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 4장 - 영웅은 필요 없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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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너도 모른다고 할 셈인가?”
잘라낸 머리통을 남자의 허벅지 사이에 내려놓으며 막심이 말했다. 무릎 아래가 잘려나간 남자의 하반신이 오물과 핏물에 젖었다. 고통과 수치와 분노가 한데 뒤섞여 남자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몰라, 모른다고! 하지만 알아낼 방법이 있어!”
“그래? 그럼 빨리 말하는 게 좋겠는걸. 네 친구는 너무 느려서 말이야.”
막심이 남자의 가랑이 앞에 놓인 머리통을 손끝으로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잘려나간 팔과 다리에 말뚝이 박히고도 살아있는 남자보다, 한쪽 얼굴이 뭉개진 채로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막심이 더 괴물처럼 보였다. 막심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의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류였다.
“명령을 전달하는··· 그런 중간 관리직이 있어. 내가 선이 닿는 자를 알고 있어. 그자로부터 거꾸로 추적해 들어가면 노블 다이스에게도 말을 전할 수 있을 거야.”
남자의 앞에 쭈그려 앉은 막심은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허공으로 던진 단도를 다시 받아 쥔 막심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남자의 입 안에 단도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남자는 영문을 모른 채로 단도에 베이지 않게 혀를 움직이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물어.”
휘둥그레진 남자의 눈이 단도와 막심의 얼굴을 불안하게 번갈아 살폈다. 막심은 이를 악무는 시늉을 해보이며 남자를 재촉했다.
“이로 꽉 물라고.”
남자의 이가 단도와 부딪혀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소리가 잦아들자 막심은 힘주어 단도를 바깥으로 밀었다. 찢어진 남자의 볼에서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이어진 비명은 젖은 천을 입안 가득 물고 있는 사람의 것처럼 들렸다.
“나는 우리 대화가 조금 더 실용적이었으면 좋겠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중간 관리직이니 선이 닿는다느니 하는 따위의 추상적인 말은 피하라는 거야. 이름은 뭐고,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한 번에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으라고. 내가 더 질문할 필요가 없게 하란 말이야.”
벌린 입으로부터 걸쭉한 피를 흘리며 남자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찢어졌던 그의 뺨은 천천히 아물어 붙었다. 마물을 고문하는 일은,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재생이라는 믿는 구석의 존재로 상쇄된다는 점에서 그 실효성이 의심 받았으나 막심은 오히려 이를 활용할 줄 알았다.
막심은 이번에는 남자의 입에 손을 밀어 넣어 아물어 가던 뺨을 다시 찢었다. 남자가 고통으로 몸을 뒤틀었다. 남자의 옷깃에 피를 닦은 막심은 그의 턱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했다. 탈력한 남자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프하··· 프하뉸, 프하뉴네서 아베리클 차자······.”
“파하넨에서 아베릭을 찾으라고?”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붙잡힌 턱을 몇 번 움직여 보였다. 입안의 피를 삼킨 그는 이제 분명해진 발음으로 다시 말했다.
“아베릭, 알베릭! 알베릭을 찾아서 보고할 게 있다고 해. 덩치가 크고 곰같이 생긴 남자야. 취한 사냥꾼이라는 술집에 가서 이름을 말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럼 노블 다이스가 온다는 건가? 그렇게 쉽게?”
막심은 잡았던 남자의 턱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머리 없는 시체 옆에 놓여 있던 의자를 질질 끌며 다시 남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등받이를 앞으로 향하도록 놓았다. 등받이에 팔을 괸 채로 앉은 막심이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몰라. 나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어. 그냥 명령이 있을 때 전달만 받았다고.”
“예를 들면?”
남자의 얼굴 위로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 떠오르자 막심이 부드러운 어조로 부연했다.
“예를 들면 어떤 명령이었느냐는 거야.”
“어, 어느 지역에서는 인간들을 그만 죽여라, 어떤 도시에 사냥꾼이 있으니 알짱거리지 마라, 그런 명령들이었어. 또 어떨 때는 인간을 잡으면 먹지 말고 감염시켜서 수를 불리라고 하기도 했어.”
