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 4장 - 영웅은 필요 없다(1)
8막 계승
4장 영웅은 필요 없다(*)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그를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면 사내의 이처럼 날선 반응에 놀랐을 것이다. 다만 자신을 서펜트라고 소개한 남자는 사내를 처음 대면한 터였으므로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교단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군주급 마물들을 수차례 베어 죽인 공으로 족제비라는 별명 외에도 시해자(弑害者)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것 정도가 서펜트가 사내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따라서 서펜트는 놀라는 대신 차분하게 자신의 설명을 이어갔다.
“켈레넨스크를 아시오, 사냥꾼? 베소니아의 서북부에 있는 도시외다. 역병이 퍼져···”
“알고 있으니 거두절미하고 요점만 말해.”
사내는 하대를 쓰고 있었으나 연배는 서펜트 쪽이 훨씬 높았다. 목 언저리에서 끝나는 잿빛으로 센 머리는 뒤로 넘겨 자연스럽게 물결치고 있었고, 거의 안으로 굽다시피 한 매부리코는 오히려 구렁이보다는 맹금류를 연상시켰다. 호박같이 주황기가 감도는 동공은 안경 뒤에 감춰져 있었으나 그 섬뜩함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뱀과 닮은 구석이 있다면 바로 그 두 눈이었다.
“켈레넨스크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항마연구원이 내린 결론 또한 알고 있을 줄로 믿겠소. 전염병이 마물에게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아둔한 결론 말이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켈레넨스크의 마물들이 일소된 것만큼은 사실이야. 그렇다면 당신네 똑똑이들이 내린 현명한 결론은 뭐지?”
서펜트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잠시 시선을 들어 사냥꾼의 방을 살폈다. 방은 마물 사냥꾼보다는 대학 교수의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좌우에 놓인 책장에는 희곡, 소설, 시, 평론까지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책들이 그 나름의 체계를 갖춘 채 도열해 있었다. 책등을 눈으로 훑어 익숙한 제목을 몇 개 찾아낸 서펜트는 그것들이 시대에 따라 구분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우린 결론을 내릴 필요도 없었소. 켈레넨스크 자체가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으니.”
사내가 서펜트를 쏘아봤다. 평상시였다면 능글능글한 빛이 담겼을 눈동자엔 경계심과 의혹이 뒤섞여 있었다.
“켈레넨스크에서 마물이 사라진 게 당신들이 벌인 일 때문이라는 건가?”
“그렇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임계점을 넘으면 문이 열리오. 우리는 그 문을 통해서 마물들을 돌려보낼 수 있소.”
“그럼 거기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건? 그 역병도 임계점인지 뭔지 하는 걸 넘기려는 당신들 작품인가? 켈레넨스크가 당신들의 실험장이었다는 거냔 말이다.”
“아니, 사냥꾼. 너무 멀리 가지 마시오. 당신의 눈엔 우리들이 수상쩍어 보일지 몰라도, 우린 우리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오. 켈레넨스크에서의 일은 적절한 시기에 기회를 잡았던 것뿐이오. 그러나 다시 한 번 그 같은 역병이 창궐하길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소. 오로지 켈레넨스크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막대한 수의 동시다발적인 죽음만이 임계점을 넘겨 균열을 만들 수 있소. 그러나 확실히 그보다는 훨씬 커야지.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오.”
서펜트가 앞으로 몸을 숙여 사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가 또렷한 발음으로 천천히 덧붙였다.
“전화(戰火)가 세상을 정화할 것이오. 전쟁의 불길이 이 땅 위의 부정한 모든 것을 태우고 어두운 시대를 끝낼 것이외다.”
“헛소리.”
사내가 그렇게 쏘아붙이자 서펜트는 턱을 치켜들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다면 하나만 물어보겠소. 언제까지 이렇게 버티며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사내는 입을 다물고 턱에 힘을 넣었다. 아직은 화상을 입지 않아 깨끗한 피부 위로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이윽고 그가 답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그때까지는 확실히 버틸 거야.”
“그 다음엔? 현실을 직시하시오, 사냥꾼. 영웅이란 결국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오. 운이 좋다면 당신 같은 초인이 또 나타날 수 있겠지. 군주급 마물들의 목을 제 주머니에서 꺼내듯 하는 초인적인 사냥꾼 말이오. 그러나 대답해보시오. 인류는 지금까지 얼마큼 운이 좋았소? 혹은 —이건 대답하기 더 쉬우리다— 얼마나 불운했소?”
