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막 2장 - 종양이 다시 자라기까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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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걷던 로지아가 뒤를 돌아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사냥꾼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조금 무례하게 굴더라도 양해해주세요.”
“나도 마물 안 좋아해.”
스타샤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이븐이 피식 웃었다.
“알았어. 넌 제외시켜줄게.”
“마물의 정의를 현상의 측면에 국한시켜 내린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처사인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개소리는 집어치워. 새끼손가락 치켜들고 우아하게 찻잔을 홀짝일 줄 안다고 해도 마물은 마물인 거야.”
이븐은 스타샤와의 대화에서 본전도 건지지 못하자 쓰게 입맛을 다셨다. 이 대화에 의외로 발끈 한 것은 로지아였다.
“이븐은 마물이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요.”
스타샤가 입을 오므려 혀 짧은 소리로 로지아의 말을 따라하자 이븐은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정말로 우스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 유치함에 어이가 없었던 탓이었지만 로지아는 마음이 상했는지 걸음을 재촉해 멀리 앞질러 나가 버렸다.
그렇잖아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스타샤와 로지아 사이에는 묘한 신경전이 오갔는데 주로 이븐을 대하는 스타샤의 태도가 원인으로 작용했다. 스타샤의 거침없는 태도는 자신보다 아래라고 여겨지는 이를 부릴 때 그 진가를 발휘했고, 그녀가 보기에 아직 애송이 티를 벗지 못한 이븐은 까마득한 후배였던 것이다.
더욱이 이븐의 감염 진행을 막기 위해 로지아가 쏟아붓는 노력에 대해 알 리 없는 스타샤는 그의 능력을 최대로 활용하고자 했고 기대에 못 미칠 때마다 구박을 주기에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실정이니 로지아가 스타샤와의 세 번째 만남에서 그녀를 요주의 인물로 점찍게 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븐이 허공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스타샤가 맡을 수 있는 것은 흙과 풀 따위의 전형적인 숲 냄새뿐이었으나 이븐은 다른 냄새를 맡았는지 꽤 진중한 태도로 말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데.”
“마물 사는 냄새가 아니고?”
“맡아봐. 나한테선 무슨 냄새가 나나.”
이븐이 스타샤의 얼굴 쪽으로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자 그녀가 주먹으로 한 대 쥐어박았다. 이븐이 얼빠진 사람처럼 실실 웃자 앞서 가던 로지아가 두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 왔어요. 여기만 통과하면 돼요.”
도망친 소공녀를 추적하고 경쟁 세력을 찾아내는 일이 난항을 겪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타개책을 제시한 것은 로지아였다. 그녀가 정보원이라고 간략히 언급한 존재는, 연구원에 협력하고 있는 마물이라는 설명이 덧붙었음에도 여전히 의문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년 전 잔베르에서 로지아가 이븐의 감염을 막아낸 데에는 순간적 기지 이상의 지식과 정보가 필요했을 터, 이븐은 로지아와 이 정보원의 관계가 그 자신과 로지아의 관계의 원형일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누구야? 멈춰!”
멧돼지의 성대로 인간의 말을 한다면 꼭 저런 목소리일 거라고, 이븐은 생각했다. 로지아가 그녀답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양손을 번쩍 들자 뒤따라 걷던 이븐과 스타샤도 느릿느릿 건성으로 손을 들었다.
“에드가드, 저예요! 로지아!”
“레니스 양?”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상대는 곧 목을 가다듬고 다시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가까이 와! 잘 안 보인다!”
“가까이가 어느 쪽이에요?”
“그, 그러니까, 내가 지금 있는 쪽이 가까이다!”
도와주지 않으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문답에 이븐이 차분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우측 대각선 앞으로.”
로지아가 천천히 이븐이 지시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무 위에서 커다란 형체가 돌연 그녀의 눈앞에 떨어졌을 때 로지아는 거의 혼절할 정도로 놀랐으므로 이븐이 다가가 붙잡아주었다.