남자의 말에 막심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나면? 너희들은 그 명령에 따르나?”
“따르는 놈들도 있고 제멋대로 하는 놈들도 있어. 대부분 명령에 따라 행동해. 그러니까 나처럼 이성이 있고, 쾌락과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이 있는 인간적인···”
막심이 집어치우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하는 남자의 의도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었다.
“따르지 않으면? 보복이 있나?”
“나도 들은 거라 잘 몰라. 명령을 어기면 처형당한다고 들었어.”
“고작 처형으로 체계와 기강이 유지된다는 건가? 너희들은 그보다는 훨씬 통제하기 어려운 족속들일 텐데.”
부족한 설명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의미로 막심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도를 움켜쥐자 남자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노블 다이스는 왕들의 왕이야! 군주들을 통솔하는 군주라고. 자기들만의 영역을 가지고 권속을 부리는 군주에게 노블 다이스가 명령을 하달하면, 그들은 명령에 따라 자신의 영역 안에서 질서를 유지해. 영역에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잔챙이들의 경우엔 노블 다이스가 직접 손을 봐. 아까 말한 주, 중간 관리직이 그래서 필요한 거고.”
남자의 말에서 새로이 얻을 만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마물들 사이에서 노블 다이스의 위상은 사냥단이 파악하고 있는 바와 일치했기에, 막심의 관심은 예의 중간 관리직에 집중되었다.
“그럼 그 중간 관리직을 죽이거나, 해코지하면 노블 다이스가 찾아오겠군. 처형을 위해서 말이지.”
“아, 아마 그럴 거야. 자작이 죽은 뒤로 이런 문제에 대해 더 예민해졌다고 들었어.”
막심은 의자를 중심으로 천천히 맴돌며 단도의 넓은 면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그의 질문이 더 이어지지 않자 남자는 불안해졌는지 필사적으로 자신의 유용성을 웅변했다.
“내가 도울 수 있어! 내가 알베릭을 찾아서 죽일게!”
“아냐, 넌 다른 걸 도와줘야 해.”
막심의 말에 조금은 안심된 표정으로, 동시에 전보다 더욱 비굴해진 표정으로 남자가 물었다.
“내, 내가 뭘 도와주면 되지?”
“그냥 거기 가만히 앉아 있으면 돼. 이게 통할지 아직 확신이 없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막심은 불이 붙어 있는 화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주머니에서 쇳덩이를 꺼내 화로 위에 던져 넣고 그것이 녹기를 기다렸다. 금속이 녹는 양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막심의 태도에서 불안감을 느낀 남자는 천천히, 그리고 어쩔 도리 없이 뒤늦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아냐, 더 설명해줄 게 있어! 아직 당신이 모르는 게 많다고!”
막심이 피 묻은 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쇠그릇을 집게로 집으며 낭송하듯이 말했다.
“말을 줄이고 몸으로 답하라. 말은 유령처럼 흩어지되 몸짓은 바람을 일으키고 땅 위에서 생동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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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인은 지팡이를 까딱이며 그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몇 번 두들겼다. 늙은 사냥꾼은 턱을 안으로 당겨 숙인 채 눈만 위로 들어 마주앉은 여자를 쏘아봤다. 웨인의 청회색 눈동자엔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한순간 얼어붙게 만드는 섬찟함이 있었다.
“다른 말은 없었소? 알아볼 것이 있다고··· 그것뿐이오?”
“일이 끝나면 체스바덴 간다고, 아니 온다고 얘기했다. 무엇을 알아볼 것인지, 얘기하지 않았다.”
올가는 하임벤어를 모국어로 하는 화자가 아닌 것치고 비교적 정확하게 말했지만 여전히 부자연스러웠으므로 웨인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그녀의 말을 차분히 끝까지 들어야 했다. 간호사가 올가의 목 언저리를 두른 붕대를 매듭지으며 치료를 끝내자 그녀는 다시 목깃을 여몄다. 웨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친구가 무슨 일을 저지르긴 할 모양이구먼.”
“그런데 백작의 태도 이상했다. 그 사냥꾼이 누군가와 연결되었다고 말해서 생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쪽 눈썹을 추켜올린 채로 잠시 머리를 갸웃거리던 웨인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어 서있던 건장한 남자에게 물었다.
