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 1장 - 폭풍은 고요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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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깽이’ 코리나는 무슨 일에든 좀처럼 놀라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장작처럼 뻣뻣이 허리를 세우고, 거친 옷감으로 짠 옷은 목 아래까지 단추를 모두 채워 여학교 기숙사의 사감같이 강퍅한 인상이었다. 마물에게 붙잡혀 소지 하나만 남기고 왼손의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갈 때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끝까지 사냥꾼의 위치에 대해 함구했던 그녀였다.
구마사제단의 자금 운반책으로 일하던 그녀는 여덟 해 전에 안드로스 단장의 권유로 사냥단의 연락원을 맡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줄곧 마일스아이렌을 중심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최근에는 그웬돌라드 지역의 연락원이 부상을 입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제국의 북동부는 거친 곳으로 이름이 나있었으나 그녀가 언제나 뇌까리는 말처럼 세상 어디에도 다른 곳은 없었다.
“막스! 어쩌다가···?”
그런 그녀도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이의, 며칠 만에 뒤바뀌어 버린 몰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전 콧대는 지켰습니다.”
자리에 앉은 막심이 자신의 코를 손으로 두들겨 보이며 말했다. 그게 마일스아이렌의 또 다른 동료를 염두에 두고 던진 농담이라는 것은 코리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코리나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도대체 이 사냥꾼이란 작자들은 세상을 지키는 법은 알면서도 왜 자신을 지키는 법은 모르는 것일까.
“비 내려 진 길에 계절의 신은 걸음을 늦추도다. 그웬돌라드는 어떻게, 좀 지낼 만하십니까?”
“자네 보니 확실해지는군. 여기 사냥꾼들은 전부 죽으려고 안달이 난 것 같아.”
코리나의 딱딱한 반응에 막심은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막심의 대책 없는 낙천성에 코리나는 기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탁한 대로 준비해왔는데, 정말 사람이 더 필요 없다는 건 확실한가?”
“인력을 쏟아붓는 게 능사가 아니란 건 오펜하른에서 증명된 바 있지요. 네, 확실합니다. 저 혼자로도 충분해요. 아니, 오히려 혼자여야 합니다. 남작의 능력 말입니다. 그거 여러 명일 때 골치 아프겠더군요.”
“정말 그 이유뿐인가?”
무모한 일을 곧잘 벌이는 것처럼 보이는 막심도 뜯어보면 치밀한 계산 위에서 밟아 디디는 매 걸음에 신중을 기할 뿐, 결코 허투루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코리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상당한 양의 은괴와 기름을 준비해 달라 요청했을 때에도 코리나는 더 묻지 않고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연락원으로서 그녀의 진가는 가용한 자원을 파악하고 지원을 끌어오는 데서 발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홀로 사냥에 나서겠다는 막심의 고집 앞에서 그녀는 이 활달한 사냥꾼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자만과 방심. 군주급 마물을 사냥할 때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되는 것은 은제 칼도, 폭발하는 단검도 아닙니다. 사냥꾼 하나쯤이야 가볍게 해치울 수 있다는 그들의 오만함이 스스로의 허를 찌르죠. 이븐을 보십시오. 이름도 없던 애송이가 잔베르의 늑대인간들을 쓸어버릴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거기다가 코리나, 제가 용맹한 사냥꾼은 못 된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낌새가 이상하면 줄행랑을 놓을 겁니다. 늘 그래왔듯이.”
코리나는 막심을 더 추궁하는 대신 그가 요청해왔던,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물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잠금단추를 풀어 가죽주머니를 열자 그 속에는 앰풀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막심이 손을 뻗어 그 가운데 하나를 꺼냈다.
“주사기 일체형이야. 살에 대고 위 꽁무니를 힘주어 누르면 투약되는 방식이지. 연구원들은 효과를 장담하는데··· 글쎄, 그 인간들 말을 걸러들어야 한다는 건 막스 네가 더 잘 알 테지.”
“연구원의 호언은 사냥꾼을 불안에 떨게 하느니 헛된 자신감이라도 갖고 싸우게 하는 편이 낫단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그게 더 도움이 되고요. 다른 주의사항은 없습니까?”
“일일 투여량은 최대 여덟 개까지. 그 이상으로 투여하면··· 거기에 대해선 그 자신만만한 연구원들도 장담을 못하더군. 사냥단에 광인은 뷔센 하나로 충분해. 그러니 과잉 투여하지 말라고.”
“그래도 이 약의 개발에는 뷔센이 기여한 바가 있습니다. 그도 오펜하른에서 싸웠으니까요.”
막심의 손에 들린 앰풀 속에는 오펜하른에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노블 다이스의 남작과 처음으로 대결했던 사냥꾼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가며 얻어낸 성과가 담겨 있었다. 죽은 에이델의 시체는 사냥꾼의 전당에 안치되는 대신 한동안 항마연구원의 실험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드물지만 남작처럼 사냥꾼에게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마물들이 있었다. 잠깐의 방심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사냥에서 환각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사냥꾼들은 그에 대한 대응법으로써 칼로 자신의 몸을 그어 자해를 한다. 그러면 고통이 그의 정신을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아무튼 이것 덕분에 더 이상 제 몸을 칼로 그을 필요는 없겠군요.”
그러나 출혈도 도무지 이로울 게 없는 것은 환각과 마찬가지였다. 막심은 손바닥 위에서 굴리던 앰풀을 꼭 쥐며 이번 사냥의 성패가 이 약의 효력에 달려 있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나저나 이븐과 스타샤는 뭘 하고 있답니까?”
