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막 3장 - 짐승의 머리, 뱀의 혀(1)
7막 착종
3장 짐승의 머리, 뱀의 혀
“앉으시오, 앉아. 아, 그건 치워드리지.”
에드가드가 의자에 쌓여있던 책을 바닥에 털썩 내려놓자 마룻바닥에 낀 먼지들이 유령처럼 일어났다. 콧속에서 매캐하게 번지는 먼지의 냄새는 티끌마다 하나의 실체여서 후각 아닌 촉각이었다. 이븐은 창을 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창이 있었을 법한 자리엔 나무판자가 꼼꼼히 덧대어져 있었다.
“그게 거기 있었구려. 이리 주시오.”
스타샤가 깔고 앉았던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어 핀셋을 꺼내자 에드가드가 그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스타샤는 손에 쥔 핀셋을 건네주는 대신 무신경하게 뒤로 던져 버렸다. 안절부절못하는 로지아에게 잠깐 시선을 두었던 에드가드는 코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나 그 이상 더 말하지 않았다.
이븐이 습관처럼 담뱃갑을 꺼내드는 스타샤를 저지한 뒤 말했다.
“연구소를 차려두셨군요.”
“필요한 모든 게 다 여기 있지.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두뇌요. 이것만 있다면 연구소 아닌 길바닥도 문제될 건 없소이다.”
사냥꾼을 싫어한다는 로지아의 사전 설명 겸 주의에 대해서 이븐은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나, 아직까지는 자신의 지성에 대한 과한 자부심 외에 이렇다 할 결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자부심도 가히 허세는 아닌 듯했는데 어두운 집 안에서 식별할 수 있는 검은 형체들은 대체로 쌓아둔 서책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당신과 비슷하지, 베르자크.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이까?”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비상한 두뇌요?”
이븐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에드가드가 들창코를 벌름거리며 껄껄 웃었다.
“아니, 당신의 뛰어난 육체 능력이 무기 없이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과 나의 지적 능력이 별다른 도구 없이도 빛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오.”
“생긴 것만 놓고 보자면 그 반대일 것 같은데.”
가볍게 웃어넘길 수도 있었을 법한 스타샤의 말은, 그러나 그녀의 어조에 노골적인 적개심이 묻어나 있었으므로 그럴 수 없었다. 에드가드의 짐승 같은 얼굴이 노기로 일그러졌다.
“그건 편견이외다, 사냥꾼. 이보시오, 젊은 엽사님. 그대가 나를···”
“에드가드는 뛰어난 학자예요, 스타샤. 이분의 공헌은 감히 비웃을 게 못 돼요.”
로지아의 중재에도 에드가드는 멈추지 않았다.
“레니스 양, 나를 용서하시오. 무례를 무릅쓰고서라도 이 말은 해야겠소. 젊은 엽사 양반, 그대가 나를 벌레 여기듯 하더라도 내 괘념치 않을 것이오. 나 역시 그대를 좋아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그러나 스스로가 짐승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혹은 그런 염치가 그대에게도 있다면 예의의 당의(糖衣)를 그대 쓰디쓴 본심 위에 입히기를 진심으로 충고하는 바이오.”
“미안. 꿀꿀거리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혹시 예의에 대해 얘기했나, 학자님? 나도 예의 바른 사람들을 몇 알고 있지. 너무 예의가 발라서 한동안 묘지를 찾지 않았다고 해도 이해해줄 사람들 말이야. 한데 예의 바른 인간들이 다 죽어 나자빠졌단 건 묘한 우연이군. 안 그래?”
이븐은 스타샤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했다. 무례의 시대 속에서 예의는 방심이다. 흔들리는 모든 수풀 속에 방울뱀이 숨어있는 것은 아니나, 이제는 그렇다고 가정하는 것이 최선인 세계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의심은 시대정신이었다. 이븐이 언제나 한 걸음 물러나 총을 겨누는 식으로 시대정신을 실천했다면 스타샤는 모든 수풀이란 수풀은 죄 칼로 내리치며 외치는 것이었다. 나와라, 뱀 새끼야. 나와서 결판을 내자.
