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 3장 - 창자와 까마귀의 밤(6)
변화는 쇠로 된 우리 안에서 일어났다. 하체 없이 팔만 네 개를 달고 있던 실험체는 바닥에 흐른 약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뒤, 곧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창살을 우그러뜨리며 밖으로 기어 나온 괴물은, 피 흘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도망가는 게라르를 향했다. 게라르가 비명 같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내가 널 만들었어! 난 네 아버지야! 나한테 이럴 순 없어!”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지.”
괴물이 부풀어 오르고 일그러진 입 때문에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괴물의 뻗은 팔이 도망치는 게라르의 두 다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돌바닥을 무용하게 긁는 게라르의 손에서 손톱이 부러져 나갔다.
이븐이 양손에 든 권총으로 괴물을 쐈다. 그러나 그것은 괴물의 행동을 가속시켰을 뿐이었다. 괴물은 흘러내리는 것 같이 두툼한 뱃살의 틈 속으로 게라르의 몸을 쑤셔 넣었다.
“날 구해! 내가 다 말해줄···!”
게라르의 얼굴이 늘어진 살점 속으로 파묻히고, 애처롭게 뻗었던 팔마저 먹혀들어 그는 이제 바닥에서 나뒹구는 손톱 몇 개로만 남았다. 살점으로 이루어진 늪처럼 괴물은 게라르의 몸을 집어삼켜 소화시키고 더욱 몸을 불렸다.
이제 지하실의 절반을 메울 만큼 거대해진 그 살덩어리는 이븐과 스타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약의 효과 때문인지 이성을 상실한 듯 뒤집힌 눈알은 허옇게 희번덕거렸고, 고목에 찍힌 도끼 자국 같은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사냥꾼들의 목을 수확해버릴 기세로 낫처럼 휩쓸어오는 첫 번째 팔을, 이븐은 허리 숙여 간신히 모면했고 스타샤는 물러서며 여유롭게 피했다. 소매에 감춘 단도처럼 사냥꾼의 회피는 언제나 공격을 예비한 몸짓이었다.
이븐은 괴물의 양 가슴을 겨냥해 연달아 총을 쐈고 스타샤는 뽑아든 칼로 연이어 휘두른 두 번째 팔을 후려쳤다. 솟구친 피는, 그러나 치명상을 증거하기엔(*) 부족했다.
이번에는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치는 반대쪽 팔을, 몸을 비틀어 피한 이븐은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상황을 분석했다. 전투의 한 국면에 매몰되어 전체에 대한 시각을 잃지 말라는 것은 웨인의 주된 가르침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게라르는 갖은 실험으로 온갖 기괴한 실험체들을 만들어내면서도 자신의 몸만은 인간의 형상으로 남겨두었던 작자였다. 그런 그가 아무런 대책도 마련해두지 않은 채 신체를 변형시키는 약을 들이켜려 했을 리는 없었다.
“놈의 뒤로 돌아갈 거야.”
이븐은 게라르가 책상을 내리쳤던 순간 그 위에서 흔들리던 유리병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스타샤는 고개를 잠깐 돌려 이븐과 눈빛을 교환했다. 이제 그녀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븐이 괴물의 뒤를 파고들어 해결책을 찾는 동안 괴물의 시선을 자신에게 묶어두는 것이었다. 팔을 휘두르는 식의 정직한 공격으로는 이들 사냥꾼을 잡을 수 없단 것을 깨달았는지 괴물은 지하실의 우리를 움켜쥐고 던지기 시작했다.
스타샤는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우리의 창살 틈으로 칼집을 꿰어 넣고 방향을 바꾸어 그것을 내동댕이쳤다. 반면 신속이 관건임을 알고 있는 이븐은 자신의 단단한 육체를 믿고 던져진 우리를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며 괴물의 우측 아래로 파고들었다.
얻어맞은 왼쪽 어깨와 가슴께가 얼얼하게 아파왔다. 이성이 남아있지 않은 괴물은, 그러나 본능만으로 이븐의 행동이 노리는 바가 있음을 파악하고 주먹 쥔 왼손을 내리꽂았다.
이븐은 몸을 던져 바닥에서 굴렀고, 그 회피 동작은 결과적으로 그를 목적지까지 빠르게 인도했다. 마침 오른손목을 집요하게 노리던 스타샤의 칼끝에서 최초의 유효한 타격이 이루어졌다.
잘려나간 괴물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도는 동안, 스타샤는 재빠르게 칼을 칼집 안에 밀어 넣고 장치를 조작해 반집 상태로 개방했다. 튀어나간 칼집 끝에 맞은 오른손이 벽을 때린 뒤 튕겨져 괴물로부터 멀어졌다.