“부펜하르크 지역으로 넘어갔어. 단서를 찾은 모양이더라고.”
사냥꾼의 소재를 끊임없이 파악하고 이를 단장과 때에 따라 동료 사냥꾼에게까지 알리는 것은 연락원의 주요한 임무였다. 코리나의 말에 잠시 손가락을 꼽아보며 무엇인가를 셈하던 막심이 말했다.
“이레나 여드레. 여드레쯤 뒤에 체스바덴에서 보는 걸로 하자고 일러 주십시오.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향방을 결정지어야 하니 말입니다.”
코리나는 막심이 하려는 일을 더 자세히 묻지 않고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코리나는 자신이 막심을 더 말리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렸다 하더라도 막심이 마음을 바꿔 먹지 않았을 거란 데에는 그녀도 동의했다.
“코리나, 이렇게 그웬돌라드에서도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지만 시간이 저의 등을 떠미는군요.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몸을 일으키려던 막심은 곧 잊었던 말이 생각난 듯 다시 테이블에 몸을 붙이고 물었다.
“코리나, 혹시 살면서 크게 속아본 적 있으십니까?”
생뚱맞은 질문이었지만 코리나는 그녀답게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
“너희 단장이 나를 구마사제단에서 빼올 때 그랬지. 구마사제들하고 일할 때랑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 양반, 어울리지 않게 여우 같은 면이 있지요.”
막심은 한 차례 실소를 터뜨렸다가 곧 웃음을 멈추고 질문을 바꿔 다시 물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믿었던 것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을 때 말입니다.”
“케넌을 겨냥해 하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줘. 아무튼 그럴 때면 끝까지 속는 척을 해야지. 속은 걸 깨달았다고 판을 엎어버리면 안 돼. 속는 척, 끝까지 함께 하다가 일이 마무리되고 상대가 악수를 건네올 때······ 기회는 그때 생기는 거야.”
막심은 코리나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기색이었다. 확신이 선 듯 막심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해두죠. 감사합니다. 이젠 정말로 일어나 봐야겠네요.”
이번에는 코리나가 막심을 잡았다. 테이블을 짚고 일어나는 그의 손 위로 코리나가 장갑 낀 그녀의 왼손을 올렸다.
“막스.”
그녀가 막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널 지켜. 그러고 나서 세상도 있는 거야.”
코리나는 마물에게 붙잡힌 그녀를 죽음에서 건져 올렸던 막심의 무모한 박애심이 단 한 번이라도 그 자신을 지키는 데에 쓰이길 바랐다. 코리나를 마주 보며 막심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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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드라는 그 작자를 더 조지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웬일로 후회도 할 줄 아시고.”
물론 스타샤는 자신을 놀려대는 사람을 응징할 줄도 알았다. 그녀는 칼집으로 이븐의 등을 후려친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젠 로지아 그 여자도 못 믿겠어. 너도 의심스럽긴 마찬가지고. 아니, 정정할게. 의심스러운 건 네 몸이지. 아무튼 너와 로지아의 관계, 로지아와 에드가드의 관계, 그리고 에드가드와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인물의 관계······. 이건 정말로 단순한 삼단논법이야.”
“학계란 건 그물처럼 얽혀 있는 사회니까. 연구의 소산인 내가 관계되어 있다고 해도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
대문은 지키는 이 하나 없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불청객을 염려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아주 특별한 용무가 있지 않은 이상 누구도 이 음산한 저택에 방문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회양목을 둘러 심은 산울타리는 오래 전에 말라죽어 생선 가시를 쌓아놓은 듯이 보였고, 아마도 연못이었을 늪의 가에는 버드나무가 미친 사람처럼 산발한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두운 벽돌로 쌓아올린 저택은 달빛을 받아 기이하게 자색을 띠었다. 스타샤가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취향 한번 죽여주네.”
이븐과 스타샤가 말에서 내리자 입구로부터 등이 굽은 노인이 다가와 말고삐를 넘겨받았다. 입구로 들어섰을 때는 음식 냄새와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나는 꿉꿉하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뒤섞여 그들을 반겼다. 이븐과 스타샤를 맞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그것은 곧 이르지만 당연한 재회였다.
불빛을 등지고 선 탓에 보닛의 그늘이 얼굴에 드리웠지만 이븐은 여전히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으나 묘하게 우울한 기운이 풍기는 얼굴이었다. 여자는 초대장을 건넸던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말없이 동작으로만 뜻을 전달했다. 자신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그 동작은 의심의 여지 없이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뜻이었다.
“괜한 분란 만들 필요 없어.”
스타샤가 칼집을 움켜쥔 손에 힘을 넣자 이븐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의 허리와 허벅지에 차고 있던 권총 세 자루를 차례로 여자의 펼친 손 위에 조심스럽게 쌓았다. 스타샤도 칼집을 풀어 여자의 가지런히 내뻗은 팔목 위에 균형을 맞춰 올려놓았다.
용건이 끝난 여자는 마치 바퀴 달린 물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흔들림 없이 뒤를 돌아 복도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치마 아래 버팀대를 넣어 한껏 부풀린 여자의 뒷모습이 옆모습이 되었다가 방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이븐은 허리 뒤에 걸고 있던 사냥칼을 스타샤에게 넘겼다.
“너는?”
받아든 사냥칼을 역시 마찬가지로 허리 뒤에 건 스타샤가 물었다. 이븐이 복도로 나아가며 대꾸했다.
“네 추측이 맞는다면 난 귀하신 몸일 테니 적어도 죽을 염려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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