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 4장 - 영웅은 필요 없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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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가 말을 타고 도착한 곳은 소위 유령 마을이었다. 마을이 유령화 되는 데엔 여러 연유가 있었으나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마물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규모가 작아 쉬운 먹잇감이 되는 마을은 예방책으로서 제국이 주민들의 이주를 강제했고, 제법 규모가 있는 곳도 대대적인 습격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나면 사람들은 서둘러 떠났다.
군복을 입은 남자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그리고 광대 분장을 한 남자가 경박하게 말에서 내렸다. 마을의 흙길 가운데 쌓인 잿더미는 이 유령 마을의 유형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습격이 있었고, 잿더미의 크기는 그 규모를 짐작게 했다. 길을 중심으로 양편에 늘어선 집들은 문마다 쇠지렛대로 따낸 흔적이 남아 마물뿐 아니라 인간의 약탈이 거기에 더해졌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잿더미 너머, 길가 집의 계단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번에는 부리나케 달아나더니, 용케 맞서 싸울 용기가 생긴 모양이야, 족제비.”
“넌 아직도 사냥꾼들을 잘 모르는군, 쿼그마이어.”
막심의 뒤로 지는 해가 꺼지기 전의 촛불과 같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지평선 아래로 끌어내려지는 데 대한 최후의 저항처럼, 해는 그의 종말을 앞당기는 구름에 온통 피 칠갑을 해댔다. 막심에게는 그것이 샛노란 눈동자를 가진 거인의 불길한 주시처럼 느껴졌다.
“사냥꾼들은 용기 따위로 일을 벌이지 않아. 오로지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정말로 그런가? 아니면 단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인가? 사냥꾼들이야 늘 그렇게 말하지. 자신들을 움직이는 건 증오도, 분노도, 그 어떤 비이성적인 감정도 아닌 합리일 뿐이라고. 자신들은 오로지 마물의 제거라는 목적을 위해 설계된 기계라고들 강변하지. 하지만 자기가 요조숙녀라고 떠들고 다니는 여자가 정말로 정숙한 여자일까?”(*)
쿼그마이어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른손으로부터 폭이 넓은 칼을 꺼내들었다. 액체 상태로 변이한 팔이 길어지고, 길어졌던 부위가 점차 형상을 갖추는 식이었다. 그는 연달아 만들어낸 세 자루의 칼을 옆에 서 있던 아메나이타에게 차례로 던져주었다.
“그네들도 내가 임부의 배를 뚫어 가장 연하고 달콤한 태아를 먹어치우는 광경을 보면,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친구와 가족과 연인의 머리를 집어삼키고는 목 없는 시체를 던져주면, 합리의 무장을 해제하고 보통의 인간으로 돌아가더군.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또 어떻게 변하던지! 넌 모든 사냥꾼들이 고귀한 죽음을 맞는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들은 울고, 오줌을 지리고, 바닥에서 기며 목숨을 구걸한다. 원한다면 이름을 읊어줄 수도 있어. 시해자라고 했나, 막심 에카르트? 그렇다면 나는 사냥꾼을 사냥하는 자다.”
“이븐이 그러던데. 카일로파드가 죽을 때 목숨을 구걸하더라고. 품격에 대해서라면 나 역시 해줄 수 있는 얘기들이 많지. 그러나 우리 그 주제는 조금 뒤로 미뤄두기로 할까.”
막심은 갈고리칼을 쥔 채로 오른손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는 아메나이타가 받아든 세 자루의 칼로 저글링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서펜트, 그자의 목적이 뭐지?”
“역시 그 인간이었군. 그 뱀 같은 작자가 뭘 약속하던가? 자신과 함께 세상을 구하자고 하던가? 이것 하나만 알고 있으라고. 그자는 우리에게도 찾아왔었다. 그때는 마물로 세상을 뒤덮어야 한다고 하더군.”
막심은 쿼그마이어의 말을 들으며 대화가 끝나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자세를 낮추고 왼손으로는 품 안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켈레넨스크에서 문을 열었던 게 공작이었군. 너희들은 서펜트에게 속았고.”
막심의 말에 쿼그마이어의 얼굴이 일순 분노로 일그러졌다가 점차 냉소로 변했다.
“이 전투가 끝나면 서로에게 해줄 말들이 많을 것 같군. 하지만 그 전에 사냥꾼, 네게 스스로가 처해있는 위치를 각인시켜줄 필요가 있겠어.”