”난 당신 같은 마물들에 대해서도 알지. 품위와 격식으로 구린내 나는 뒤를 감추려는 작자들 말이야. 내가 아는 마물들 중에 인육을 먹지 않는 놈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건 아주 특별한 예외일 뿐이거든. 말해 봐, 멧돼지 박사님. 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먹어 치웠지? 이 바닥 아래에는 어떤 지적이고 예의 바른 비밀이 숨어있지?”
그렇게 물으면서 스타샤는 발을 들어 뒷굽으로 바닥을 두들겼다. 에드가드의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이븐조차 눈치 채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잠깐의 정적 속에서 흥분을 억누르는 에드가드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보여드리지. 기다리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가드가 거실을 떠나 서재로 향했다. 이븐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에드가드의 등을 눈으로 쫓았다. 그러나 거대한 등이 책상 앞에 멈춰 서서 꿈틀대었을 때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뿐, 이븐도 그 이상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다시 거실로 돌아온 그의 오른손에는 거대한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왼 팔뚝을 묶은 끈을 이빨로 당겨 조이며 에드가드는 혈관을 더듬어 찾았다. 로지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를 말렸다.
“에드가드···!”
망설임 없이 내리꽂힌 주삿바늘을 통해 불쾌할 정도로 투명한 용액이 주입되었다. 로지아가 뒷걸음질 쳤다. 에드가드의 일그러진 입에서 목에 뼈가 걸린 듯한 짐승의 신음성이 괴로이 끓었다. 몸을 뒤덮고 있던 억센 털들이 살갗 아래로 기어들어가 사라지고, 줄어든 어금니가 어느새 뭉툭하게 변한 다른 이들 사이에 가지런히 자리를 잡았다.
점차 고조되던 신음성은 절정을 맞고 이내 사그라졌다. 덩치 큰 사내,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인간의 모습을 한 에드가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은제 무기를 갖고 있소, 사냥꾼?"
이븐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의 사냥칼을 에드가드에게 건네주었다. 에드가드는 받아든 사냥칼을 자신의 드러난 팔뚝에 가져다 대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드가드는 충분히 오랫동안 그렇게 은으로 된 사냥칼을 맨살에 대고 있다가 이븐에게 사냥칼을 돌려준 뒤 자신의 팔뚝을 확인시켜주었다.
“나의 연구는··· 이런 것이오.”
이븐은 자신의 심장을 뒤흔드는 것이 목도한 광경이 전해다 준 전율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멧돼지를 연상케 하던 음성은 곧잘 섞여들던 짐승의 울음소리가 제거되어 굵직한 목소리로 남았다.
“나는 스스로 마물이 되었소. 왜 그런 줄 아시오?”
에드가드만을 위한 무대가 마련된 듯 그가 여기 있는 관객과 그리고 여기 없는 군중을 향해서도 방백 했다. 아니, 그것은 폭백에 가까웠다.
“그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나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연구에 남의 몸을 실험체로 삼는 일 따위는 감히 할 수 없는 짓이라 여겼기 때문이오. 나는 나를 마물로 만들었고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소. 그래, 반쪽짜리 성공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는 인육에 대한 갈망을 참을 수 없었소. 병원에 기증된 시신을 사들였던 일은 나의 죄과요. 하지만 나는 결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소이다. 아시오, 사냥꾼? 내 비록 잠식당한 몸이나 괴물은 아니오!”
에드가드가 내지르는 고함의 대상이 된 스타샤는 칼집을 쥔 손에 힘을 실을 뿐 그의 폭백을 오롯이 침묵으로 받아내었다.
“말해보시오, 사냥꾼. 마물이 창궐하는 세상에서 당신네들은 뭘 하고 있소?”
에드가드가 스타샤와 이븐을 차례로 둘러보며 말했다. 이 질문에 대해 이븐은 기시감을 느꼈다. 뤼스베르크였던가. 그러나 이윽고 이븐이 차분한 음성으로 읊은 것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답이었다.
“죽을 때까지 죽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마물을 죽이고, 마물이 온전히 죽을 때까지 그들을 다시 죽입니다. 아직 죽지 못한 육신으로 죽여야 할 육신들을 계속, 그렇게 계속 죽입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당신들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존경할 수 없는 이유요. 그런 근시안적인 태도라니! 사람들이 빠져 죽고 세계가 심연 속에 잠기는데 당신들은 바가지를 들고 물을 퍼내고 있소. 당신들이 자랑하는 저돌성이란 것도 결국 소매가 젖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수준에 그칠 뿐이지. 그러나 대답해 보시오. 당신들의 몸은 어디에 있소이까? 물가에 있지. 나는··· 나는 밑바닥을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심연에 뛰어들었소이다.”
