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막 4장 - 천국의 구렁이들(1)
7막 착종
4장 천국의 구렁이들(*)
에드가드는 문에 난 틈에 얼굴을 바싹 붙인 채, 두 사냥꾼이 잠시 자리를 떴다가 이윽고 로지아와 합류해 다시 떠나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의 관찰은 그들이 밟았던 풀이 다시 일어나 왔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에드가드는 서재로 몸을 옮겨 커튼을 걷고 그 방 유일의 창문을 열어젖혔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서재를 누렇게 물들였다. 약효는 점차 떨어지고 있었으나 아직 어둠 속에서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책상 앞에 앉은 그는 펜에 잉크를 찍고 잠시 고민했다. 내다본 창밖의 나무에는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그 거대한 몸집에 괜스레 불길해져 쫓으려던 에드가드는 던질 만한 물건을 발견하지 못하자 이내 관두었다.
수신인을 적지 않은 편지지에 펜으로 약속된 기호를 그려 넣으며 그는 좀 전의 대화를 반조해보았다. 말을 너무 많이 했다. 그러나 문제 될 건 없었다.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 늑대사냥개는 결국 진실에 다가서게 될 터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미리 언질을 주는 것은 오히려 다가올 협력의 국면을 대비하는 일로 적절할 수 있었다.
“사냥개가··· 지네를······ 죽였다······.”
입으로 따라 읽으며 써내려 간 문장을 내려다본 에드가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리아나 그 여자가 지을 표정을 보기 위해서라도 편지를 보내기보단 직접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에드가드는 잠시 펜의 끝을 입으로 물고 있다가 곧 오늘 오갔던 대화의 내용을 축약해 옮겨 적었다.
물론 그 자신의 말실수를 옮겨 적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의도한 방향대로 잘 흘러간 결과인 양 공들여 말을 꾸며냈다. 마지막 문단은 베르자크의 요구를 쓰는 데에 할애되었다. 사냥개가 당신들을 만나길 원한다고. 물론 이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해도 어쩔 수 없으며, 만나게 된다면 자신은 당신들과의 관계를 부정한 터이니 이 점 각별히 유의 바란다는 글이 덧붙었다.
밀을 녹여 둘둘 만 편지를 봉랍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서재를 들쑤시고 돌아다녔다. 서책과 갖은 실험기구 따위의 위치를 조정하고 서랍을 여러 차례 열어본 끝에 그는 마침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손에 쥔 날짐승의 시체를 책상에 내려놓은 그는 이번에는 주사기를 찾아들어 그것의 목에 약물을 주입했다.
“그렇지. 얼른 일어나야지.”
말라붙어 웅크리고 있던 몸에 점차 생기가 돌았다. 피막처럼 생긴 날개를 펼쳐 기지개를 켠 생물은 곧 자신의 임무를 파악하고 편지를 발톱으로 움켜쥐었다. 에드가드는 이 박쥐처럼 생긴 생명체를 자신의 팔뚝에 올려놓고 창문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날려 보낸 우편부가 하늘의 점이 될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검은 새 떼가 들어온 것은 그러고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맙소사!”
에드가드는 얼른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는 집 안을 허둥지둥 뛰어다니며 여행 가방을 찾아들어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옥석을 가릴 여유조차 없이 그는 되는 대로 가방의 벌린 아가리에 물건들을 쑤셔 넣었다. 힘을 줘 눌러 닫은 가방을 한 쪽 옆구리에, 좀먹은 외투를 다른 쪽 옆구리에 낀 에드가드는 발로 현관문을 차 열었다.
그러나 에드가드는 짐을 떨어뜨리고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하늘에 있던 새 떼가 어느새 그의 눈앞에 당도해 있었던 것이다. 수십 여 마리의 까마귀들이 한데 모여들어 어지러이 활개를 쳤다. 까마귀들이 서로 몸을 뒤틀고 부딪쳐 가며 만들어낸 검은 기둥은 점차로 사람의 형상을 갖춰 갔다.
이윽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장신의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에드가드 바이스게르버.”
“캐리온 후작··· 어떻게?”
침을 삼키는 에드가드의 목울대가 한 차례 꿈틀거렸다. 캐리온은 자신이 착륙한 곳을 확인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냥꾼을 만날 때는 그를 쫓는 또 다른 사냥꾼이 있는지 잘 확인했어야지. 그보다도 이런 데 숨어있었단 말이지.”
“숨어? 내가? 네깟 놈들로부터?”
삿대질을 곁들이며 소리쳤던 에드가드는, 그러나 곧 과하다고 느꼈는지 손을 거두고 잦아든 목소리로 말했다.
“연구를 위해 조용한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네, 후작. 나는 급한 볼일이 있어 떠나야 하니 혹 용건이 있어 찾아온 것이라면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세나.”
떨어뜨린 물건을 주섬주섬 주워드는 에드가드를 향해 여자가 짧고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까마귀가 우는 듯한 그 소리는 귀족적인 자태를 지닌 그녀에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위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점차 잔혹하게 변해갔다.