쿼그마이어의 말을 신호로, 아메나이타가 달려들었다. 아메나이타가 던진 첫 번째 칼은 막심이 재빨리 들어 올린 갈고리칼에 막혔다. 물론 남작에게도 그런 정직한 공격 따위가 막심에게 통할 거라는 계산은 없었을 터였다. 잿더미를 딛고 도약한 아메나이타가 양손에 든 칼로 막심을 내리쳤다. 막심은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아니, 피했다고 생각했다. 아메나이타가 불러일으킨 환각은 막심의 거리 감각을 상실시켰고, 그의 양 어깨는 허공에서 교차한 칼끝에 베였다. 상처는 얕았으나 이런 공격이 반복된다면 출혈로 죽을 터였다. 막심은 불을 붙일 틈도 없이 재빨리 단검을 던지고 왼손으로 앰풀을 꺼내 자신의 목에 꽂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현기증이 엄습했고 그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뇌를 쥐어짜내는 듯한 고통이었다. 부릅뜬 막심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막심은 눈앞까지 당도한 아메나이타의 턱 아래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내지른 오른손으로 단검의 심지를 비껴 치는 동작이 낭비 없이 깨끗하게 이어졌다.
“캭-!”
아메나이타가 황급히 물러나며 턱에 꽂힌 단검을 빼냈다. 단검은 남작의 손 안에서 폭발했다. 칼을 모두 떨어뜨린 아메나이타를, 막심이 내버려둘 리 만무했다. 막심은 우선 몸을 던져, 액체로 변이해 해일처럼 몰아치는 쿼그마이어를 피했다. 방향은 물론 두 손목이 날아간 아메나이타였다. 그는 몸을 뒤틀어 피하려는 아메나이타에게 갈고리칼을 찍어 끌어당겼다.
그 다음은 해체 작업의 시작이었다. 남작을 뒤에서 안은 모양새로 목을 베어 피를 뿌리고, 겨드랑이 아래를 썰어 힘줄을 끊고, 허리뼈 사이를 찌르고, 무릎의 양 뒤를 깊숙이 자르는 모든 동작이 조금의 지체도 없이, 묘기를 시연하는 것처럼 이루어졌다. 그러나 막심은 단검을 꽂아 넣는 피날레는 미처 시연해 보이지 못했다. 그의 뒤에서 채찍과 같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막심이 땅 위에서 몸을 굴렸다. 산성 용액을 흩뿌리는 쿼그마이어의 공격은 이미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그의 계산은 정확했을 터, 그러나 그의 왼 팔뚝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은 다시 한 번 남작의 환각이 작용했던 때문이었다. 막심은 떨리는 왼손으로 목에 앰풀을 박아 넣었다. 인중을 타고 흘러내린 코피가 입안으로 흘러들어 찝찔한 맛이 느껴졌다.
문질러 닦은 왼팔에서 흐물흐물해진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피부가 벗겨지고 살이 상했으나 뼈와 신경은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단검을 쥔 왼손에는 다행히 힘이 들어갔다. 막심은 이제 눈에 보일 만큼 짙은 환각 가스를 뿜어내는 아메나이타로부터 물러났다. 남작은 상처를 회복하며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중이었다.
“정말로 혼자 상대할 생각이었나? 여기까지 오라고 하기에 난 사냥단이라도 다 불러 모은 줄 알았지. 허섭스레기들만 상대하다 보니 감각을 잃었나, 시해자 막심?”
쿼그마이어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말을 마친 그는 돌연 액체로 변이하더니 빠른 속도로 막심을 향해 쇄도해왔다. 송곳처럼 변이한 팔로 찔러 들어오는 첫 번째 공격을, 막심은 몸을 틀어 피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운이 좋지 못했다.
갈빗대 아래를 녹이는 뜨거운 통증에 막심은 얼른 뒤로 도약했다. 고통으로 자세가 안정되지 못해 흙먼지를 일으키며 볼썽사납게 구른 막심은, 그 순간에도 단검을 던져 쿼그마이어를 맞혔다.
그러나 단검은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쿼그마이어의 몸에 먹혀들었다. 쿼그마이어는 채찍처럼 길게 변이시킨 양팔을 들어 올렸다가 빠르게 내리쳤다. 막심은 옆으로 구르며 인가들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쿼그마이어가 뒤를 따랐다.
“뭘 많이 준비해두긴 한 모양이야.”
왼손으로는 구멍 난 배를 움켜쥔 채 숨을 헐떡이는 막심의 양쪽은 건물로, 그의 뒤는 피륙을 씌워놓은 물건들로 막혀 있었다. 쿼그마이어는 한때는 입구였으나 이제는 막심의 유일한 도주로가 된 길목을 막아선 채로 여유롭게 말했다.
“하지만 이건 예상했나? 난 그 근처로는 안 갈 거야. 그 뒤의 상자들이 좀 수상쩍어 보여야 말이지. 기름이라도 담겨 있나? 이 골목으로 유인해서 나를 불태워 죽일 심산이었겠지.”
막심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리자 쿼그마이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막심이 떨리는 왼손으로 힘겹게 던진 단검이 한참 빗나가 그 옆의 벽을 맞히자 백작의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그러나 곧 폭발 소리에 묻혔다.
