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 4장 - 영웅은 필요 없다(3)
선술집 이름이 으레 그렇듯 취한 사냥꾼은 엉뚱한 작명이었다. 취한 사냥꾼에 취한 이는 많았지만 사냥꾼은 한 명뿐이었고, 유일의 사냥꾼 막심은 술을 마시지 않아 취할 일도 없었다. 선술집 안은 술기운으로 얼큰히 덥혀진 입김이 환기되지 않아 탁하게 자욱했고, 목조 건물 곳곳에는 눅진한 담뱃진이 배어 있었다. 막심은 긴 스탠드에 다가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문하고 앉았다.
“알베릭?”
남자는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을 멈칫했다가 얼른 입안에 털어 넣고 소매로 입을 훔쳤다. 일전에 들은 대로 정말로 곰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스탠드에 앞발을 올려놓고 막심 쪽을 향해 육중한 몸을 기울였다.
“그러는 당신은?”
“막시무스.”
알베릭이 덥수룩한 턱수염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 긁었다.
“세젠치아 출신인가? 그보다도 처음 보는 얼굴인데.”
“닐스가 당신한테 가보라던데. 이쪽 세계에 발을 들이면 따라야 할 규칙들이 있는데 당신이 그걸 알려준다더군. 숲으로 이끄는 풀벌레 소리같이, 돛을 불리는 바람같이.”
막심이 노래하듯 쾌활하게 말했다. 알베릭은 별로 감명 받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에 쥔 맥주잔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여기 맥주는 좀 신맛이 난단 말이지.”
막심의 표정을 힐끗 살핀 알베릭은 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자네는 뭔가? 그러니까, 어떤 종류냔 말이야.”
막심은 대답 대신 목을 길게 빼고 아우- 하며 늑대 울음소리를 흉내 내었다. 막심의 돌발 행동에 선술집은 갑작스러운 정적을 맞았다. 그러나 곧 여기저기서 취객들이 그의 울음소리를 따라하며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알베릭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됐어. 좋다고. 첫 번째 규칙은 이목을 끌지 말라는 거야. 알아들었나?”
“아, 확실히 알아들었어.”
“그럼 자리를 좀 옮기자고.”
알베릭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스탠드를 손마디 뼈로 두드렸다. 심드렁한 얼굴을 한 바텐더가 다가와 알베릭의 말을 기다렸다.
“맥주 한 잔 더. 그리고 요나손한테 창고에 쥐가 들었으니 가서 좀 살펴보라고 전해주게.”
“물도 한 잔.”
이윽고 둘은 바텐더가 내온 것을 받아들고 선술집의 구석진 자리를 향해 갔다. 막심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정어리 요리를 슬쩍 본 알베릭이 말했다.
“진짜 세젠치아 출신인 모양이군. 거긴 정어리 요리가 유명하지, 아마?”
“그렇게 알려져 있긴 하지. 페카 해협과 페르카 해(海)를 헷갈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야. 정어리는 그보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야 잡힌단 말씀이지. 세젠치아에 가본 적 없는 이들이나 막연히 정어리가 잘 잡히겠거니 하는 거지.”
알베릭은 흥미롭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 그냥 한번 떠본 거야.”
“그래, 그런 것 같아서 하는 얘기야.”
입안에 넣은 정어리를 우물거리며 막심이 대꾸했다. 알베릭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자신의 행동을 변호했다.
“기분 나빴대도 어쩔 수 없어. 사냥꾼 놈들이 점점 더 교활해지고 있거든.”
“교활하기로 치자면 용병도 빠질 수 없지. 그놈들이야말로 돈을 위해서는 뭐든 하는 놈들이니까.”
막심의 말에 알베릭은 제법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동안 막심이 음식을 해치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알베릭이 대뜸 물었다.
“얼마나 됐나? 그렇게 된 거 말이야.”
“이건 이틀 전이고···”
막심은 먼저 자신의 왼뺨을 가리켜 보이고 다음에는 온몸을 가리켜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건 보름 전이지.”
“그럼 뭐 아는 게 하나도 없겠군.”
“그런 셈이지. 오죽했으면 닐스 그 친구도 당신을 찾아가라고 했겠어.”
