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 3장 - 창자와 까마귀의 밤(1)
8막 계승
3장 창자와 까마귀의 밤
“어떤 것 같아?”
“뭐가?”
스타샤의 반문에 이븐은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이윽고 내놓은 답은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궁색한 면이 있었다.
“그냥··· 전부 다.”
스타샤는 잠시 불붙은 담배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굴렸다.
“왜 초대되었는지 모르겠어. 자기들끼리야 뭐 정보를 공유하고 연구 성과를 자랑할 수는 있겠지만 이 모임에서 우리의 존재는 지나치게······.”
“이질적이라는 건가?”
“그래. 항마연구원을 흉내 내는 놈들이니까 사냥꾼과도 만나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거든. 가령 버나드라는 작자만 봐도 그렇잖아? 그자가 진짜 자기가 말한 연구를 수행했다면, 인육을 먹은 마물과 먹지 않은 마물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봤을 거란 말이야. 그럼, 제기랄, 인육은 어디서 났으며 그 따위 소리가 도무지 사냥꾼 앞에서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냐고.”
“에드가드처럼 돈을 주고 시체를 샀을 수도 있지. 요즘 같은 시대에 시체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까.”
스타샤에게 시체는 단순히 영혼이 떠난 껍데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인간의 마지막 존엄성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파헤쳐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신성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멸당해도 되는 것도 결코 아니었다.
항마연구원이 사냥꾼의 시체를 해부하는 것에도 깊은 반감을 가진 그녀였을진대 하물며 마물의 먹이로 던져지는 일에야. 스타샤가 걷어찬 돌멩이가 늪에 빠지며 역겹게 꿀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럼 그건 그렇다고 쳐. 게라르라는 놈은? 마물과 인간의 경계를 지운다는 네 말이 자기한테 해당된다고 순순히 털어놨잖아. 카일로파드를 만들었다는 학자와의 관계도 부정하지 않았고. 그리고 정말로 이들이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사냥꾼과 만나보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스타샤는 저택을 향해 돌아섰다. 만찬이 끝나고 잠시간의 휴식을 갖게 된 그들은 참석자들에게서 정보를 더 캐는 대신, 만찬에서 받은 인상을 공유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잠시 말을 멈췄던 스타샤가 곧 재개했다.
“왜 하필 지금이냐는 거야. 다른 어느 때도 아니고, 바로 지금. 사냥단이 창설된 지 십 수 년이 지나서야 사냥꾼을 만나볼 생각을 드디어 하게 됐다고? 그렇다면 학문적 관심은 개뿔, 그것 말고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거야. 그게 카일로파드의 죽음일 거란 사실은 명백하지.”
“그럼 이들 학자 집단에 대한 내 추측에는 너도 동의하는 건가?”
스타샤가 고개를 돌려 이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 네가 맞았어. 이 학자 집단이 우리가 찾고 있는 경쟁 세력이거나 적어도 그 세력과 관계가 있다는 거 말이야. 하지만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할 거야. 이들이 벌이는 일에는 너도 관계되어 있어. 그것도 아주 깊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어둠 속에서 이븐의 눈이 짐승의 그것처럼 빛을 발했다. 스타샤는 입술을 입 안으로 오므려 넣었다가 한숨을 뱉었다.
“카일로파드와 소공녀의 너에 대한 관심, 그리고 네 육체가 저들의 이상과 합치한다는 점. 로지아 그 여자도 연관되어 있어. 본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든, 모르든.”
“내가 노블 다이스를 제거하려는 저들 무리의 장기짝으로 키워졌다는 거로군. 네가 하려는 말이 그거 아닌가?”
자신도 깨닫지 못한 사이 이븐의 말에는 날이 서 있었다. 자신의 자유의지가 사실 더 높은 차원의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고 조종된 결과라는 말을 듣는다면, 누구도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날 늑대인간이 들끓는 잔베르로 걸어 들어간 것은 오롯이 이븐 그 자신의 결단이라는 사실이었다.
“왜? 기분 나빠? 하지만 누구나 누군가의 장기짝이기 마련이야. 너도 예외는 아니지.”
“너무 멀리 가지 말자고. 잔베르의 일은 누구의 사주에 의한 것도 아니었어. 무엇보다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계획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때 그 순간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 맞추는 식의 임시방편으로 점철되어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 그러니 거대한 음모가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저들 학자 집단이 기회를 포착하고 최대한 이용하려들고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훨씬 타당할 거야.”
“네가 관계되어 있는 이상 너는 결코 객관적인 입장을 확보할 수 없어. 그것도 잊지 말자고.”
꽁초를 늪에 던진 스타샤가 틀어 올린 머리를 풀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그녀의 등 뒤에서 붉은 머리가 물결쳤다. 이븐이 그르렁거리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너는 관계되어 있지 않나?”
“무슨 소리야, 갑자기?”
스타샤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택에서 흘러나온 불빛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에서 위험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내가 관계되어 있는데··· 너는 무관하단 건가?”
“야, 사냥개······.”
이븐이 스타샤를 향해 바짝 다가붙었다. 지척에서 들숨과 날숨을 구분하는 일은 의미가 없었다. 이븐이 내쉰 숨을 스타샤가 들이쉬고 그 역(逆)도 조금은 불결하게, 그리고 동시에 순결하게 성립했다. 스타샤는 한 걸음 물러서려 왼발을 뺐다가 다시 들여놓았다. 고개 돌리지 않고 마주하며, 떨지 않고, 그러나 일말의 두려움을 간직한 채로, 망설임 없이 조급히, 또 기억될 만큼 천천히.