“미안하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머쓱해져서 사과했다. 목소리만 멧돼지 같은 것이 아니라 생김새까지 그러했다. 큼직한 입의 양 옆으로는 어금니가 제 눈을 찌를 기세로 튀어나와 있었고 털로 뒤덮인 머리는 인간과 들짐승의 형상을 반쯤 섞어놓은 듯했다. 부라린 눈으로 로지아의 일행을 살펴본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사냥꾼이잖소! 내 영지에 사냥꾼을 데려온 거요, 레니스 양? 이게 무슨···!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에드가드가 양 소매를 걷어붙이며 씩씩거리자 로지아가 얼른 그를 말렸다.
“지, 진정하세요. 당신을 해치려고 온 게 아니에요. 이분들은 에드가드한테 조언을 구하려고 온 거예요. 도와주실 거죠?”
정말로 진정할 필요가 있는 건 로지아 같았기에, 이븐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며 에드가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이븐 베르자크입니다. 늑대인간이죠.”
찌푸린 에드가드의 눈에 묘한 감정이 담겼다. 탐색과 호기심이 한데 뒤섞인 눈빛은 이븐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마침내 에드가드가 경계를 조금 풀고 입을 열었다.
“그··· 잔베르의···?”
“그렇습니다.”
“난 에드가드 바이스게르버요. 금지된 지식의 탐구자, 잊힌 숲의 은둔자··· 그러나 나 스스로는 학자로 칭하는 몸이오.”
그제야 에드가드의 코에 걸쳐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은 안경이 이븐의 눈에 들어왔다. 에드가드의 소개를 들은 이븐은 그가 로지아의 초기 실험체일 것이라는 자신의 추측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로지아가 에드가드를 향해 서자 그가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이븐에게 곧잘 해왔던 남부식 인사를 에드가드에게도 했다. 허리를 숙였음에도 에드가드의 머리는 여전히 높아 까치발을 하고 서 있는 로지아를 보며 이븐은 그녀의 고집이 존경스러웠다.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스타샤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난 스타샤고 인간이야, 멧돼지 박사님.”
마물 둘과 연구원 하나가 스타샤를 쏘아보자 그녀가 덧붙였다.
“왜, 뭐?”
*
“웩- 뭐 하는 거야?”
앰버가 구역질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말의 배를 가른 막심은 손을 집어넣어 장기를 만졌다. 다른 쪽 손으로는 파리를 쫓으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심장이 터졌군. 피 웅덩이엔 머리카락이 있고.”
“말은 기수에 대해 충성스러운 생물. 채찍질을 멈추지 않으면 계속 달린다.”
올가의 말(言)은 터진 심장이 반드시 소공녀의 능력이 사용됐단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앰버와 올가 모두 소공녀의 능력에 대해서는 막심의 설명을 들은 터였다. 이븐이 모르델반트에서 앰버와 올가로부터 도움을 구한 이래로 그들을 사냥에 활용하는 건에 대해서 막심과 스타샤 모두 의견의 합치를 보았다.
“뭣같이 음산한데, 여기. 빨리 끝내고 돌아가면 안 될까?”
앰버가 침을 뱉고는 말했다. 앰버는 자신이 이븐과 합심해 죽인 마물이 노블 다이스의 일원이란 얘기를 듣고 한껏 자신감이 부풀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후한 보상이 주어지고 또 약속되자 지체 없이 막심을 따라나서는 데에 동의했다. 물론 상황이 예상보다 위험해지면 몸을 내빼겠단 데에 대한 허락은 구해둔 뒤였다.
올가의 경우는 조금 미묘했는데, 무슨 감정이든 잘 드러내는 법이 없는 이 전직 수습사냥꾼이자 현직 용병은 의외로 스타샤와의 대화를 통해 합류를 결정했다. 이븐이야 그것이 죽은 에이델과 관련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막심은 그저 둘이 통하는 데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귀여운 소녀야, 내게 오지 않으련? 나와 같이 재밌는 놀이를 하자꾸나.”
가곡의 한 구절을 뜬금없이 부른 막심은 손수건으로 말의 피를 닦고는 저택의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막심이야 노련하기로는 비할 데 없는 사냥꾼이었지만 뒤를 봐주는 인물이 있어서 나쁠 것도 없었다. 글라트펠트에서 마일스아이렌의 연락원으로부터 보급품을 건네받은 막심은 그의 어깨에 가해진 외투의 무게에 만족해서 슬며시 웃었다.