마물이 등장한 이래로 인간의 삶은 불운 같은 단어보다는 차라리 저주가 더 어울릴 법했다. 혈관과 뼛속에 깊이 새겨져 날로 악화되어 가는 몰골에 거울을 들여다보기조차 두려운 저주. 이웃이, 가족이 비참할 정도로 천천히, 그러나 동시에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잠식되고 끝내 자신마저 먹혀드는 빌어먹을 저주였다. 사내가 말했다.
“확실히 행운은 우리의 것이 아니지. 하지만 우리는 애초에 행운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어. 시대가 우리를 불렀다. 우리 사냥꾼들은 시대의 부름에 답한 거야. 전쟁의 불길이 필요하다고 했나? 아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들 몸을 사를 의지의 불길이야.”
“의지는 아름답고, 그것이 끝내 불가능의 장벽 앞에 스러져 무위로 돌아간대도 숭고함만은 남는 법이라는 것이지. 나도 아오. 문제는 무엇에의 의지냐는 거요. 결연하고 비장한 의지도 그 방향이 낭떠러지를 향한다면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동반 자살에 그칠 뿐이오. 나는 그보다는 계단으로 당신들을 인도하려는 거요. 켈레넨스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물이 일소된, 그래서 우리들 자신과 그 자식들에게까지도 미래가 약속된 낙원으로 향하는 계단 말이오.”
서펜트의 말에 사내가 웃음을 흘렸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이 하나 있지. 더 많은 보상을 약속하는 사람일수록 더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하물며 인류의 미래를 약속하는 사람이야.”
“내가 당신에게 권하는 건 종교가 아니오. 실패할 가능성이 다분한 계획에 동참해주기를 요청하는 것이지. 그러니 의심해도 좋소. 그러나 사냥꾼, 이 세상에서 확실한 건 죽음뿐이오. 시체만큼 정직한 이도 드물지. 그러니 확실한 것을 원한다면 당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닐 거요.”
“확실한 건 죽음뿐이다··· 그거 마음에 드는걸. 그런데 내가 이 대화에 제대로 집중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 아직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왜’ 필요한 거지? 그리고 또, 왜 ‘내가’ 필요한 거지?”
마지막 두 문장에서 발음의 강세를 각기 다르게 두며 사내가 물었다.
“노블 다이스를 잡아야 하오. 그들은 우리의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소.”
“세계를 정화한다는 당신들의 계획이 사실이라면 물론 그렇겠지.”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시오? 그들 스스로가 설명하는 자신들의 존재 이유 말이오.”
“그야 당연히 이 땅에서 인류를 몰아내고 마물들의 낙원, 아니 내 입장에서는 복마전이라고 불러야겠지, 바로 그 복마전을 개원하는 것 아닌가?”
사내의 순진한 발상에 기가 질린다는 듯 서펜트가 눈을 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윽고 뜬 눈에는 엄숙하면서도 차가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항구적인 투쟁이오. 뼈로 칼을 갈고 피로 그 쇳가루를 씻어내는 것. 싸우고, 계속 싸워서, 가능하다면 영원히 싸우는 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일이오. 당신들 사냥단이 강력해지면 그들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전투의 흥분으로 몸을 떨 거요.”
“그게 도대체 무슨······?”
“왜 하필 당신이 필요하냐고 물었소이까? 그것도 대답해드리지. 그건 막심 에카르트, 당신이 교단에서 가장 강력한 사냥꾼인 동시에 유연한 사고가 가능한 인물이기 때문이오. 케넌 안드로스? 그자는 전투 실력보다 통솔력으로 단장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지. 마르셀 바스케즈? 실력은 안드로스보다 나을지 몰라도 지나치게 꽉 막힌 인물이오. 다모크 자한? 그자의 목줄은 다른 이가 쥐고 있소. 나는 그자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럽소이다.”
사내, 막심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서펜트가 말을 이었다.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하오. 당신의 능력을, 이 전쟁을 영구적으로 끝내는 데에 써주기를 바라오. 아니, 부탁드리오.”