짐승의 털로 뒤덮이지 않은 에드가드의 표정은 읽기 쉬웠다. 그건 경멸이었다. 마침내 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모멸당한 사냥꾼의 목소리에는 잔뜩 날이 서있었다.
“넌 그런 걸 용기라고 부르나? 골방에 틀어박혀 온갖 괴상한 용액들을 섞고 끓이고 가끔은 못생긴 네 주둥이에 부어넣는 일이 전부이면서. 그래, 예리한 주삿바늘에 용감히 맞서 눈을 질끈 감고 참아내는 걸 봤을 때는 나도 감동했어. 그러니 우리 이제 좀 더 용기를 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 뜨개바늘은 어때? 그건 너무 무섭나? 시체를 파먹으면서 비루한 목숨을 연장하는 건 또 얼마나 용감한 일인지! 그딴 지랄 같은 짓거리가 용기라면 난 비겁해지겠어.”
냉소가 잔뜩 담겨있던 목소리는 그러나 끝까지 차갑지는 못했다. 스타샤는 갈라진 목으로 언성을 높였다.
“비겁하게 핏물을 뒤집어쓰고, 비겁하게 이를 악물어 부상을 참으며, 또 비겁하게 쓰러지고 엎어지고 뒹굴고 터지고 찢어지고······. 그러다, 그러다가 결국 비겁하게 죽겠어.”
이븐은 스타샤의 말이 어쩐지 묘비명 같다고 생각했다. 이 년 전 병상에서 일어난 이븐을, 데릭은 대뜸 마일스아이렌에 있는 사냥꾼의 전당으로 데리고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신이 바로 그곳에 묻히리란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혹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채로.
‘죽음이 우리의 머리를 겨누고 있어, 사냥개. 방아쇠에 걸린 그의 손가락은 네가 요행을 바랄 때 가장 힘이 들어가지.’
로지아가 에드가드와 스타샤 사이에 서 양팔을 들었다.
“두 분 다 그쯤 해두세요! 이러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에드가드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윽고 입을 연 그의 음성에는 여전히 흥분이 녹아있었지만 스스로 내리누르려는 힘이 더 강했다.
“미안하외다. 내가 만든 약은 아직 완전하지 않아. 그래서··· 신경이 좀 날카로워졌소. 마물의 공격성은 핏줄에 새겨져 있는 터라 억누르는 만큼 또 새어나오지.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요, 베르자크. 게다가 이론가와 실천가의 간극과 그로 말미암은 갈등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 하물며 마물 학자와 사냥꾼이야 어련하겠소.”
더 이상의 사설을 원치 않았던 이븐이 에드가드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얼른 말했다.
“우리는 카일로파드를 죽였습니다.”
이븐을 돌아보는 에드가드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얼마나 고개를 빠르게 돌렸는지 탁상 위에 놓여있던 촛불이 그의 머리가 일으킨 바람에 흔들리며 춤을 추었다. 이븐은 에드가드의 얼굴을 눈으로 샅샅이 뜯으며 말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알았겠소? 나는··· 글쎄, 그건 정말이지··· 놀랍구려.”
에드가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턱수염을 엄지와 검지로 배배 꼬았다. 이븐이 알려온 마물의 죽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이븐이 던진 다음 말에 에드가드는 상념에서 깨어났을 뿐 아니라 짧은 경련을 일으켰을 만큼 놀랐다.
“아뇨, 카일로파드라는 이름 말입니다.”
미세하게 떨리는 에드가드의 손끝에서 뽑혀 나온 몇 가닥 수염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 작가의말
28만 자 가까이 쓴 끝에 처음으로 심연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추천글 덕분에 읽어주시는 분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후원도 처음으로 받아봤습니다. 댓글에 바로 답글을 달면 글은 안 쓰고 반응만 살피고 있다는 사실이 들킬까 봐 일부러 시간 간격을 두고 답글을 달기도 했습니다. 중학생 때 전자사전 메모장에 글을 끄적였던 이래로 가장 행복했습니다. 추천글을 써주신 분께, 그리고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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