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 3장 - 창자와 까마귀의 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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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던 이븐의 걸음걸이는 그가 서재를 나와 복도에 들어섰을 때쯤 부상으로부터 회복됨에 따라 자연히 교정되었다. 다만 목이 졸리고 피를 흘렸던 여파로 머리는 아직도 현실의 생생한 감각을 받아들이는 데에 애를 먹고 있었다. 꿈속에서 움직이는 듯한 둔한 걸음으로 복도를 밟아 디디며, 이븐은 서재를 뒤적여 찾아낸 편지칼을 전투에 활용할 마땅한 방안을 아직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전투는 계시처럼 그에게 답을 줄 것이었다. 일단 적이 그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기만 하면 근육은 깨닫지 못한 새 단단히 힘을 비축할 테고, 축적된 경험은 본능의 이름으로 길을 인도할 터였다. 그러므로 이븐은 편지칼의 무디고 뭉툭한 날에 대해 걱정하는 대신, 다시 한 번 눈앞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단서에 대해서만 염려하기로 했다.
책장 아래 깔려있던 페르디낭은 의식이 없었다. 몇 차례 갈긴 뺨이 증상의 호전은커녕 악화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한 이븐은 저택을 뒤져 게라르를 찾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건재함을 과시하듯 담배를 크게 외쳐대는 스타샤에게 창밖으로 담뱃갑과 성냥갑을 모두 던져준 그는 이 층을 살피는 임무가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깨달았다.
탐색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중단되었다. 그의 앞에 폭이 넓은 치마를 입고 보닛을 쓴 여자가 버티고 서있었던 것이다.
“메릴린이라고 했던가요? 총, 내 총은 어디 있습니까? 그걸로 당신들을 쏴 죽여야 하는데······.”
이븐은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웃었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충격은 몽롱한 기운이 남아있던 정신마저 일순간에 깨워버렸다.
메릴린은 치마를 잡은 양손을 들어 올려 그 아래 감추고 있던 비밀을 드러냈다. 이븐은 우리 안의 괴물을 볼 때에도 참아냈던 욕지기가 기어코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껏 부푼 치마를 받치고 있던 것은 버팀대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수십 갈래의 창자 다발이었다.
선홍빛부터 회백색과 주황색을 띤 것까지, 다채로운 창자의 줄기들이 촉수처럼 바닥을 딛고 서 있었다. 세 줄기의 창자가 사람의 팔처럼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 창자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이븐의 생각은 착각이 아니었다. 거기에 이븐의 권총 세 자루가 각각 들려 있었던 것이다.
타탕-
여러 겹의 총성이 벽을 때렸다. 이븐은 재빨리 닫힌 문으로 몸을 던졌다. 다행히 문은 열려 있었으나, 자세를 바로잡으려다 휘청거린 이븐은 자신의 몸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왼발이 총에 맞아 날아가고 없었다. 뒤돌아 복도를 확인한 이븐의 눈에 꿈틀거리며 뒹구는 그의 왼발이 들어왔다.
절단된 신체를 새로이 생성해내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릴뿐더러 상당한 기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복도로 돌아가 잘려나간 발을 주워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신체 일부가 미끼로 화한 아이러니 속에서 이븐은 겅중겅중 뛰어 책상을 타고 그 뒤로 넘어갔다. 복도로부터 어두운 방 안에 쏟아진 불빛을 거대한 그림자가 가리는 것과 동시, 다시 총격이 쏟아졌다.
제대로 겨냥하고 쏜 것은 아니었다. 방의 양쪽 끝을 쏜 메릴린은 점차로 총을 든 창자의 각도를 좁혀 쏘며 화망을 구성했다. 두꺼운 책상을 뚫느라 힘을 잃은 탄환이 이븐의 등을 후려갈기며 피멍으로 남았다. 머릿속으로 탄환의 수를 세던 이븐은 총격이 멎자 뛰쳐나갔다.
잘려나간 발목의 통증을 참으며, 이븐은 네 발 달린 짐승처럼 팔과 다리로 바닥을 박차 메릴린에게 달려들었다. 격철이 빈 약실을 때리는 공허한 소리가 두어 번, 그러나 이븐이 낚아챈 창자의 권총은 불행히도 장전되어 있는 것이었다.
탕-
“이런 개···!”
이븐이 두 손으로 붙잡은 탓에 방향이 바뀐 창자는 공교롭게도 이븐의 멀쩡한 오른발을 겨냥하며 그의 발등에 총격을 갈겼다. 그러나 급격히 균형을 잃고 넘어진 덕분에 이븐은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는 창자가 물고 있던 권총을 빼내어 손에 쥐고, 뽑아낸 창자는 멀리 집어던졌다. 던져진 창자가 마차 바퀴에 깔린 뱀처럼 꿈틀거렸다.