“베른트, 자네 베소니아어 좀 할 줄 아는가?”
“예? 베소니아어요? 웬걸요, 저는 하임벤어도 잘 못 씁니다.”
“자네 글 읽을 줄 안다고 하지 않았나?”
“읽는 건 잘하는데 쓰는 건 아직 좀······.”
멋쩍은 듯이 씩 웃는 베른트를 다시 뒤로 한 채 웨인은 좀 전에 올가가 했던 말의 뜻을 캐물었다.
“연결되었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연결 아니고······. 결···탁···. 결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살려서 가져간다고 그랬다.”
단어는 보다 정확해졌으나 여전히 의미는 불명이었다. 웨인은 피곤한 듯 엄지와 검지를 세워 눈 사이를 눌렀다. 이 주어진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베른트가 얼른 끼어들었다.
“결탁이라면, 막심이라는 사냥꾼이 첩자 노릇을 한다는 건가요?”
“말조심하게, 병아리.”
“죄송합니다.”
웨인이 날선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베른트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웨인은 덜떨어진 제자와 말씨름을 하는 대신 올가에게서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는 데에 집중했다.
“누구와 결탁했다는 거요? 백작이라는 자가 거기에 대해서도 말했소?”
“그렇지 않다. ‘그 자식들’이라고만 했다.”
올가의 말에 베른트가 다시 한 번 끼어들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튕기는 동작까지 추가되었다.
“경쟁 세력이군요. 단장님께서 말씀하셨던.”
웨인이 눈을 감고 콧김을 내뿜었다.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지 못한 베른트가 의아해져서 올가와 웨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올가가 사냥단의 일원이 아니며, 외부인에게 중요한 정보를 발설한 꼴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은 적게 하고 생각을 많이 하게, 베른트 슈나이더.”
“명심하겠습니다, 웨인······ 어, 헬라이드···.”
성과 이름을 함께 부른 데 담긴 경고의 의미를 읽지 못한 베른트가 순진하게 따라 말했다. 웨인과 베른트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지켜본 올가는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분위기는 파악했는지 조금 엉뚱한 주제를 꺼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이 완전한 외부인은 아님을 알리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에이델 그란트에게서 사냥 배웠었다. 수습으로. 죽고 나서 사냥단 나왔고, 용병으로 지냈다.”
“에이델은 훌륭한 사냥꾼이었지. 그에게서 뭘 배웠소?”
그로서는 이례적으로, 웨인의 차가운 두 눈동자가 감회에 잠겼다. 에이델 그란트. 피에르벤 지역의 사냥꾼. 오펜하른에서 테니아의 부름에 응답했던 다섯 사냥꾼 중 하나. 그 중 셋은 죽었고, 하나는 미쳤다. 죽은 셋 가운데 한 명은 웨인 그 자신의 손으로 끝을 냈었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죄과였던 것처럼.
짧은 침묵을 끝내며 올가가 말했다.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 몸의 안전과 목숨을 포기하고서라도, 죽어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웨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탁상 위에 올려두었던 보울러햇에 손을 얹으며 일어날 채비를 했다.
“그렇다면 잘못 배웠소.”
자리에서 일어난 웨인이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몸을 돌렸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웨인의 뒤를 베른트가 따랐다. 웨인이 예고도 없이 우뚝 멈춰 서자 베른트가 황급히 걸음을 멈추며 충돌을 피했다. 이윽고 그가 뇌까린 혼잣말은 올가에게도 확실히 들렸다.
“하지만 우린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인간들이니까.”
닫힌 문 뒤에서 베른트가 새로운 제자를 받아들일 양이라면 바로 자신이 사냥 비법을 전수할 적임자라며 호언장담하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이어진, 지팡이로 무언가를 후려치는 소리에 끊겼다.
- 작가의말
“젖은 천을 입안 가득 물고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은 누군가 오지 오스본의 창법을 묘사하면서 사용했던 말인데, 마음에 들어 기억해뒀다가 글에 옮겨봅니다.
마지막 장면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분명치 않은 듯하여 고쳤습니다. - 2020.2.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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