“보통은 이런 식으로 진행하지 않는데, 직접 찾아왔으니 예외로 해주지. 그 전에 자네도 나한테 몇 가지 알려줘야 할 것들이 있어.”
얼마든지 물어보라는 뜻으로 막심이 양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알베릭은 주변을 한 번 살핀 다음 몸을 앞으로 숙이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둥지를 틀 수 있나?”
“뭐? 권속을 만들 수 있느냔 거야?”
막심의 반문에 알베릭은 김이 빠졌다는 듯 몸을 뒤로 물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 참, 닐스 그 자식 그거······.”
“그 뜻이었다면 아직 내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수밖에 없겠는걸.”
“이봐, 닐스가 자넬 나한테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아.”
막심은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태연히 물었다.
“그래? 그 이유란 게 뭔데?”
“닐스는 반신반의한 거야. 자네가 정말로 우리들 중 하난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 사냥꾼이나 용병인지 감이 서질 않은 거야. 그래서 나한테 보내서 맞으면 알아서 가르치고, 아니면 아닌 대로 처리하라는 심산이었던 거지.”
막심은 빈 접시를 앞으로 밀고 오른손으로는 외투를 조금 젖혔다. 테이블 아래에 둔 오른손으로 단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막심이 천천히 물었다.
“그래서 알베릭 당신이 내린 결론은?”
“지갑을 꺼내.”
“뭐?”
알베릭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막심이 의아해 하자 알베릭이 조금 짜증을 담아 말을 반복했다.
“지갑을 꺼내라고.”
막심이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자 알베릭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는 건네받은 지갑을 열어 안을 유심히 살핀 뒤 다시 막심에게 돌려주었다.
“좋아. 은화가 없군. 그걸로 됐어.”
“정말 그걸로 된 거야?”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면 감이란 게 생기거든. 내가 볼 때 자네는 그냥 어리숙한 신출내기에 불과한 것 같아. 기분 나쁘게 듣지 말라고. 누구든 이렇게 변하고 나면 어리둥절할 테니까.”
막심은 아랫입술을 앞으로 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장난기가 동한 사람처럼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알베릭, 내가 만약 작정하고 당신에게 접근한 사냥꾼이라면 사전에 지갑에도 조치를 취해두지 않았을까?”
“정말 그렇군.”
허를 찔렸다는 듯 알베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곧 제법 기발한 반론이 생각났는지 찌푸린 얼굴을 펴며 말했다.
“하지만 그걸 자네 입으로 말한 시점에서 자네가 사냥꾼이 아니란 걸 증명한 셈이 된 거지.”
“듣고 보니 그러네.”
이번에는 막심이 생각지 못한 사실을 지적 받았단 것처럼 놀라움을 표했다. 알베릭은 다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봐, 막시··· 막시무스라고 했나? 그래, 막시무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자네한테 스승님을 하나 붙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자네처럼, 아우- 하는 부류지. 자네도 알다시피 잔베르에서 그 일이 있고 나서, 북부에서는 늑··· 아우- 하는 소릴 듣기 여간 어려워진 게 아니잖나? 그러니 좋은 기회야, 이건. 배울 수 있는 게 많을 거라고.”
“이렇게 친절할 데가.”
막심이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알베릭은 정말로 잘되었다는 듯 소위 좋은 기회를 얻게 된 막심보다 더 들떠서 말했다.
“그러니 여길 나가세. 마침 그자도 이 근처에 사니 운이 좋으면 오늘 중으로 만날 수 있을 거야.”
“시간이 늦었는데 괜찮겠나?”
막심의 말에 알베릭은 그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것처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막심이 얼른 덧붙였다.
“참, 우리한텐 밤이 낮이지. 내가 아직 인간이던 시절을 덜 잊어서 그래.”
*
“정말 여기 사는 게 맞나?”
막심이 창고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는 상자 위에 쌓인 먼지를 손끝으로 쓸어보며 이곳이 창고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막심의 뒤에서 쥐 죽어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이제 내부의 조명은 조그만 창으로부터 쏟아진 달빛밖에 남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겠나.”
막심을 향해 몸을 돌린 알베릭의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났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요 쥐새끼 같은 작자야.”