막심은 입으로 들이켠 숨을 코로 길게 내뿜었다. 그는 버릇처럼 숱이 줄어드는 앞머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가 다시 턱을 덮은 짧은 수염을 쓸었다.
“그래, 좋아. 만약에 말이지. 만약에 내가 당신들에게 협력한다는 가정 하에서 날 어떻게 이용할 셈이지? 노블 다이스를 죽이는 것? 그건 이렇게 나를 찾아와 부탁씩이나 하지 않아도 어차피 내가 하든, 내가 아닌 다른 사냥꾼이 하든 누군가 맡게 될 일이었어.”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해드리지. 우선 당신은 남부의 일로 파견될 것이오. 그리고 동부 국경에는 마일스아이렌의 남은 두 사냥꾼이 파견될 테고.”
막심이 손사래를 치며 서펜트의 말을 막았다.
“잠깐만, 남부야 뻔질나게 불려가는 곳이니 그렇다 치고. 동부 국경에는 무엇 때문에?”
“제국과 공화국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짐에 따라 전쟁의 발발은 명약관화한 일이오. 전쟁터의 시체와 거기에 홀린 마물들의 출현은 당신들의 단장을 염려케 할 것이고.”
“잠깐.”
막심이 또 다시 손을 들어 서펜트를 제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지 그는 잠시 책상을 내려다보며 입으로는 소리를 낮춰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막심은 곧 중얼거리던 목소리를 키워 혼잣말을 질문으로 바꾸었다.
“당신들의 계획··· 당신들의 계획에 전쟁이 필요하단 사실과, 운 좋게도 전쟁이 곧 벌어질 거라는 사실이 정말로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뿐인 건가?”
서펜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 번. 너무 멀리 가지 마시오, 사냥꾼. 우리는 기회를 활용할 뿐이오.”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주문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막심은 서펜트가 다모크에 대해 얘기하면서 사용했던 목줄이라는 단어가 겹쳐 들리면서 묘한 인상을 자아내는 것을 느꼈다. 서펜트가 말을 이었다.
“모종의 사건으로 안드로스 단장은 그들 두 명의 사냥꾼을 의심하게 될 거요. 막심 당신이 남부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단장은 의심스러운 두 사냥꾼 대신 당신을 그웬돌라드로 보낼 거요. 거기서 늑대사냥개, 이븐 베르자크와 합류하시오.”
“이봐,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그리고 당신들이 케넌을 포섭하지 않았다는 말, 그거 확실한가?”
막심이 지적한 것은 서펜트가 케넌을 변수 아닌 상수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당연하게도 케넌에 대한 막심의 의심으로 이어졌다.
“안드로스 단장은 심지가 곧고 모든 일을 원칙대로 처리하는 인물이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정직해서 예측하기가 쉽지.”
“언제는 확실한 건 죽음뿐이라더니.”
“알겠소. 정정하지. 안드로스 단장의 일과보다 확실한 건 죽음뿐이오.”
서펜트에게서 의외의 유머 감각을 발견한 막심이 피식 웃었다. 그는 대꾸 없이 서펜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도 점차 이 수상쩍은 인물의 ‘계획’이라는 것에 흥미가 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블 다이스는 이미 움직였소. 그들은 우리의 목을 노리는 암살자를 키우는 중이고 필연적으로 늑대사냥개에게도 관심을 보일 거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자는 특이하니까.”
“그래서 베르자크와 합류한 뒤 그자에게 접근한 노블 다이스를 죽여라? 그게 끝인가? 그럼 당신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문’을 열 테고 마물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돌려보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를 찾아와서 당신들의 계획에 대해 이렇게 늘어놓는 이유가 뭐지? 모든 일은 당신들의 잘난 계획대로 진행될 텐데 말이지.”
서펜트가 다시 한 번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어느새 깎아지른 절벽 같은 콧대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온 안경이 코끝에 걸려 있었다. 주홍색의 눈동자로는 막심을 쏘아보며 서펜트가 힘주어 천천히 말했다.
“아니, 하나 더 있소. 노블 다이스를 죽이되······”
서펜트의 다음 말에 막심은 자신도 깨닫지 못한 사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공작은 죽이지 마시오.”
*Edguy의 〈We Don’t Need a Hero〉에서 따옴.
- 작가의말
3장이 이븐과 스타샤의 합동 공연이었다면 4장은 막심의 독무대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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