이제는 정말로 네 발로 바닥을 기며, 이븐은 그를 향하고 선 메릴린의 뒤로 돌아가 그녀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창자 줄기들은 이동과 방향 전환에 특화되어 있는 모양인지 이븐이 자세를 잡았을 때에는 이미 그녀의 뒤통수가 얼굴과 위치를 맞바꾼 후였다.
첫 번째 탄환은 머리를 보호하고자 들어 올린 창자를 쏘아 맞혀 터뜨렸고, 두 번째 탄환은··· 발사되지 않았다. 이븐은 얼른 허리띠의 약실에 손을 가져갔으나 메릴린이 더 빨랐다. 그녀는 멀쩡한 창자들을 길게 뻗어 이븐의 다리와 팔을 잡고 천천히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으드득-
옥죄는 힘이 대단했다. 양팔의 뼈가 부러지며 힘이 풀린 탓에 이븐은 권총과 약실을 모두 떨어뜨리며 그야말로 무장 해제되었다. 다리를 감싼 창자에서 그를 산 채로 소화시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위산이 뿜어져 나왔다. 이븐은 자신의 살이 타는 냄새를 맡으며, 왼팔을 묶은 창자를 물어뜯었다. 자유를 얻은 왼팔은 재빨리 주머니 속으로 향했다.
퍽-
이븐을 감싸고 있던 창자들의 힘이 한순간 풀리며 느슨해졌다. 귀에 편지칼을 꽂은 메릴린의 눈에서 피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그러나 다시, 창자는 전보다 더욱 강하게 이븐의 사지를 조여 왔다. 좀 전의 공격에서 교훈을 얻은 덕분인지 이제는 목마저 창자로 감아 이븐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빠악-
호박을 밟아 터뜨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메릴린의 머리가 한쪽으로 꺾이고, 이븐이 꽂아 넣었던 편지칼은 반대쪽 귀에서 튀어나왔다. 이븐의 몸을 감았던 창자들은 스르르 미끄러지며 곧 힘없이 바닥에 늘어졌다. 무너진 메릴린의 몸 뒤로, 이븐의 블런더버스를 거꾸로 든 스타샤의 모습이 나타났다. 스타샤가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말했다.
“야, 이거 장전 좀 해봐.”
*
스타샤는 갑각류 같은 모습으로 변한 노인의 목에서 사냥칼을 빼냈다가 각도를 바꾸어 다시 찔러 넣었다. 머리채를 움켜쥔 상태로 사냥칼을 쑤셔 목을 잘라낸 그녀는 시체를 발로 밀어 넘어뜨렸다. 피가 쏟아져 땅을 적시자 이븐의 말이 옆으로 비켜났다. 스타샤는 거치대의 말안장에서 이븐의 블런더버스를 찾아 들었다.
열네 살 때 처음으로 검을 쥔 이후로, 그리고 사냥꾼이 된 이후에는 더욱이 스타샤는 무기로 칼을 고집해왔을 뿐 다른 종류의 것은 익힌 바가 없었다. 따라서 이 기다랗고 굵은 총기에 대해서는 이름이 무지하게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구멍 난 곳이 앞이고 뭉툭한 곳이 뒤라는 정도가 그녀가 아는 전부였다.
다만 이 경우에는 저택에 들어서기 전 이븐이 장전하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았으므로 탄환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그녀가 블런더버스에 대해 알고 있는 목록에 추가되었다. 스타샤는 블런더버스를 어깨에 메고 사냥칼을 오른손에 쥔 채로 저택의 입구를 향했다. 버드나무에 앉은 까마귀가 저택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전투는 스타샤가 입구에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스타샤가 저택으로 돌아오리란 사실을 예측한 듯 또 한 마리의 괴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만찬 동안 간간이 옆에 앉은 이와 귀엣말로만 대화를 나누던 여자였는데, 딱 상반신까지만 그랬다.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나신으로 있는 여자의 허리 아래로는 살진 거미의 배를 연상시키는 몸뚱이가 달려 있었고, 거기엔 털이 수북한 사람의 다리 네 개가 또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약하게도 그 허리 아래의 몸뚱이에는 거대한 입까지 갖춰져 있었다. 벌린 괴물의 입에서 끈적한 액체가 스타샤를 향해 투사되었다.
스타샤는 옆으로 몸을 피하며 어깨에 메고 있던 블런더버스를 꺼내들었다. 물론 망설이지 않는 것은 그녀의 장기(長技)였다.
쾅-
스타샤의 몸이 반동으로 밀려나며 벽에 등을 부딪었다. 어깨에 가해진 충격이 그녀의 고질적인 통증을 배가시킨 탓에 스타샤는 입술을 씹었고, 입안에 피 맛이 번졌다. 허리 아래 몸뚱이를 겨냥했던 것은 좋은 판단이었고, 반동을 예상치 못하고 더 아래를 겨냥하지 않은 것은 나쁜 판단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탄이 아래와 위의 몸뚱이 모두를 골고루 쓸어버린 것은 요행이었다.
