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 3장 - 창자와 까마귀의 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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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과 스타샤가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섰을 때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계단을 오르던 페르디낭이었다. 입구로부터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를 인지한 페르디낭은 뒤를 돌아 이븐을 향해 알은체를 했다.
“아, 베르자크 엽사님.”
“랭데 박사님. 서재로 가시는 길입니까?”
“네, 같이 가시죠.”
이븐은 고개를 돌려 스타샤와 눈빛을 교환했다. 계단을 향하지 않고 복도에서 방향을 꺾는 그녀를, 페르디낭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이븐이 얼른 말했다.
“그럼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페르디낭은 스타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주시하다 이븐의 말에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이 끝나고 이 층에 들어섰을 때 페르디낭이 말했다.
“카일로파드는 쉽지 않은 상대였을 텐데요.”
“네, 쉽지 않았죠.”
이븐이 멈춰 서서 양쪽 복도를 번갈아 살피자 페르디낭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안내했다. 그 이상의 말을 기대하며 이븐의 표정을 자꾸 살피는 페르디낭을, 이븐은 일부러 못 본 척했다. 페르디낭이 끊어진 대화를 재개하려 다시 말했다.
“에밀 플로베르.”
페르디낭의 말에 이븐이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르디낭이 목소리를 조금 낮춰 부연했다.
“카일로파드의 본명입니다.”
“그도 학자였습니까?”
대답을 고민하듯 페르디낭이 고개를 치켜들고 턱수염을 매만졌다. 둘만의 대화가 지속될 수 있도록 페르디낭은 아주 천천히 걸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넘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자였느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우리와 그의 사이에는 송아지와 소만큼의 차이가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븐은 실없이 한 번 웃었다. 페르디낭이 사용한 비유의 연원이 아무래도 만찬에 나왔던 송아지고기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 송아지를 지네 괴물로 만든 소는 누구였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답변을 드리지 못하더라도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베르자크. 그 학자가 카일로파드를 만들어낸 건 분명한 과오였지만, 저 또한 동료를 팔아 넘겼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진 않군요.”
페르디낭은 아예 그 자리에 멈춰 이븐을 향해 말했다.
“그보다 제가 궁금한 것은······. 카일로파드가 조용히 죽지는 않았을 텐데요. 저는 인간 시절의 에밀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설파하는 데에 열정적인 청년이었지요.”
“네, 말이 많더군요. 인간 시절의 그가 가졌던 이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답변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에 되레 다시 질문을 받게 된 페르디낭은 난처한 듯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 답했다.
“에밀은 마물의 등장을 하나의 기회로 여겼죠. 베르자크, 혹 뢰펭겐이라는 학자에 대해 알거나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전쟁이 인류사가 도약할 기회를 마련한다고 주장했던 사람 말이죠. 네, 대충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학식은 저를 놀라게 하는군요. 사냥꾼들을 얕잡아 보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지식은 뭐랄까, 실용적인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요. 아무튼 에밀 플로베르는 그런 뢰펭겐의 주장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인류가 마물이라는 전대미문의 과제에 맞서 싸우면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페르디낭의 말에서 이븐은 두 개의 탑을 연상했다. 마주본 채로 높이를 경쟁하며 더욱 높게 올라가는 탑. 멀리서 바라본다면 장엄한 광경일지 몰라도 가까이서 본다면 별로 대단한 관찰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그를 이루는 것이 무수한 시체임을 알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과제가 되기로 했단 말씀이십니까? 노블 다이스가 됨으로써?”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로 그렇습니다. 엽사님들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수상쩍은 일이나 벌이는 것 같아도,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마물이라는 골칫거리를 영구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지향과 에밀의 이상은 바로 거기서 갈라졌죠. 에밀 플로베르, 꿈 많고 야심 가득했던 청년, 카일로파드는 그 스스로 숭고한 이상의 순교자가 되고자 했던 겁니다. 인류가 힘을 합쳐 대적해야 할 거대한 악을 자처함으로써 말이죠. 그러나 이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는 베르자크 당신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마물에 의해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당신의 자식이 인류의 도약과 발전을 위한 희생양이 되었노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사냥꾼으로서의 이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피를 흘리는 까닭은 더 많은 피를 예비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출혈의 시대를 틀어막고자 함이었다.
“항구적인 투쟁. 노블 다이스가 원하는 건 바로 그겁니다. 싸우고, 계속 싸워서 결코 발을 들여놓았던 적 없는 새로운 장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러나 카일로파드가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했을 리는 없지요. 뭐라고 설명하던가요? 자신들의 목적에 대해서 말입니다.”
“자신들, 노블 다이스가 마물의 개체수를 조절한다더군요.”
다시 걷기 시작한 페르디낭은 곧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문고리를 잡고 돌리지 않은 채 이븐의 말에 대꾸했다.
“아마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그건 수단이되 목적일 수는 없지요. 왜 마물의 개체수가 조절되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투쟁의 국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물과 인간, 어느 쪽도 다른 한 쪽을 압도적으로 능가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페르디낭의 말을 곱씹으며 이븐은 그를 따라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를 빠르게 훑은 이븐은 식당에서 보았던 이들 가운데 두 명의 얼굴이 비는 것을 확인했다. 그 하나는 당연히 스타샤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만찬에서 말이 없었던 남자의 것이었다. 이븐은 그가 바로 페르디낭과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던 인물일 것임을 직감했다.