“처형이다, 멧돼지.”
내뻗은 그녀의 팔은 곧 까마귀들로 변해 에드가드를 향해 쇄도했다. 들고 있던 가방을 집어던져 선두의 새를 맞힌 에드가드는 포효를 내지르며 몸을 변이시켰다. 다시 그의 피부 위로 억센 갈색 털들이 자라나고 어금니가 입을 뚫고 나왔다. 두 번째 까마귀는 힘이 실린 에드가드의 팔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어깨에 발톱을 박아 넣고 날카로운 부리로는 목덜미를 찢는 까마귀를 움켜잡아 터뜨렸다. 시뻘건 피와 내장이 그의 손 틈 사이로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는 이젠 까만 깃털 뭉치가 되어버린 까마귀를 땅에 내던졌다.
“크아아악-!”
그러나 그 다음 공격에 대한 대비는 미처 이루어지지 못했다. 앞선 까마귀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또 다른 까마귀가 빠른 속도로 에드가드의 얼굴에 내리꽂히며 그의 눈을 부리로 꿰뚫었던 것이다. 달아나는 까마귀에게로 헛손질을 하는 에드가드의 눈구멍에서 터져나간 안구와 핏줄이 적나라하게 늘어졌다. 그는 고통으로 한 쪽 눈을 질끈 감은 채 캐리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캐리온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그가 휘두른 팔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러나 에드가드의 손끝에는 아무것도 걸리는 느낌이 없었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까마귀 떼로 변이한 것이었다. 그는 얼른 몸을 돌려 멀쩡한 눈으로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캐리온은, 아니 까마귀 떼는 벌써 하늘 높이 날아올라 있었다.
그것이 도망일지도 모른다는 멍청할 만큼 희망적인 생각이 에드가드의 머리에 잠깐 머물렀으나 그건 정말로 잠깐일 뿐이었다. 하늘에서 선회한 까마귀 떼는 그 어떤 때보다 빠른 속도로 에드가드를 향해 활강했다. 에드가드는 얼른 몸을 던졌다.
바닥에 몸을 엎드린 그의 뒤로 돌풍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에드가드는 공격을 피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예리한 통증이 옆구리를 쑤시는 것도 잠깐, 배 속에서 실체화된 고통은 그의 간과 대장 따위의 장기를 죄 헤집었다. 무릎을 꿇고 몸을 일으킨 에드가드가 손톱으로 자신의 배를 쥐어뜯는 차에 피를 뒤집어 쓴 까마귀가 반대쪽 옆구리를 찢고 나왔다.
그 빌어먹을 새까만 새가 부리에 물고 가는 것이 자신의 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자신에게로 활강해 오는 검은 새 떼들을 보면서, 그리고 자신의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단 것을 깨달은 채로 에드가드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너희 진실로 단죄 받으리라! 새로운 세계를 목도···”
검은 돌풍이 그의 몸을 덮쳤다. 죽음은 그 당사자가 깨닫기도 전에 폭우의 소리를 흉내 내며 몰아쳤다. 까마귀 떼가 지나간 자리에 무릎 꿇은 두 다리만이 남았다.
*
“비켜주자고.”
저 멀리서 검은 말을 타고 마주 다가오는 남자를 본 막심이 뒤돌아 말했다. 막심이 말의 배를 가볍게 차며 앞질러 가자 나란히 말을 타고 있던 올가가 그의 뒤로 붙으며 길을 내주었다. 저택에서의 일로 추격은 지체되었다. 그런 지체 때문에 이제는 더듬어 따라가고 있는 흔적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는 말과 같은 색의 검은 제복을 위아래로 갖춰 입고 있었기에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짐승처럼 보였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신들이 아직 살아있던 시대에 거인과 인간의 전쟁에 역시 참여해 삼파전을 벌였다는 생물의 이야기는 막심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말의 속도를 줄여 막심이 있는 쪽으로 다가온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내가 더 나아가지 않고 말을 완전히 멈추자 막심도 고삐를 당겨 자신의 말을 멈춰 세웠다. 사내가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잔베르로 가는 길이 이쪽이 맞습니까?”
검은 제복의 사내는 짙은 색안경을 손끝으로 내리며 그 너머로 막심을 쳐다보았다. 묘한 눈동자였다. 사내의 쏘아보는 눈길에 막심은 평소의 유머 감각도 잊고 다소 딱딱하게 대답했다.
“완전히 길을 잘못 드셨습니다.”
“허, 이거 초행이라··· 그럼 혹시 방향을 일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막심은 손을 들어 그들 옆에 놓인 바위산을 가리켰다. 물론 그걸 뚫고 갈 수는 없었으므로 알아서 둘러가라는 의미였다. 사내는 낭패감을 감추지 않고 다소 과장스럽게 말했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군요. 거기 있는 사냥개를 잡아 죽여야 하는데······.”
갈고리칼의 손잡이를 쥔 막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내는 막심을 향한 시선을 여전히 유지한 채로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뭐, 족제비 정도로 만족할까.”
* Avantasia의 〈Serpents In Paradise〉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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