거미 같던 몸뚱이는 터져서 짙은 초록빛 내장과 혈액을 쏟아냈다. 스타샤는 괴물이 기동력을 상실한 것을 확인하고, 벽을 박차고 높이 뛰어 사냥칼로 목을 찔러 들었다. 여러 번 사용한 칼의 날은 무뎌져 있었으나 속도가 이를 상쇄했다. 경동맥이 끊어진 여자는 바닥에 착지한 스타샤의 뒤에서 피를 뿜어댔다.
“아아악-! 아악-!”
여자의 몸은 자신의 내장 위로 쓰러지며 그 속에 든 산성 용액의 고통으로 버르적거렸다. 스타샤는 죽어가는 괴물을 뒤로 하고 계단을 향해 나아갔다. 위층에서 총성이 여러 차례 들려왔다. 그녀가 좌우를 살피며 계단의 첫 단을 오르려는 순간 말소리가 들려왔다.
“입구 쪽이었어.”
“나도 알아. 하지만 총을 갖고 있어.”
“둘 다 조용히 해!”
스타샤는 사냥칼과 블런더버스의 개머리판 가운데 무엇이 더 유용할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아직 뜨거운 총신을 쥐고 스타샤는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걸어갔다. 식당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스타샤를 향해 돌아섰다. 검은 머리의 에케메니아인이었다. 지금껏 상대했던 온갖 괴물들과 달리 여자는 비교적 인간의 형상에 가까웠는데, 벗은 상체의 가슴에 달린 두 개의 머리를 감안하더라도 그랬다.
“아하! 총알이 없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총을 거꾸로 들고 서있을 이유가 없지.”
가슴, 아니 머리가 번갈아 말했다. 에케메니아 여자는 두 머리의 말에 고무되었는지 양손에서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뽑아내며 적의를 드러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잠깐의 대치가 있었다. 그러나 곧 스타샤가 블런더버스를 왼손에 옮겨 쥐고 사냥칼을 꺼내어 던지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여자는 제멋대로 날아간 사냥칼을 유연하게 피했지만 스타샤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지는 못했다.
스타샤는 여자가 있는 쪽을 향해 온몸으로 식탁을 밀쳤고, 식탁의 모서리는 여자의 배를 찍어 밀며 그녀를 벽에 밀착시켰다. 계획되어 있던 것처럼 완벽한 연결 동작으로 스타샤는 식탁 위로 도약해 올라섰다. 스타샤의 무게가 더해진 식탁을 애써 밀어보려는 여자의 머리에 스타샤가 개머리판을 내리찍었다.
서너 차례 반복해 첫 번째 머리를 완전히 뭉개버린 그녀는 공포에 질려 쉴 새 없이 소리를 지르는 남은 두 머리도 똑같이 깨부쉈다. 블런더버스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 듯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위층에서 다시 한 번 총성이 들려왔다. 스타샤는 떨어진 사냥칼을 주워들고 이 층으로 향했다.
*
“그렇게 대고 있으면 붙는 거야?”
“재생력을 집중해야지.”
“그게 마음대로 돼?”
잘려나간 왼발을 발목에 대고 있던 이븐은 신랄히 답할 뻔했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상처를 회복할 때면 그도 모르는 새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이었다.
“내 몸이니까. 팔다리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하고 비슷한 거지.”
“자기 몸에 붙어 있다고 해서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아?”
스타샤의 말에 이븐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타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 머리카락 같은 거 있잖아. 손톱도 그렇고.”
이븐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스타샤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뭘 생각한 거야?”
이븐은 왼발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하얗게 질려있던 발에 점차로 핏기가 돌았다. 목이 잘려나간 장화까지는 이븐도 재생을 시킬 수 없었으므로 그는 졸지에 맨발로 걷게 되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이븐이 말했다.
“그럼 만찬 때 함께 있었던 놈들은 다 잡은 거지?”
“그래, 그 ‘진짜’ 게라르랑 페르디낭 빼고는.”
“페르디낭은 감추는 게 많은 인물이야. 우선 게라르부터 잡고 봐야겠어.”
스타샤는 서재 쪽으로 시선을 잠깐 두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르디낭은 내버려두고? 정신 차리면 내뺄 텐데.”
“괜히 묶어뒀다가 죽으면 더 곤란해져.”
이븐은 그렇게 대답하며 저택에 더 숨어있을 실험체들에 대해 생각했다. 저택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야 했고 스타샤의 칼도 찾아야 했다. 이븐은 마주한 스타샤의 얼굴에 미약한 놀라움이 번지는 것을 보고 뒤를 돌았다. 머리가 헝클어진 남자가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도우리다. 지하실이 있어요. 놈은 거기에 있을 겁니다.”
페르디낭이었다.
- 작가의말
장의 제목을 잘못 정하는 바람에 한도 없이 길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3장은 다음 8막 3장(5)로 마무리하고 모레에는 4장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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