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막 4장 - 영웅은 필요 없다(5)
막심은 충격으로 흐트러진 몸의 균형을 바로 잡으며 물러났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로부터 상황을 파악한 아메나이타는 칼을 휘두르는 공격을 이어가는 대신, 마찬가지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그가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귀 밑까지 찢어진 입을 벌리자, 막심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달려들었다.
촤아악-
그러나 막심의 움직임은 충분히 기민하지 못했다. 그는 아메나이타가 벌린 입으로부터 짙은 보랏빛 연기를 폭포처럼 쏟아내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고 앞으로 내밀었던 몸을 거두어들였다. 자욱한 연기에 지옥 같은 열기가 더해지자 방 안은 순식간에 저주스런 환각 가스로 들어찼다. 막심은 호흡을 참았으나 그것은 물론 지속될 수 없는 임시방편이었고,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막을 수 있는 유의 공격도 아니었다.
가스는 피부에 스며들었다. 십자 형태로 검게 칠한 눈과, 시뻘건 입술을 지닌 허연 얼굴이 허공에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광대의 얼굴은 심지를 돋우지 않은 촛불처럼 불안하게 점멸했고, 그럴 때마다 수가 불어나 있었다. 어느 것이 진짜 얼굴인지 알지 못한 채, 막심은 허공에 대고 갈고리칼을 휘둘렀다.
첫 번째로 베어낸 얼굴에는 칼이 닿는 감각이 있었다. 두 번째도 그랬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그의 감각은 그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오도(誤導)하고 있었다. 밟아 디딜 땅이 꺼진 것처럼,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근본적인 회의는 쉽사리 무력감으로 이어졌다. 칼로 내려친 얼굴은 허공에서 갈라지며 연기로 화하더니 곧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사냥꾼이라면서요! 살릴 수 있다고 했잖아요!”
막심은 사내아이를 베었다. 피를 흩뿌리며 넘어진 아이가, 그가 구하지 못했던 아이의 가족들 시신 위에 쌓였다.
“막스!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하는 거냐?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 감염시켰다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냔 말이다!”
막심은 아버지를 베었다. 흉측하게 변한 그의 여동생이 죽은 아버지를 뜯어 먹었다.
“나와 내 배 속에 있던 아이도 지키지 못했던 당신이 대체 누굴 지킨다고 그러는 거예요?”
막심은 아내를 베었다. 연기,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가웠다.
“우린 결국 죽고 말 거야. 비정한 진실 속에서 개처럼 버르적거리면서······.”
막심은 울부짖으며 검은 머리의 사냥꾼을 베었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환각들을 모조리 베었다. 머리로는 멈춰야 한다는 것을, 이 광기를 잠재우고 실낱같은 이성을 끌어내 현실의 적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를 괴롭히는 모든 악몽들, 숨기려 했던 기억들, 애써 짜낸 농담과 가장한 여유로 덮으려 했던 과거들, 그리고 진실들······. 그러므로 허상은 실체였다.
격통이 옆구리를, 배와 어깨를, 허벅지와 목을 찔렀다. 막심은 자신의 몸을 헤집는 남작의 칼을 어쩔 도리 없이 무방비하게 받아내며 그의 발치에 쌓인 시신들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오래 전에 죽은 자들과 아직 살아있는 자들까지 한데 엉켜 있었다. 예언처럼, 계시처럼 결국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살아나가지 않는다면···!
갈고리칼을 쥔 막심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뒷목을 타고 척추로 뻗치는 절망의 숙주는 내버려 두었다. 절망이, 그로부터 끌어낸 분노가, 세상을 모조리 씹어 삼키고픈 충동이 과열된 그의 심장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어깨가 뜨거운 것이 방 안의 열기 때문인지, 칼에 뚫렸던 부상 때문인지, 지나치게 빨리 뛴 심장이 혈관에 과부하를 일으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환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남작이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막심은 함께 살아가야 했다. 죄인의 삶일지라도, 그는 죽음을 거부할 것이었다. 죽음을 미루는 식으로 계속 살아갈 터였다. 죄로써 더 큰 죄를 씻어내기 위해.
“캬악-!”
아메나이타가 비명과 함께 검붉은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막심은 집요하게 따라붙어 남작을 방의 한 구석으로 밀어냈다. 평소에 비하자면 거칠기 그지없는 동작이었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막심은 남작이 휘두른 칼을 갈고리칼로 걸어 손으로부터 빼앗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는······ 줄을 당겼다.