“그아아-!”
잘려나간 손목으로부터 탁하고 거무스름한 혈액을 뿜어 올리며 괴물이 울부짖었다. 이븐은 왼손의 권총을 허리에 차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약병들을 한데 쓸어 모았다. 이븐은 그 가운데 무슨 약이 저 거대한 괴물을 원 상태의 좀 더 작은 괴물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이븐의 선택은 전무이거나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이븐은 괴물의 등에 대고 연달아 오른손의 권총을 쏘았다. 마침내 그를 향해 육중한 몸을 돌린 괴물의 입을 겨냥해, 그 부상의 고통과 흥분으로 벌어진 입에 이븐은 약병들을 차례로 던졌다. 그 다음 이어진 그의 동작은 공격보다는 묘기에 가까웠다. 권총을 바꿔 든 이븐은 허공의 약병을 쏘아 맞히며 경구투입을 강제했다.
이 거친 치료에 스타샤도 가세했다. 그녀는 칼집의 끝을 땅을 향하게 한 채 반집 상태로 풀어 반동을 이용해 허공으로 도약했고, 곧 거대한 괴물의 어깨에 안착했다. 그녀를 제지하려 들어 올린 팔은 이븐이 쏘아 맞혔고, 스타샤는 그 덕분에 아무런 방해도 없이 괴물의 머리에 대고 칼집을 누를 수 있었다. 힘껏 누른 칼집을 다시 반집으로 풀자 두개골에 가해진 압력으로 괴물은 입을 다물었을 뿐 아니라 유리 파편과 약물을 모두 삼켰다.
“뭘 알고 먹인 거야?”
뛰어내려 착지한 스타샤가 몸을 뒤트는 괴물을 보며 말했다. 이븐은 그런 그녀를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되는 대로 욱여넣었던 탓에 약효도 뒤죽박죽이었다. 괴물의 몸은 수포로 뒤덮였다가, 이윽고 터진 물집에서 진물을 흘리다가, 진물이 굳어 딱지가 되더니 이윽고 그것마저 떨어져 나가며 마침내 몸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줄어든 괴물이 배에서 마지막으로 뱉어낸 것은 한껏 쪼그라든 시체였다. 전의를 상실한 괴물이 팔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것이 흐느끼듯 말했다.
“늦었어··· 너무 늦었다고······.”
칼집을 움켜쥔 스타샤가 천천히 다가갔다. 칼의 높이는 괴물의 목에 맞춰져 있었다.
“내가 이 꼴이 될 동안 당신들은 대체···!”
스타샤가 뽑아낸 칼이 괴물의 목을 갈랐다. 두터운 살 때문에 완벽히 베어내지 못한 머리가 옆으로 꺾여 덜렁거렸다. 치솟는 피를 피해 뒤로 물러난 스타샤가 씹어뱉듯 말했다.
“우리가 팔이 네 개라도 달린 줄 아나.”
*
“죄다 쓸어갔군.”
“아니면 태워 없앴거나.”
이븐의 말에 스타샤가 벽난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부지깽이를 들어 멀쩡한 종이를 찾아 잿더미를 헤집었으나 어느 것 하나 건질 게 없었다. 그렇잖아도 서재는 전투의 흔적으로 난장판이었지만, 누군가 찾아와 한 번 더 들쑤셔놓은 탓에 그야말로 전쟁터 같은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돌 아래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말이지.”
“팔다리를 부러뜨려 놔야 했어.”
스타샤가 이를 갈며 말했다. 지하실에서의 난투를 끝내고 나왔을 때 둘은 응당 얌전히 쓰러져 있어야 할 페르디낭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택을 뛰쳐나간 이븐이 발견한 것은 방금 전에 찍힌 선명한 말발굽 자국뿐이었고, 그건 곧 페르디낭이 부리나케 도망쳐버렸단 사실을 의미했다.
페르디낭은 서두르면서도 이븐과 스타샤로서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꼼꼼함을 잊지 않은 듯 증거를 인멸해버렸고, 그 때문에 두 사냥꾼이 건진 것은 지하실에 있던 연구 자료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수확이라 하겠지만 이븐에게 중요한 것은 학계와의 교류한 흔적, 즉 헤레틱스라는 집단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였다.
“아, 찾았다.”
스타샤가 벽난로의 잿더미 속에서 마침내 타지 않은 종이 쪼가리를 찾아내고 외쳤다. 그녀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그을린 종이에 적힌 글씨를 읽어 나갔다.
“메. 릴. 린. 입천장을 한 번··· 무슨 글자야, 이게? 내 삶의 빛이요······.”(**)
스타샤가 손 안에서 구긴 종잇조각이 바스러져 흩어졌다. 이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박사님이 자기 피조물하고 사랑에 빠졌었던 것 같군.”