등을 조금 굽힌 이븐의 키가 뒤꿈치를 들어 올린 스타샤의 높이와 맞았다. 얼굴이 겹쳤다.
이븐이 팔을 들어 스타샤의 어깨를 잡았다. 거친 손이 외투의 틈으로 드러난 맨살에 닿았다. 진모를 알 수 없는 적의 영토에서,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사냥꾼의 신분으로, 일순간의 황홀에 대한 대가로 세계는 감히 멸망을 맞아도 좋다고 함부로 맹세하면서도 눈이 어두워 후회에까지 생각이 가닿진 않았다.
입술을 떼어낸 스타샤가 이븐의 가슴에 양손을 얹은 채로 미루어뒀던 숨을 가쁘게 쉬었다. 이븐이 팔을 내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사죄하듯이. 그런 그가 저택 쪽으로 고개를 약간 숙이고 말했다.
“말소리가 들리는데.”
“너는 지금 그게 할 소리······. 됐어, 관두자. 어딘데?”
“현관에서 좌측 방향. 두 사람. 둘 다 남자고, 싸우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이븐은 다음 행동에 대한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로 몸을 낮추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저택에 다가가 붙었다. 스타샤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화살 맞은 다리로는 도무지 그 걸음을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창문의 사각을 파악해 둘러 갔다. 이븐이 말한 대로 말싸움의 참여자는 두 남성이었고 그 중 하나는 페르디낭의 것이었다.
“신중히 행동하란 말이야!”
“뭐, 버나드 그 친구? 그 친구 때문에 그러는 건가, 지금?”
두 번째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으므로 이븐은 만찬에서 말이 없었던 두 명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다. 역시 말이 없었던 다른 한 명은 여자였으므로 제외되었다. 방의 불은 꺼져 있었고 커튼이 드리워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이븐은 감각을 확장시키며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두 번째 목소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거 왜 이러나, 퍼디. 그 정도야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서펜트랑 어울려 다니더니 겁이 늘었구먼그래. 켈레넨스크의 일로 자네를 존경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나를 실망시키는군. 자네의 그 담대한 포부는 어디 갔나?”
“그만. 사냥꾼들은 우리의 계획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선 안 돼.”
두 번째 목소리가 무어라 대꾸했으나 소리가 작고 발음이 분명치 않아 이븐은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페르디낭이 다시 말했다.
“그건 서펜트가 알아서 할 일이지. 그리고 그자는 꽤 협조적이기도 하고. 어쨌든 네가 버나든지 뭔지 하는 것의 입을 빌려서 그 탯줄이 어쩌고 다른 세계가 저쩌고 얘기하는 짓도 그만두란 말이야.”
“사냥꾼 놈들의 멍청한 얼굴을 보고 있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자네도 알잖아! 내가 얘기 좀 흘린다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마물 창자 뽑아내는 것밖에 없는 놈들이 쥐뿔, 문(門)에 대해서 뭘 알아내겠어?”
“그만! 사냥꾼들이 밖에 있어. 늑대사냥개 그자한테 특별한 능력이 있단 걸 염두에 두라고.”
이븐은 오가는 말을 잊지 않으려 소리 없이 입 속으로 몇 가지 단어를 되뇌었다. 서펜트, 켈레넨스크, 탯줄, 다른 세계, 그리고 문······. 천식을 앓는 것처럼 조금은 쉰 듯이 들리는 두 번째 목소리가 말했다.
“그럼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거면 왜 초대하자고 한 거야?”
“카일로파드가 죽기 전에 저들과 접촉했어. 그 떠버리 지네 자식이 무슨 말을 흘렸는지 알아내야 해. 우리도 탐색전을 벌여야지.”
“그럼 에드가드를 시키지 그랬어?”
다음에 페르디낭이 한 말에 놀란 것은 두 번째 목소리의 주인뿐만이 아니었다.
“에드가드는 죽었어.”
“뭐? 잠깐, 혹시···?”
“아냐, 에드가드는 우리한테도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후작의 소행이다.”
에드가드 바이스게르버가 후작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븐은 외워야 할 목록에 하나를 더 추가했지만, 기실 그 사실은 구태여 노력할 필요도 없이 머리에 새겨졌다.
“어쩌다가 후작이?”
“모르델반트에서 사냥꾼들한테 붙은 모양이야. 소공녀를 탈출시킨 것도 그 여자 짓인 것 같아. 그러니 쓸데없는 짓 벌이지 말고 필요한 얘기만 해서 돌려보내자고.”
“이제 알겠어. 너희 삼두회가 날 버리려 작정한 거로군. 언제나 그랬어. 고상한 척, 뒤로는 개짓거리를 다하면서······.”
“혼자 앞서나가지 마. 이따 서재에 사냥꾼들이 올라오면 내가 잘 구슬려볼 테니까 가만히 있어.”
이윽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나면서 대화는 종료되었다. 이븐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스타샤에게 대화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며 저택의 벽에서 떨어졌다. 정말로 중요한 대화는 언제나 뒤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다시금 증명되었다.
- 작가의말
주인공이 비밀스러운 대화를 엿듣는다는 클리셰는 가능하다면 쓰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지 않고는 도무지 이야기를 전개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결국 쓰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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