치이익-
지붕보에 놓여 있던 화로가 뒤집어지며 그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아메나이타에게 쏟아졌다. 은색 액체를 뒤집어 쓴 아메나이타가 미친 듯이 팔을 내둘렀다. 남작은 이제 은으로 깎은 동상 같은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그의 몸에서 살이 타고 썩는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은과 수은을 배합한 아말감은 막심이 남작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크아아- 아아악-!”
방 안을 메웠던 환각 가스는 힘이 절실한 남작에 의해 거두어 들여졌다. 바닥에 대고 구르는 아메나이타를 향해 막심이 다가가 소리를 질렀다.
“서펜트의 목적은 뭐지! 말해!”
“몰라! 메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메나이타는 바닥에서 몸부림치며 자신의 가슴을 뜯고, 얼굴의 가죽을 벗겨내려 헛되이 두 손으로 살갗을 긁었다. 막심이 아메나이타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칼끝이 뜨겁게 달궈진 아말감에 닿아 연기를 뿜었다.
“문을 열어서 대체 뭘 하려는 거야! 그자가 너희들에게는 뭐라고 말했느냐고!”
“인류를 도약시킨다고··· 다음 단계로 도약시킨다고 했어. 그것밖에 몰라! 메니는 아무것도 몰라!”
막심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곧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윽박질렀다.
“그게 무슨 뜻이야! 설명해!”
“남작을 놓아줘. 내가 설명하겠다.”
막심은 아메나이타의 목에 여전히 칼을 댄 채로 고개만 돌려 쿼그마이어를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백작이 어떻게 접근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불길은 이제 이 층의 벽까지 번졌고 바닥은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막심은 점차 호흡이 힘들어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말해.”
백작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아래층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막심의 외투에 담겼던 단검이 모조리 폭발한 것이었다. 귀가 먹먹한 가운데 쿼그마이어의 목소리는 그가 서있는 곳보다 훨씬 멀리서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막심의 얼굴에 점차 경악이 서렸다. 쿼그마이어의 말이 끝나자 막심이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그보다 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우린 놈들과 함께 일했던 적이 있다. 네가 말했던 켈레넨스크가 그 결과지. 네 말대로 놈들은 우릴 속였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뜻대로 된 것도 아닌 모양이더군. 이제 그놈을 놓아줘.”
막심은 곁눈질로 아메나이타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쿼그마이어를 노려보았다.
“비켜.”
쿼그마이어는 순순히 옆으로 비켜섰다. 바닥에 누워 몸을 뒤트는 남작의 움직임이 점차 둔해지고 있었다. 그 꼴을 잠시 지켜보고 있던 막심은 갈고리칼로 화로를 걸어 던졌다.
챙그랑-
막심은 온 힘을 짜내어 깨진 창을 향해 뛰어갔다. 허공에 떠있던 그의 몸은 곧 쌓아올린 짚단 위에 안착했다. 이제는 그 충격마저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몸은 쇠약해져 있었다. 상처를 파고드는 짚들이 바늘처럼 느껴졌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매어두었던 말을 향해 걸어갔다.
아메나이타가 이미 죽었단 사실을 백작이 알아채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
말 위에 엎드린 막심의 몸이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었다. 등자에 걸린 반대쪽 발 때문에 간신히 매달린 모양새로, 그는 현실과 꿈속을 오갔다. 꿈속에서 그는 태어난 적 없는 자신의 아이를 보았다. 어렸을 때의 여동생을 꼭 닮은 여자아이였다. 현실로 돌아온 그는 길게 이어진 황량한 벌판을 보았다. 길이 자꾸만 늘어났다.
엎드린 몸을 들썩이며 입에서 쏟아낸 피가 말의 목을 적셨다. 기침을 하는 데에도 기력이 필요하단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막심이 흐느끼는 것처럼 웃었다. 내장을 밀어 넣고 꿰맨 배의 상처에서도 자꾸만 피가 흘러나왔다. 저 멀리 있는 체스바덴을 보면서 막심은 누군가 마중을 나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에 몸을 맡겼다.
부름에 대한 응답처럼 누군가 그를 향해 오고 있었다. 말을 탄 사내였다. 이븐? 웨인?
사내는 말을 재촉해 빠르게 다가왔다. 이븐도, 웨인도 아니었다. 이윽고 서늘한 쇠붙이의 감각이 막심의 목을 꿰뚫었다. 주황빛이 감도는 뱀 같은 눈동자가 막심의 핏발 선 두 눈과 마주쳤다.