스타샤는 자신이 개머리판으로 때려눕혔던 여자의 모습과 식당에서 마주했던 특이한 가슴을 달고 있던 여자를 떠올리며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븐이 물었다.
“항마연구원의 연구원들한테 잘해줘야겠단 생각 안 들어?”
“잘해주기는 무슨. 걔네들이 살짝 정신 놓으면 이런 놈들처럼 되는 거야.”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스타샤의 전혀 누그러들지 않은 반응에 이븐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스타샤가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을 발끝으로 뒤적이며 말했다.
“건질 만한 건 다 건진 것 같은데.”
이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도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
“그럼 이 자료는 본크 씨 편으로 글라트펠트에 보내는 걸로 하고, 막심과 합류하자고. 막심도 뭔가 알아낸 게 있을 테니.”
“용병들이 제대로 일을 했을지 모르겠네. 네 말대로라면 꺼림칙한 놈들인 거잖아. 마을 주민들하고 결탁해서 마물을 감춰? 그것도 모자라 의심을 안 받으려고 하나씩 잘라다 돈으로 바꿔먹었다면······.”
“글쎄, 자기네들 말로는 마을 주민들 전체를 적으로 돌리느니 협상해서 실리를 챙기는 편이 나았다고 하니까. 수긍할 만한 부분도 있지.”
스타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가 끌고 가는 말이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로 오인한 것인지 푸르르 울었다.
“아냐, 그럴 때면 사냥단에 알려야지. 하여간에 용병 놈들은 돈만 밝혀서 상종할 것들이 못 돼.”
“그래도 모르델반트에서 그 용병들 도움이 아니었다면 카일로파드를 잡지 못 했을 거야.”
“그리고 소공녀를 놓쳤지.”
그렇게 쏘아붙인 스타샤는 저택의 대문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말고삐를 놓고 얼른 칼의 손잡이를 쥐었다. 대화의 내용보다는 스타샤의 흔들리는 머리칼에 집중하고 있던 이븐도 심상찮은 기색을 느끼고 권총을 잡았다.
“오래도 걸렸네. 둘이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밖으로 나가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은 검은 머리칼의 여자였다. 저택을 나와 마구간으로 향하는 동안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이븐과 스타샤가 옆문을 이용했던 탓이었다. 이븐이 페르디낭의 흔적을 찾아 저택을 나왔을 때만 해도 여자는 없었으므로 그녀가 말하는 오래라는 것은 고작 반 시간 남짓이었을 뿐, 이븐은 여자가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캐리온 후작.”
게라르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븐이 말했다. 캐리온은 자신을 알아보는 사냥꾼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날 알고 있군? 그래도 대면하는 건 처음이니 소개를 하도록 할까. 주사위의 다섯 번째 눈, 캐리온 후작이다. 너희들을 죽이러 왔고.”
“잔베르의 이븐 베르자크다. 너희들은 날 죽이지 못했지만 난 너희들 중 하나를 죽였지.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나?”
이븐은 외투를 젖혀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는 후작을 둘러싸고 있는 까마귀 떼를 살피며 그녀의 능력을 어림짐작해보았다. 저 살진 까마귀들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것이 후작의 능력이라는 사실은 스타샤를 통해 전해들은 바 있었으나 그 자세한 방식까지는 스타샤도 알려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 역시 후작과 싸워본 일이 있는 다모크의 경험을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던 탓이었다.
이븐의 말에 캐리온이 싱긋 웃었다.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는 피부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싸늘한 눈동자는 베어 없애야 할 상대라는 점을 감안해도 고혹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몸은 마르고 가늘어서 금욕적인 분위기마저 풍겼다. 캐리온은 왼손으로 폭포처럼 곧게 쏟아진 흑발을 꼬며 말했다.
“글쎄, 이번엔 너희들 쪽에서 죽을 차례라는 거?”
예상치 못한 대꾸에 이븐이 권총을 든 오른손으로 옆머리를 긁었다.
“그건 생각 못 했네.”
“됐어. 집어치우고 덤벼.”
이 따위 한심한 대화는 이제 끝이라는 듯, 스타샤가 칼 손잡이를 움켜쥔 손에 힘을 넣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에 대응해 캐리온도 절도 있고 우아하게 오른팔을 내뻗었다.
“처형이다, 갯(犬)과 족속들.”
까마귀 떼가 돌풍처럼 휘몰아쳤다. 스타샤는 재빨리 검은 돌풍의 경로에서 벗어나면서도 칼로는 까마귀들을 내리쳐 베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반 토막 난 까마귀들의 시체가 땅에서 굴렀고, 이븐이 왼손으로 후려친 까마귀들은 그 위로 떨어졌다가 다시 날아오르려던 차에 탄환 세례를 받고 영원히 침묵했다.
