일에 대한 것일 터였다.
“연구원에서 건진 건 좀 있어?”
스타샤가 일어나, 앉아 있던 계단을 좀 더 올라 다시 자리를 잡자 이븐이 다가가 아래 계단에 비스듬히 앉았다. 그가 연구실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케넌이 도착하면 다시 얘기하게 되겠지만, 우리끼리 미리 가설을 세워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네.”
이븐을 포함한 일행이 글라트펠트까지 온 데에는 물론 카일로파드의 시체를 연구소에 양도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마일스아이렌과 가깝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다. 이미 이븐이 사냥단에 들어오기 전부터 일선에서 물러난 케넌이었으나 그는 여전히 현장의 감각을 중시했다.
더욱이 사냥단의 사냥꾼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믿을 수 없단 케넌의 의심이 사실로 밝혀진 데에 따라 그가 직접 움직이는 일이 더 잦아졌다. 당장 이븐의 경우만 하더라도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세 차례나 케넌을 만났다.
“카일로파드가, 우리가 생각했던 종류의 마물과는 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스타샤의 주문대로 이븐은 그 이상으로 뜸을 들이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전신에 수술칼을 댄 듯한 잔 흉터들이 있었어. 어쩌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마물이었을지도 모른단 거지.”
“너처럼?”
스타샤의 말은 거침없었다. 이븐은 그런 스타샤의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배려가 없다고 해야 할지 모호한 성미에 또 한 번 헛웃음을 흘렸다.
“난 경우가 좀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비슷하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군.”
이븐은 연구실에서 니클라스에게 해주었던 얘기, 즉 마물의 몸에 흉터가 남는 경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스타샤에게도 말해주었다. 슬쩍 돌아본 그녀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아, 그 자식 얼굴이 또 떠올랐어.”
“루퍼트?”
이븐의 물음에 스타샤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루퍼트에 대해서, 카일로파드는 자신들 노블 다이스가 인공적으로 만든 마물이라는 사실을 암시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카일로파드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마물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했고, 그 추론은 다시 또 다른 불길한 추론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두고 있었다.
“카일로파드를 대체할 만한 마물을 또 만들어낼 수도 있겠는걸.”
스타샤의 말에 이븐이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잘라낸 목에서 새로운 머리가 솟아난다는, 신화 속의 뱀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
“정리해보지.”
케넌의 말은 이븐이나 다른 누구더러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러고선 한동안 말이 없었기에 전자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이븐을 비롯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공유되었다. 막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븐과 스타샤를 힐끗 쳐다보았다.
“사실 하나. 감염시킨 인간, 마물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건 소공녀이고, 다른 일원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전투 능력이 사실상 전무한 소공녀를 카일로파드가 꾸준히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지.”
케넌의 낮고 차분한 음성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그가 오기 전 한 차례 논의된 내용이었던 것이다.
“사실 둘. 노블 다이스에겐 군주급 마물의 힘을 전이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추측 하나. 카일로파드 자작은 만들어진 마물이다. 이 두 가지, 사실과 추측을 섞으면 이븐 자네가 했던 얘기가 완성되는군.”
“거기에 하나 더, 카일로파드는 소공녀에 대해 맹목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헌신을 보였습니다.”
모르델반트의 진료소 앞에서 있었던 싸움을 떠올리며 이븐이 말했다. 소공녀를 탈출시키려 했던 카일로파드의 노력은 그가 기억하기에 필사적인 구석이 있었다. 물론 권총으로 쏘아 터뜨린 그의 머리에서 소공녀의 거머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소공녀에게 어떤 다른 능력이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 마물이 주종 관계에 있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카일로파드에게 자작이라는 직위를 부여할 이유가 없지. 그보다는 공작과의 연관성에서 이 일을 조명하는 편이 더 타당할 거야.”
막심의 말이었다. 노블 다이스를 이끄는 것은 공작으로 알려져 있었고 소공녀와의 명칭상의 관련성은 보다 실질적인 관련성에 대한 증거로 여겨져 왔다. 이븐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보다도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이 작위들은 어쩌다가 붙게 된 겁니까?”
“자기네들이 공표한 거야. 노블 다이스라는 우습지도 않은 이름까지도.”
창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스타샤가 대답했다. 글라트펠트에 왔으나 정작 교구의 소속 사냥꾼인 뷔센은 없었는데 듣기로는 동부 국경의 전쟁터에서 넘어온 마물들을 처리하는 중이라고 했다. 본래대로였다면 이븐이 맡았어야 할 일이지만 그가 노블 다이스를 추격하는 임무에 배속되면서 뷔센의 앞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근거를 더해가고 있는 추측 하나. 경쟁 세력의 존재.”
케넌의 말에 방 안이 잠깐 고요해졌다. 진료소에서의 일이 마무리되고 이븐이 카일로파드와 있었던 대화의 내용을 스타샤와 막심에게 전해주었을 때 역시 지금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만큼 무거운 주제였다.
“카일로파드를 더 이용해볼 생각은 없었나?”
케넌이 잠깐의 침묵을 깨고 이븐을 향해 물었다. 카일로파드의 최후를 결정지은 이븐의 판단은 그의 독단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스타샤는 그런 이븐의 결정을 반겼다.
막심은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는 반응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소공녀까지 죽여야 한단 의견에는 그 역시 동의했으므로 셋은 그 후 사흘간 모르델반트와 그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결과는 실패였다. 그들은 도시 어딘가에서 소녀의 드레스로 가득한 마차 한 대를 찾아냈을 뿐이었다.
“제가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는 이상한 나라로 가게 된 소녀의 모험을 다룬 것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븐이 엉뚱해 보이는 책의 내용을 읊는 것은 대체로 하고픈 말이 있기 때문이었으므로 나머지 셋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거기서 소녀가 어떤 길 위에서 달리는데, 이 길이란 놈은 마치 강이 흐르듯 소녀가 달리는 방향과 반대되는 쪽을 향해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니 그 소녀가 아무리 빠르게 뛰어도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는 건 뻔한 일이었지요(*). 책에선 소녀가 어떻게든 더 빨리 달려서 벗어나긴 합니다만, 만약 그 길이 소녀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겁니다.”
“주점에서 누군가 하나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하면 서로 더 목소리를 높이지.”
이븐이 하려는 말을 막심이 알아듣고 덧붙였다. 이븐은 그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뒤 말을 이었다.
“경합하는 두 세력이 충돌하지 않고 긴장 국면을 유지한다면, 양쪽이 모두 힘을 비축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군비확장경쟁.”
이븐의 장황한 말을 세련된 어휘로 요약한 것은 케넌이었다. 이븐은 앞으로 내민 양손의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한쪽 손 위에는 노블 다이스가, 다른 쪽 손 위에는 그 경쟁 세력이 있음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사위의 한 면이 지워졌으니 경쟁 세력에서도 반응이 있을 테죠. 둘을 싸움 붙이는 것, 그렇게 해서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물론 이븐 그 자신도 이것이 이상적인 만큼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욱이 경쟁 세력이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노블 다이스가 힘을 회복하고 복수에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관건은···
“그 망할 놈의 경쟁 세력을 찾아내야겠군.”
스타샤가 말한 대로였다.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등장하는 부분을 차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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