버나드는 금발의 여자를 붙잡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중이었고, 머리가 벗겨지고 덩치가 큰 남자는 책장에 꽂힌 책들을 흥미롭게 살피는 중이었다. 에케메니아 여자와 대화를 나누던 게라르가 페르디낭과 이븐을 보며 반색했다.
“들어오십시오. 네, 거기 앉으셔도 되고요. 이제 두 분만 더 오시면 시작할 수 있겠군요.”
이븐이 소파에 앉자 맞은편의 버나드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이븐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책을 집어 들며 버나드의 수다를 사전에 차단했다. 이윽고 서재 문이 열리며 스타샤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것은 만찬 동안 말이 없었던 남자였다.
남자는 새치가 지저분하게 섞인 머리에,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는 이들이 그렇듯 등이 조금 굽어 있었다. 동그란 안경은 줄로 귀에 고정되어 얼굴에 바싹 붙어 있었는데 재질을 짐작할 수 없는 안경알은 그 뒤의 눈을 희뿌옇게 가렸다. 그 때문에 남자는 유리로 된 눈을 가지고 있는 생물처럼 보였다.
스타샤가 이븐의 뒤로 다가와 몸을 숙여 속삭였다.
“잠겨 있었어.”
이븐은 표정을 숨기며 간단히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만 끄덕였다. 스타샤가 확인한 방은 페르디낭과 불투명한 안경을 쓴 남자가 대화를 나눈 곳이었을 터, 잠긴 방문 뒤에 무엇이 있을지 따위보다 이븐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방문을 잠갔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이븐은 고개를 들어 게라르를 살폈다. 저자가 정말 이 저택의 주인이기는 한 걸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 제가 보여드리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께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입니다.”
서커스의 흥행사와 같은 말투로 게라르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자 이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븐은 곧장 게라르가 있는 쪽으로 향해 가는 대신 안경을 쓴 남자에게로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아직 선생님의 성함은 듣지 못했군요.”
“로랑 바르트. 친구들은 외과의라고 부릅니다.”
로랑이 이븐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의 음성에는 폐병을 앓는 사람처럼 가르랑거리는 숨소리가 섞여있었다. 이븐은 로랑의 손을 놓고 게라르와 페르디낭의 표정을 빠르게 살폈다. 게라르는 평온했고 페르디낭은 여유로웠다. 그러나 이븐은 페르디낭의 얼굴에 엷게 밴 땀으로부터 미약한 긴장의 냄새를 맡았다.
비밀은 그것이 비밀이라 명명되는 순간부터 파헤쳐질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이븐에게는 그것을 추적할 집요한 인내심과 예민한 감각이 모두 있었다. 그러므로 이븐은 사유를 교란하고 추론을 배반하는 밤의 속임수에 가히 현혹되지 않았다.
진짜는 로랑이다.
“게리, 뜸은 그만 들이고 얼른 보여줘요.”
에케메니아 여자가 게라르를 재촉했다. 게라르는 서재의 가운데에 놓인, 천을 뒤집어쓴 거대한 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상자가 한 차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덜컹거렸다. 쩔그렁대는 사슬 소리를 들으며, 이븐은 그것이 살아있는 생물을 가둔 우리임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금발의 여자가 기대된다는 듯 즐거운 탄성을 올렸고, 버나드가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의 얼굴에는 홍조가 떠올랐고, 스타샤는 입술을 짓씹었다. 서재에 모인 이들을 차례로 둘러본 게라르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페르디낭이 말했다.
“저는··· 감탄과 경악을 구분할 만한 소양이 게라르 당신에게도 있을 거라고 믿고 싶군요.”
“아니요.”
게라르의 말에 페르디낭의 고개가 얼른 로랑을 향해 돌았다가 이븐의 시선을 눈치 채고 뒤늦게 게라르를 향했다. 상자를 감싼 천에 손을 올린 게라르가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것은 오로지 경외뿐입니다!”
과장되게 휘두른 게라르의 팔을 따라 장막이 빠르게 걷어치워졌고, 그 아래서 똬리를 틀고 있던 더러운 진실이 무례하게 노정했다. 이븐은 스스로도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의 뭉치가 목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문장이, 어구가, 채 단어로도 빚어지지 않은 순수한 분노의 음성이 혀의 깊숙한 밑바닥에서 끓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인간이었다. 적어도 그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인간의 육신이었다.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일곱 개, 꼬리가 달렸고······. 아니, 다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팔이었고, 꼬리라 착각했던 것은 드러나 길게 늘어진 내장이었다. 벌거벗은 육신이 조악하게 꿰매어져 거대한 벌레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여섯 개의 팔은 몸뚱이의 양쪽에 나누어져 붙어 있었고, 그 접합부는 입을 벌린 인간의 머리가 팔을 무는 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 일곱 개의 머리가 모두 제각기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양, 공포에 질린 두 눈을 깜박이며 구경꾼들을 불안하게 살피고 있단 사실이었다. 유일하게 팔을 물고 있지 않은, 목에 달린 머리의 입에는 그 대신 재갈이 물려 있었는데 그 얼굴은 이븐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스타샤가 등 뒤로 가져간 손을 이븐이 잡아 제지했다. 이븐이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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