그러나 캐리온이 노린 것은 처음부터 앞이 아닌 뒤였다. 저택의 지붕에 앉아 있던 까마귀들이 활강하며 이븐과 스타샤를 뒤에서 덮쳤다. 스타샤는 반집으로 개방한 칼집의 반동을 이용해 빠르게 옆으로 구르며 물러났다.
따라붙은 까마귀들을 뽑아낸 칼로 베어 가르고, 어깨에 앉아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놈은 재빨리 칼집을 들어 쳐냈다. 그러나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공격에는 그녀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븐 역시 고전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날짐승을 상대로 총은 결코 최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이븐에게 곡예에 가까운 사격 실력이 있다 한들, 그리고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 유난히 강력한 권총이었다 한들, 총은 점의 타격을 가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무기였다. 그러므로 빠르게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을 쏘아 맞히는 모든 동작에는 최대의 집중이 동원되어야 했고 그것은 느린 대응으로 귀결되었다.
후드드득-
부리에 살점이 베이고 찢겨 나갔다. 이븐은 왼팔로는 자신의 살점을 뜯어먹는 까마귀를 쫓고 오른손으로는 메고 있던 블런더버스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이 까마귀들은 영악하게도 이븐의 손등을 부리로 쪼아 결국 그의 손에서 총기를 빼앗아 가고 말았다. 이븐은 다시 권총을 집어 들고 앞을 가로막는 까마귀들을 쏘아 떨어뜨렸다.
“소피를 그 꼴로 만든 게 이 총인가?”
까마귀로부터 블런더버스를 인계 받은 캐리온이 손 안에서 총신을 쓸어보며 말했다. 그녀는 총기를 다뤄본 경험이 풍부한 사람처럼 능숙하게 해머를 뒤로 당겼다. 어깨에 가져다 대고 이븐을 조준한 자세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븐은 까마귀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들의 고통을 참으며 대꾸했다.
“아냐, 그건··· 다른 사냥꾼의 무기가 그랬지.”
캐리온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방아쇠에 걸린 그녀의 검지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명령이라도 받은 듯 이븐을 감쌌던 까마귀들이 흩어졌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캐리온은 방아쇠를 당겼다.
퍽-
“아악-!”
외마디 비명은 이븐의 입이 아니라 양팔이 날아간 캐리온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스타샤가 무리하게 마물들의 머리통을 까부수는 동안 균열이 생긴 블런더버스는 녹색 화약의 폭발력을 감내하지 못하고 마침내 장렬히 산화한 것이었다. 상황에 대한 이해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이븐과 스타샤는 그보다 기회의 활용에 관심이 있었다.
까마귀들이 주인의 명령을 받지 못하고 당황해 있는 동안, 이븐의 양손에 들린 권총이 번갈아 불을 뿜었다. 아예 형체를 말소시켜 버리려는 듯이 맹렬한 사격이었다. 이븐이 약실을 갈아 끼우는 동안 스타샤는 머리의 절반이 날아가고 배와 옆구리, 골반, 허벅지 모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캐리온을 향해 달려가 칼날을 뽑았다.
칼끝에 살을 치는 감각은 있었으나 뼈를 끊어내는 감각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허리가 반쯤 잘려나간 캐리온이 수십 마리의 까마귀 떼로 화하며 순식간에 흩어졌던 것이다. 저택의 지붕 위로 높이 치솟은 까마귀 떼는 주위의 모든 까마귀들을 불러 모으며 곧 하나의 검은 덩어리가 되었다. 그 검은 새 떼는 다시금 스타샤와 이븐을 향해 휘몰아쳐 왔다.
그 사이 숙련된 동작으로 둘은 제법 여유 있게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애초에 그것은 공격이 아니었던지, 까마귀 떼는 열려있는 대문을 통과하며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이븐이 권총을 들어 겨냥했으나 어느새 사거리를 멀찍이 벗어난 뒤였다. 이븐은 권총을 다시 허리에 걸고 블런더버스의 잔해를 살피며 조금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벤야민이 슬퍼하겠는데.”
*표준국어대사전은 ‘증거하다’를 단어로 인정하지 않으나, 해당 단어는 종교적 용법으로 ‘증명하는 증인이 되다’의 의미를 지님. 고려대한국어사전 참조.
**나보코프의 『롤리타』 일부를 변형해 차용.
- 작가의말
이제 밤을 새우는 것이 일과가 되기는 했지만 아침 8시까지 글을 써보기는 또 처음이네요.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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