쾅-
단검이 꽂힌 곳은 벽이 아니라 벽을 흉내 낸 천이었고, 그 뒤에 막심이 준비해둔 것은 물론 화약통이었다. 철판을 대어 화약통이 쌓인 다른 한쪽을 막아둔 탓에, 폭발은 오롯이 쿼그마이어의 몸을 향해서만 그 위력을 발휘했다.
재빨리 뒤에 쌓인 상자들을 타넘어 폭발을 피한 막심은 곧 그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백작의 상태를 확인했다. 폭발의 여파로 날아가 벽에 처박힌 백작의 온몸은 용암처럼 끓고 있는 중이었다.
“저 개자식을 잡아, 메니! 잡아 죽이라고!”
떨어뜨렸던 칼을 주워들고 뒤늦게 달려온 아메나이타를 향해, 쿼그마이어가 잔해 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팔을 내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아메나이타와 눈이 마주친 막심은 얼른 몸을 돌려 달아났다. 막심은 남작이 쫓아오는 것을 확인하며 그를 위해 준비한 장소로 들어갔다. 그곳은 이층 가옥이었다.
백작을 상대하겠단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지금이야 폭발에 휘말려 잠시 전투 불능의 상태에 빠졌을지라도 쿼그마이어는 곧 몸을 회복시켜 올 것이었다. 그를 상대로 막심은 싸우긴커녕 버텨낼 자신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 사냥은 애초에 아메나이타 남작을 겨냥한 것이었다.
남작이 자신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막심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바닥에 놓인 기름등을 발로 찼다. 집 안 전체에 기름을 뿌려놓은 덕에 불은 삽시간에 번졌다. 아메나이타는 막심의 행동에 당황했다가, 곧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층계를 뛰어 올라갔다.
“컥-!”
부상으로 몸을 휘청거리며 층계를 오르던 막심의 등에 아메나이타가 던진 칼이 박혔다. 왼쪽 견갑골 옆에 박힌 칼이 몸 앞으로 뚫고 나오자, 그의 왼손은 힘없이 수중의 마지막 단검을 떨어뜨렸다. 막심은 아메나이타가 이어 던진 다른 칼을 간신히 피하고 이 층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갈고리칼을 입에 물고 오른손으로 등에 꽂힌 칼을 빼냈다. 뱉어낸 침에 피와 이빨 파편이 섞여 있었다.
“와라, 이 광대 새끼야!”
그답지 않게 냉정과 여유를 잃은 채로 막심이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화재의 열기는 금세 전해져 이 층을 그야말로 지옥의 유황못 같은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 쿼그마이어가 당한 꼴을 봤던 탓인지 아메나이타 역시 어울리지 않게 신중히 접근해 왔다. 짙은 연기 뒤에 있는 것처럼 아메나이타의 모습이 어룽거렸다.
아래층에 놓은 불이 쿼그마이어의 접근을 막는 동안 결판을 내야 했다. 막심은 흘린 피 때문에 감겨오는 두 눈을 어렵사리 치뜨며 오른손으로 늘어진 왼팔을 주머니에 넣었다.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것을 빈틈으로 파악한 것인지 아메나이타가 달려들었다. 막심은 얼른 갈고리칼을 들어 공격을 막았지만 충격으로 넘어져 바닥에서 굴렀다.
몸을 일으킨 그를 향해 아메나이타가 또 한 번 칼을 휘둘러 왔다. 자세는 엉망이었고 검술이라고 부를 만한 기술도 없었지만, 남작은 마물이었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강대한 위력의 충분조건이 되었다. 막심의 갈고리칼은 남작의 공격을 막았지만 받아치진 못하고 비껴 흘리는 데 그쳤다. 미끄러진 남작의 칼이 막심의 옆구리와 골반 사이를 내리쳤다.
칼날이 닿은 곳이 조끼의 주머니 부분이었단 것은, 그리고 그 주머니에 무엇인가 들어있어 타격을 완충시켰단 것은 다행한 사실이었으나, 하필 그것이 각성제였단 것은 불운이었다. 가죽주머니에 담긴 앰풀이 모조리 깨어져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막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제 그는 환각에 무방비한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원문은 마거릿 대처가 한 말로 알려진 "Being powerful is like being a lady. If you have to tell people you are, you aren't(권력을 가지는 것은 숙녀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이 숙녀라고 말해야 한다면, 당신은 숙녀가 아닌 것이다)."
- 작가의말
8막을 이번 주 안으로 마무리 짓고 다음 주부터는 9막을 연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본문에 인용한 대처의 말(출처가 확실하진 않습니다)은 사실 『심연의 사냥꾼들』 세계관에 맞게 각색해보려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그대로 옮겼습니다. 저는 물론 쿼그마이어가 가지고 있는 유의 젠더 인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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