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 3장 - 창자와 까마귀의 밤(5)
“크게 다치신 데가 없는 걸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만.”
끝을 길게 끄는 이븐의 말에 페르디낭의 얼굴 위로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븐이 보기에 페르디낭은 게라르 못지않게 미심쩍은 인물이었다.
“박사님은 게라르도 피츠독슨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죠. 저희들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그 사실은 의혹이 가득한 또 다른 추론으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한데요.”
만찬 때만 하더라도 페르디낭은 게라르가 벌이는 연극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조했었다. 그 자신의 입으로 가짜 게라르를 향해 게리라고 부르는 등 친근히 굴었던 것을 이븐은 잊지 않고 있었다. 페르디낭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라르를 저지하려면 급히 움직여야 하지만, 사냥에선 자신의 뒤에 뭐가 있는지 확실히 해야지요. 그건 나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학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느슨하든, 단단하든. 내가 게라르를 알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학계에서의 인연 때문입니다.”
페르디낭의 말을 들으면서 이븐은 엉뚱하게도 감자를 떠올렸다. 줄기를 잡고 뽑아 올리면 수 개의 못생긴 덩이들이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흙 속에 움츠려 몸집을 불리는 작물. 페르디낭이 말을 이었다.
“바이스게르버 박사가 당신들에게 게라르를 소개시켜주려 한단 얘기를, 그리고 게라르가 당신들을 저택으로 초대할 심산이라는 얘기를 어찌어찌 듣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돌발 행동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자의 괴팍한 성미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으니까요. 만찬에서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초대되지 않은 손님이지요. 난 게라르가 벌일지도 모르는 돌발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여기 왔습니다. 우리 학계가, 학자 집단이 사냥꾼들에게 밉보여서 좋을 일은 전연 없으니 말입니다.”
페르디낭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지만, 이븐이나 스타샤가 틈입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얼른 설명을 재개했다.
“아니나 다를까, 게라르는 당신들을 상대로 우습지도 않은 연극을 펼쳤지요. 자신이 만들어낸 그 괴물 같은 실험체들을 데리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자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당신들을 속이게 되었군요.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서재에서 벌어진 일은··· 그 광기의 현장은, 나조차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학자적 양심을 걸고 당신들을 돕겠습니다. 건강한 학계를 위해서라도 병든 장기는 잘라내야 하니까요.”
페르디낭의 말에서 이븐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페르디낭이 하고 있는 말, 즉 서재에서 목도한 광경에 대한 충격으로 게라르를 내치리라 결심했단 얘기는 카일로파드를 본 이후 학계를 떠났다는 에드가드의 말과 그 얼개가 일치했던 것이다.
그건 자신의 관계성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죄과를 물을 만큼 충분히 깊이 관계되어 있지는 않았노라 부정하는 수법이었다. 이븐은 이 학자들의 한결같은 책임 회피에 기가 차서 피식 웃었다.
“도움을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분명히 하고 넘어가고 싶군요.”
이븐은 스타샤의 표정을 확인해 무언의 동의를 구한 뒤 말을 이었다.
“랭데 박사님의 말을 들어보면 게라르도 피츠독슨이라는 인간은 당신들 학계 내에서도 검은 양 취급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에드가드 바이스게르버는 우리에게 게라르를 소개시켜주려 했다고요. 확실합니까?”
잠깐 만나 대화를 나눠본 것이 전부인 에드가드의 성향을 의혹에 대한 근거로 활용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이븐에게는 더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그럼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거면 왜 초대하자고 한 거야?’
그건 페르디낭이 아니라 게라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러므로 이븐이 작금의 상황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림은 이러했다. 첫째, 페르디낭은 게라르의 저택에 이븐과 스타샤를 초대하기로 결정했고 게라르 역시 이를 따랐다. 여기에 페르디낭이 게라르가 말한 ‘삼두회’의 일원이라는 정보를 추가하고 그 명칭으로부터 학계에서의 지위를 추론한다면······ 이븐은 페르디낭의 설명이 완전히 거꾸로 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따라서 둘째, 에드가드가 연락한 것은 게라르가 아니라 페르디낭이거나 예의 삼두회일 것이다. 즉, 페르디낭은 아직은 알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셋째, 사냥꾼들과 접촉한 에드가드는 캐리온 후작에 의해 죽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게라르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다. 이븐 자신과 스타샤를 공격해 그 몸을 실험체로 취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 페르디낭은 너무 멀리 가버린 게라르를 제거하려 한다.
