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막 2장 - 종양이 다시 자라기까지(1)
7막 착종
2장 종양이 다시 자라기까지
핏방울이 소녀의 드러난 하얀 다리에 후드득 번졌다. 말의 피였다. 입가에 피거품을 문 말은, 그러나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밤의 풍경이 새까맣게 번들거리는 말의 눈 위를 빠르게 핥고 지나갔다. 소녀는 마상에 엎드린 채 말의 목을 양팔로 숫제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의 소녀가 집요하게 눈으로 쫓고 있는 것은 길을 인도하듯 눈앞에서 날아가는 검은 새였다. 새는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그를 포위한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쫓아오는 말과 소녀를 위해 길을 열어주었다.
말의 속도가 느려짐에 따라 피 비린내는 지워지지 않고 뭉쳤다. 거대한 새는 빠르게 앞질러가 저택 앞에서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바들거리는 걸음으로 열려있는 저택의 대문을 통과한 말이 천천히 나아가며 조금씩 무너졌다.
소녀가 내리자 말이 쓰러졌다. 옆으로 누운 말의 입에서 왈칵 피가 쏟아져 나왔다. 질주의 기억을 잊고 늘어진 사지에 죽음이 찾아들었다. 금세 만들어진 피 웅덩이 속에서 거머리들이 몸을 뒤틀었다. 소녀의 목소리가 말의 고요한 죽음을 헤살 지었다.
“캐리-!”
분수대에 걸터앉은 여성이 일어나 소녀를 향해 섰다. 소녀가 그녀에게로 달려들자 여자는 무릎을 굽혀 높이를 맞추었다. 여자의 어깨를 장식한 새까만 깃털에 얼굴을 파묻은 소녀가 곧 서럽게 느꼈다. 소녀의 등을 토닥여준 여자가 귀에 대고 다정한 음성으로 무어라고 속삭였다.
얼굴을 뗀 소녀의 눈물을 여자가 닦아주었다. 여자가 무릎을 털고 일어나자 소녀를 인도했던 새가 내려와 여자의 어깨에 앉았다. 전신이 새까만 까마귀였다. 어린아이 하나쯤은 쉬이 채어 나를 수 있을 만큼 몸집이 거대했다. 그녀가 팔을 들어 올리자 까마귀가 날개를 펼쳐 여자의 팔을 감쌌다.
이윽고 까마귀는 여자의 몸에 녹아들어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까마귀 하나분의 부피가 그녀의 몸에 추가되기라도 한 듯, 여자는 허리를 감싸고 있던 보디스의 끈을 만져 느슨하게 풀었다.
“들어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기품이 느껴지는 우아한 음성이 여자의 입에서 노랫말처럼 흘러나왔다. 여자가 내민 손을 잡고 소녀는 그녀를 따라 저택의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현관을 지나 복도를 걷던 소녀가 멈춰 섰다. 소녀의 손짓에 여자가 다시 몸을 낮추자 소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
그러면서 소녀는 자신의 다리와 팔을 찬찬히 가리켜 보였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빨간 속살이 드러나 있었고 흙은 피와 엉겨 붙어 더께 져있었다.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소녀의 몸을 감싸 주었다. 어깨 장식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새까만 깃털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소공녀가 오고 있어.”
“나도 알아.”
복도를 지나쳐 거실에 다다르자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장된 음색의 가성이었다. 거실에서는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은 조명기구를 켜두지 않았으나 높이 난 창문을 통해 달빛이 쏟아져 사위의 분간은 무리 없이 이루어졌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거실에 소공녀와 여자가 발을 들여놓자 피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양손에 끼운 인형들을 분주히 놀려댔다.
“같이 다니던 카일로파드는 어디 갔을까?”
“바보야, 그놈은 죽었어! 소공녀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쉿, 소공녀가 듣고 있어.”
서로 다른 목소리가 교차했으나 그건 모두 같은 이의 목에서 나온 소리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얼굴을 하얗고 빨갛게 칠해 광대처럼 분하고 있었는데 두 인형의 입을 뻐끔거리면서도 정작 자신의 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만해!”
소공녀가 바닥에 대고 발을 굴렀다. 그녀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광대는 멈출 생각이 없는지 잔인한 말을 연이어 쏟아냈다.
“소공녀가 화를 냈어.”
“제일 잘하는 게 그것뿐이니까.”