“아버지, 무서워요.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저택으로 들어가는 막심을 따르며 앰버가 자신의 머리에 대고 검지를 빙빙 돌렸다. 앰버와 올가가 저택에 들어섰을 때 막심은 어느 새 거실을 살피고 있었다. 행동 하나만큼은 무지하게 빠른 작자였다.
“뭐 좀 발견하셨어, 사냥꾼 나리?”
앰버의 물음에 막심이 바닥을 가리켰다. 올가와 앰버가 다가가 막심이 지목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핏자국이었다. 바닥의 핏자국에 댄 막심의 단검에서 타는 소리가 났다. 마물의 피였다.
“싸움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소곤녀? 걔가 흘린 거 아냐?”
막심이 가지런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실의 가구들을 보며 중얼거리자 앰버가 나름대로 추측을 던졌다. 올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복도에 없었다. 거실에 피 있으므로 소공녀의 것은 아니다.”
막심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 안을 살폈다. 한동안은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나눠져서 집 안을 수색할 수도 있었겠지만 항상 붙어있으라는 막심의 주문이 있었으므로 앰버와 올가는 막심의 뒤를 따랐다. 최초의 소득은 이 층의 닫힌 방문을 열면서 얻어졌다.
“우웨웩-.”
이번에는 단순한 시늉이 아니었다. 방문에서 황급히 멀어져 이 층의 난간을 붙잡은 앰버는 아래를 향해 구토했다. 막심은 목깃을 올려 코를 가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에 흥건한 액체는 짐승의 토사물처럼 보였다. 막심은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조심!”
외침과 함께 올가가 곡도를 꺼내들었다. 달려든 첫 번째 마물을 향해 그녀가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형형색색의 기다란 털로 몸이 뒤덮인 마물은 유연하게 몸을 틀어 일격을 피했다. 방은 넓었으나 이토록 커다란 마물이 숨어있을 곳은 없었을 터, 따라서 마물의 출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방 안에서 나가! 빨리!”
막심이 올가를 향해 소리치며 그 역시 칼을 꺼내들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허를 찌르는 그의 검술은, 그러나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어느 틈에 마물은 수가 불어나 있었다. 막심은 칼을 휘둘러 마물의 접근을 막으며 방문을 향해 물러났다.
“무슨···?”
그의 등이 예상과는 다르게 벽에 닿자 막심이 그답지 않게 당황해서 소리쳤다. 재빨리 사방을 훑었으나 그가 들어온 문은 반대편에 있었다. 마물은 그의 코앞에 당도해 있었다.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노란 눈깔에, 길게 찢어진 아가리에서는 침이 질질 흘렀다.
막심은 갈고리칼을 들어, 그 자신의 왼 팔뚝을 베었다. 선명한 고통이 환부로부터 번져나갔다. 그는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는 올가의 뒷덜미를 피 흘리는 손으로 잡아채 문 밖으로 이끌었다. 문은 그가 처음 예상했던 곳에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앰버가 당황해서 막심과 올가를 향해 달려왔다. 막심은 바닥에 눕힌 올가의 손으로부터 곡도를 빼앗아 들었다.
“환각이야. 방문 닫아!”
막심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앰버는 영문도 모른 채 서둘러 방문을 닫았다. 올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막심의 품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어떻게 된 거야? 괜찮은 거냐고!”
앰버가 곁에서 소리쳐도 막심은 침착하게 품 안에서 앰풀을 꺼냈다. 자해한 왼팔이 덜덜 떨려 주사기에 용액을 채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주사기를 채우는 데 성공한 막심은 올가의 상의를 풀어 헤치고 명치를 더듬었다. 높이 들었던 오른손이 곧 주삿바늘을 내리꽂았다.
올가의 몸부림이 멈추고 호흡이 잦아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잠에 빠진 듯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눈을 감았다. 막심이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 탈진한 듯 옆에 누웠다. 앰버는 이 소란에 기가 질려 못 박힌 듯 서있었다.
“보고 있지만 말고 팔에 붕대 좀 감아주지?”
피를 흘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막심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프란츠 슈베르트, 〈마왕〉의 일부를 차용.
- 작가의말
조금 더 가벼운 분위기로 써보려고 했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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