“에드가드를 만나보셨다면 아시겠지만 그는 우리 학계에서도 유독 고립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사실상 학계를 떠난 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하지요. 하지만 그런 그도 게라르와는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연락을 재개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고요. 둘의 연구 분야는 겹치는 면이 있습니다.”
페르디낭이 막힘없이 유려하게 말했다. 잘 준비된 거짓말이군, 이븐이 쓰게 웃었다.
“이제 와서 숨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에드가드와 게라르는 인간과 마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법에 대해 연구해왔습니다. 늑대인간, 들개인간, 그리고 아귀 같은, 인간의 외양을 흉내 낼 수 있는 마물들에 대해, 그리고 그 마물들이 어떻게 변했다가 다시 어떻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븐은 짐짓 납득한 척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덫을 은밀히 숨겨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에드가드는 자신이 마물을 인간으로 되돌리는 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밝히더군요. 만찬에서 박사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박사님 역시 마물이라는 ‘병’을 치료할 방법을 연구하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박사님도 에드가드와 친분이 있으시겠군요.”
“친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었던 적도 있지요. 지금은 모두 옛날 얘기이긴 합니다만.”
페르디낭은 이븐의 얕은 수작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가 깔아놓은 덫을 쉽게 넘어갔다. 이븐은 잠시간 페르디낭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공들여 준비한 빈틈없는 거짓말이 암시하는 사실은 하나였다. 페르디낭이 지금 잘라내려는 것은 병든 장기 따위가 아니라 꼬리라는 것.
“이제 움직입시다.”
체념한 듯이, 그러나 여전히 의혹을 간직한 채로 이븐은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
스타샤가 허공을 칼로 내리쳐 도신의 피를 떨쳐냈다. 이제는 이븐의 눈에도 익숙해진 동작이었다. 쓰러진 괴물의 사체를 이븐이 발로 밀어 길을 텄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페르디낭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이븐은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낸 뒤 문고리의 옆을 겨냥해 총을 쐈다. 그렇게 생긴 구멍에 손을 밀어 넣은 이븐은 곧 잠금장치를 풀어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선 이븐은 재빨리 좌우를 살폈다. 과연 페르디낭의 말대로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이 그들 앞에 버티고 있었다. 문을 잠글 만큼 조심스러운 이가 지하실로 향하는 통로는 보란 듯 열어놓았단 사실을 이븐이 의심스럽게 여기던 차에 그의 머리 위로 육중한 물체가 낙하했다.
이븐은 재빨리 몸을 던져 위로부터 가해진 공격을 피했다. 스타샤가 들어 올린 칼집에서 칼을 뽑아내 수 개의 팔을 달고 있는 거미 같은 형상을 내리쳤다. 피가 튀었으나 괴물은 교묘히 몸을 틀어 치명상을 면했다. 이븐은 다시 자신에게로 덮쳐오는 괴물을 향해 양손에 쥔 권총을 발사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총구로부터 뿜어져 나온 섬광이 몇 차례 점멸했다. 은탄환을 맞은 괴물의 몸에서 살이 녹아내리고 타는 소리가 났다. 여덟 개의 팔과 비대한 몸집,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작은 머리까지 그 각각의 부위들 가운데 인간의 몸이 아닌 것은 없었으나, 그러한 접합을 이루어낸 데에는 마물의 요소가 개입한 것이 분명했다.
“대체 이 따위 것들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뭐야?”
스타샤가 바닥에서 배를 뒤집은 채 덜덜 떨고 있는 괴물의 목을 내리친 뒤 말했다.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성향이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이런 것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릅니다.”