“하지만 우는 게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카일로파드가 죽은 게 다···”
소파에 편안히 기대 앉아 있던 또 다른 남자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남자가 몸을 조금 일으켜 재빠르게 팔을 휘두르자 인형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잘려나간 광대의 오른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앉지.”
광대가 팔을 붙잡고 바닥에서 뒹굴거나 말거나 남자는 여자와 소공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표정으로, 소공녀가 여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붙으려면 시간 좀 걸릴 거야.”
남자가 색안경을 내려 코끝에 걸치며 광대를 향해 말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오른손을 잘린 부위에 대고 있던 광대가 남자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아빠는?”
“공작 전하는 바쁘셔.”
여자가 소공녀의 엉킨 머리칼을 풀어주며 말했다. 그녀 역시 소공녀와 마찬가지로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칼을 지녔는데, 달빛 받은 그녀의 흑발은 기이하게도 푸른빛이 감돌았다.
“카일··· 자작 일은 어떻게 된 거야? 그 베르자크란 놈이 그렇게 강하던가?”
색안경을 낀 남자가 물었다. 금발에 다부진 몸매를 하고 앉아 있는 남자는 견식(肩飾)을 늘어뜨린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군의 고위 장성을 연상케 했다.
“우릴 속였어! 공격 안 한다고 해놓고선 사냥꾼이 셋이나 달려들어서··· 카일은, 카일은 날 지키느라······.”
소공녀가 다시 울음을 터뜨리자 남자가 검지를 들어 무신경하게 귀를 후볐다. 손끝을 부는 그의 눈에 여전히 떨어진 팔을 붙이려는 광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등을 돌리고 앉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단어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따 진정되면 얘기하자. 그럴 수 있지, 소피?”
캐리라고 불렸던 여자가 소공녀를 다독였다.
“지금은 회복을 해야지. 맞혀봐, 소피. 여기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여자의 말에 소공녀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그녀의 작은 얼굴에 기대가 감출 수 없이 떠올랐다. 그러나 어떤 기분도 오래 붙잡고 있는 법이 없는 이 무구한 소녀의 얼굴에는 또 근심이 서렸다.
“쿼그랑··· 메니도 먹어야 돼? 나눠 먹는 거야?”
소공녀가 머뭇거리며 거실의 두 남자를 가리키자 쿼그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난 재작년에 오펜하른에서 먹은 인간들도 아직 소화가 안 된 것 같아. 이봐, 메니, 너도 그렇지?”
등 돌려 앉아있던 광대는 목을 뒤로 휙 꺾었다. 턱을 위로 향하게 둔 채, 광대의 벌린 입에서 찢어지고 갈라진 쇳소리가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메니는 배고파··· 메니는 계속 배고파······.”
갈퀴처럼 조밀하게 난 날카로운 이를 길고 뾰족한 혀가 차례로 핥고 지나갔다.
“그래, 메니는 밥 처먹을 정신도 없는 것 같으니 내버려두자고.”
쿼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또 다시 메니가 소공녀의 심기를 거스를 경우 남은 팔을 날려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여자는 소공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층으로 이끌었다. 이윽고 그녀가 멈춰 선 곳은 굳게 닫힌 방문 앞이었다. 잠겨 있으리란 소공녀의 예상과 달리 여자는 별다른 조작 없이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문을 잠그지 않은 이유가 분명해졌다. 거기엔 사람들, 아니 사람들로 이루어진 덩어리가 있었다. 방의 한가운데에 놓인 그 얼룩덜룩한 덩어리엔 팔이며 다리 따위가 비어져 나와 있었고, 그런 몰골에도 의식은 있는지 눈물을 줄줄 흘리는 머리들은 모두 입이 녹아 붙어있었다.
머리의 수로만 세어도 열 명이 넘었다. 열 명, 아니 스무 명의 인간들을 모조리 염산 가득 담긴 통에 넣어 녹였다가 다시 굳히면 이런 모양새일까. 소공녀는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으며 웃었다. 움푹 팬 보조개가 징그럽게 사랑스러웠다. 양은 충분했다. 소공녀가 자신의 머리칼 한 움큼을 잘라내며 너그러이 말했다.
“나는 머리만 먹을게. 쿼그랑 메니한테도 와서 먹으라고 해. 그리고 캐리도 먹어!”
- 작가의말
쿼그와 메니는 애칭이며 둘의 본래 이름은 6막 5장(3)에 등장합니다.
선호작이 갑자기 늘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 있어 수정했습니다. - 18.7.19.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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