창고에 숨어 있던 이들이 천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뒤에서 둘, 옆에서 하나, 그리고 또 앞에 하나. 적은 알베릭까지 도합 넷이었다. 막심은 외투를 젖혀 갈고리칼을 꺼내들었다. 그는 손잡이를 축으로 갈고리칼을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여유롭게 말했다.
“역시 그게 신호였군. 창고에 쥐가 들었다고 한 거 말이야.”
“알면서 따라왔다는 건가?”
더 이상 적개심을 숨기지 않으며 알베릭이 물었다. 막심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자신의 추론을 이어갔다.
“근데 궁금한 건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았느냔 거야. 어디서 탄로 난 거지? 내 얼굴을 알고 있나? 그웬돌라드에 알려질 만큼 유명하지는 않을 텐데.”
“네가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귄지 내가 알 게 뭐야. 아니, 천천히 알아가 보는 시간을 갖자고. 난 사람을 정직하게 만드는 방법을 꽤 많이 알고 있거든.”
“그건 나도 그런데. 그래, 당신도, 나도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던 거야.”
막심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뒤에서 달려든 마물은 아귀였다. 막심은 제자리에서 왼발을 축으로 돌면서, 도약한 아귀의 배를 찍어 바닥에 메다꽂았다. 그가 아귀에게 후속 공격을 감행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옆에서 들쥐인간이 뛰어들었다.
막심은 아귀의 복부에 꽂아 넣은 갈고리칼을 뽑아내는 동작을 다음 공격으로 활용했다. 칼날로 들쥐인간의 목을 베며 밀쳐내자 갈고리에 걸려 뽑혀 나온 내장이 넘어진 들쥐인간 위로 후드득 쏟아졌다. 막심은 재빨리 뽑아낸 단검의 꽁무니를 옆구리에 대고 그어 불을 붙였다. 뒤이어 던진 단검이 내장을 파고들어 들쥐인간에게 꽂히며 폭발했다.
들쥐인간의 피와 살점, 그리고 아귀의 내장이 마치 폭죽처럼 터졌다가 걸쭉한 비가 되어 쏟아졌다. 그 살벌한 광경에 기가 질린 듯 막심의 뒤를 노리던 마물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물러나는 마물에게로 막심이 갈고리칼로 상자를 찍어 날렸다. 옆구리로부터 손목까지 이어지는 피막 같은 날개를 펼치며 허공으로 날았던 유귀(鸓鬼)(*)는 상자에 가슴팍을 얻어맞고 휘청거렸다.
“맥주 맛이었군!”
뜻 모를 소리를 외치며 막심은 유귀에게 달려들어 갈고리칼로 가랑이를 찍어 땅으로 끌어내렸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유귀는 팔을 들어 손톱으로 막심을 할퀴려 들었다. 그러나 막심은 불붙인 단검 세 개를 몸 곳곳에 꽂아 넣고 이미 물러난 뒤였다. 연이은 폭발 속에서 마물이 잘 다져진 고기로 화했다. 막심이 뒤를 돌아 알베릭과 마주 서며 말했다.
“신맛이 난다고 했던 거 말이야.”
세 마리 마물이 무참히 죽어나가는 꼴을 넋이 나간 듯 지켜보고 있던 알베릭이 그제야 정신이 든 것처럼 말했다. 태도는 훨씬 유순해져 있었다.
“그래······. 맞아. 그렇게 말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느냐면···”
“아니, 됐어.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막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깨에 걸려있던, 누구의 것인지 모를 내장을 털고 알베릭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피를 뒤집어 쓴 사냥꾼이 씩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는 말라고. 너는 살려줄 테니. 살아서 노블 다이스 놈들을 내 앞에 데리고 와야지.”
*날다람쥐를 연상시키는 외양에 비행 능력을 갖추고 있는 마물. 길고 날카로운 손톱에서는 독성을 띤 체액을 뿜어낸다. 무리 지어 사람을 공격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현존하는 유귀는 대체로 감염되어 발생한 것들이다.
- 작가의말
9막과 막간극3의 연재가 끝나는 9월 초쯤 휴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글 쓰는 일과 제 생활이 양립이 되질 않고 있는데, 휴재를 통해 시간을 갖고 둘을 잘 화해시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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