페르디낭의 말은 판에 박힌 변명처럼 들렸다. 그러나 당장은 게라르가 우선이었다. 이븐은 약실을 갈아 끼우며 계단을 향해 앞장서 나아갔다. 철로 된 나선계단은 제법 폭이 넓었는데 아마도 방금과 같은 괴물들이 드나들기 위함인 듯했다. 페르디낭이 이븐을 따르고, 그 뒤를 스타샤가 마지막으로 따르며 셋은 지하로 들어섰다.
정상적인 저택이었다면 포도주 창고로 쓰였을 법한 지하는, 서늘한 기운 위에 인간의 살점과 피로부터 풍겨 나오는 끈끈하고 비릿한 냄새를 함께 실어 보내고 있었다. 이븐은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문을 밀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내가 좀 과했단 건 인정하지.”
이븐이 들어서자마자 게라르가 준비해뒀던 대사를 읊는 배우처럼 서둘러 말했다.
“하지만 실력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 대신 자네들은 내 자식 같은 실험체들을 모조리 죽였잖은가. 비긴 셈 치자고. 캐리온 후작이 여기로 올 거야. 그러니 힘을 합쳐 싸워야 하지 않겠나.”
지하실은 서재에서 보았던 쇠창살로 된 우리로 가득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두어 개를 제외하면 모두 문이 열려 있었을 뿐 아니라 비어 있었다. 게라르는 지하실의 한쪽 끝에서 이븐을 마주한 채 서 있다가 돌연 돌아서서 책상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아니, 그것도 다 네놈들 때문이야! 머저리 같은 사냥꾼 놈들! 내 저택에 까마귀를 달고 오다니······. 네놈들 잘못이니까 너희들이 처리하란 말이야!”
이성을 잃은 듯 광분하는 게라르를 앞에 두고, 이븐은 너무 많은 질문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너희들은··· 뭐지? ‘문’이란 건 대체 무슨···”
“페르디낭, 이 개자식!”
이븐을 따라 들어온 페르디낭의 얼굴을 확인한 게라르가 격노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건 정확히 이븐이 의도한 바와 부합하는 반응이었다. 동료의 배반을 확인한 게라르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떠벌릴 정보에 대비해, 이븐은 한껏 주의를 기울였다.
“내가 없었다면 헤레틱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 같아? 너희 세 마리 겁쟁이들이 뒤에서 수작질이나 하고 있을 때 나는···!”
“베르자크! 놈의 손에 들린 약병이 보이십니까? 놈이 저걸 들이켜는 걸 막아야 합니다!”
게라르가 하는 말을 아주 묻어버리려는 듯 페르디낭이 맞고함을 쳤다. 그렇잖아도 이븐은 게라르의 왼손에 들린 약병을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븐이 손을 들어 페르디낭의 말을 막고 차분히 말했다.
“헤레틱스. 이교도들이라······. 그게 당신들의 이름이군요. 좋습니다. 당신들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게라르의 표정이 굳었다가, 일그러졌다가, 종내에는 아주 추악한 미소로 변했다.
“그래, 가르쳐주지. 이제 숨길 것도 없어. 우리는 문을···”
그러나 게라르는 말을 잇지 못했다. 페르디낭이 이븐을 향해 달려들고, 스타샤가 재빨리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그러나 목적을 이룬 페르디낭의 손에 권총이 들리고, 발사된 탄환이 정확히 게라르의 왼손을 맞히는 모든 일이 하나의 동작처럼 빠르고 조금의 지체도 없이 이루어졌다.
비명을 지르는 게라르의 왼손에서 떨어진 약병이 깨어져 쇠로 된 우리 아래로 내용물이 흘러들어간 것은 조금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주저앉은 게라르가 깨어진 약병을, 그 내용물을 손으로 쓸어 모으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안 돼··· 안 돼!”
스타샤가 칼집을 들어 페르디낭의 뒷목을 내리쳤다. 휘청거리기만 할 뿐 정신을 잃지 않은 페르디낭의 얼굴에 이븐이 분노를 가득 담아 주먹을 꽂았다. 이븐은 의식을 잃은 페르디낭의 손에서 권총을 다시 빼앗아 들고 그를 문밖으로 내던졌다.
- 작가의말
8막 3장(6)으로 이어집니다. 이번 주는 3장을 쓰는 데에 오롯이 할애하게 되었네요.
Commen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