막심은 말에서 떨어졌다.
*
“화약에 철판에 수은까지 얻어다 갔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철판은 화약의 폭발을 어느 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에 쓰였을 거야. 잔베르에서 나도 비슷한 방법을 썼거든. 수은은··· 글쎄, 은과 섞으면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도 녹이기 쉬운 물질이 되지.”
스타샤의 말에 이븐은 자신이 추측한 바를 읊었다. 약속한 여드렛날 밤이 되도록 막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둘은 웨인이 개인적으로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그를 찾아 나서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어느 마을의 대장간과 파하넨 따위를 뒤지고 다녔을 웨인은, 그러나 지친 기색 없이 선두에 서서 이븐과 스타샤를 이끌었다.
“이븐, 저쪽에 있는 게 보이나?”
웨인의 말에 이븐은 눈을 찌푸리고 그가 지목한 방향을 응시했다. 웨인의 말대로 거기엔 무엇인가가 있었다. 밤의 어둠 속에서 안광을 뿜는 이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네 발 달린 짐승이 불안한 걸음으로 서성이는 모습이었다.
“말(馬)입니다. 그 뒤에··· 저건···!”
이븐이 말의 배를 연달아 차며 나아갔다. 웨인과 스타샤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막심!”
이븐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쓰러진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이븐은 얼른 남자의 몸을 돌려 뉘었다.
“막스야? 막심이냐고!”
그렇게 외치며 스타샤도 말에서 내렸다. 이븐이 옷깃을 찢어 남자의 목을 감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흘러나올 피도 없는 것 같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공작··· 공작을 죽여······. 서펜트를 막아서··· 문을··· 문을 열지··· 못하도록······.”
이븐이 막심의 얼굴에 붙어있던 지푸라기를 떼어냈다. 웨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뒤에서 말했다.
“성당으로 옮기지. 거기서 치료······.”
웨인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스타샤가 넘어지다시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막심의 등을 받쳤다. 머리가 땅에 닿지 않으면, 죽음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야, 막스, 족제비. 너 진짜 길바닥에서 뒤질 거야? 그렇게 멋대가리 없이?”
스타샤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떨어진 눈물이 막심의 피로 물든 뺨에 번졌다. 막심의 눈엔 이제 초점이 없었다. 그는 이븐도, 스타샤도 쳐다보지 않고 그 둘 사이의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사그라지는 목소리를 짜냈다.
“난, 두려워··· 내가 틀렸을까 봐······. 나는 날 믿었는데··· 내가 한 일들이······.”
말을 멈춘 막심이 발뒤꿈치로 흙을 긁었다. 단말마의 고통으로 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놈들을 도왔을까 봐··· 내가··· 틀렸나···? 내가······.”
“아뇨, 막심. 아닙니다. 설령 틀렸더라도 제가 바로잡겠습니다. 제가 바로잡고, 틀렸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틀렸다면, 제가······.”
이븐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뜨거운 것이 올라와 목을 막은 탓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옆머리를 쥐어뜯었다. 막심의 상처를 틀어막으려는 스타샤의 손이 피로 물들었다.
“일어나라고, 개자식아! 일어나! 이 꼴이 다 뭐 하자는 건데! 이게 뭐냐고, 대체!”
졸음이 밀려오는 듯 막심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누군가 그의 머리를 잡고 끌어내리는 것처럼 스타샤의 팔 안에서 막심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었다.
“루이제, 내 동생··· 아네트, 내 사랑··· 로즈, 로즈, 내 아이······.”
밤이 찾아와 온기가 남아있는 사냥꾼의 시신을 덮었다. 죽음은 어떤 것도 내놓지 않고 다만 모질게 앗아갈 뿐, 그가 조악한 솜씨로 그은 죽살이의 경계 뒤에서 남겨진 자들은 절망과 조의를 섞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둠이 사윈 사냥꾼의 체온을 좀먹고, 시간이 벌레처럼 그의 기억을 갉아먹으면 막심도 이제 빛바랜 비석으로 남을 것이었다.
8막 마침.
- 작가의말
그들처럼
애욕과 흙으로 빚어진 내가,
똑같은 부정과 절망으로
에워싸인 내가,
긍정의 불길을 뿜게 하소서.
- W. H. 오든, 「1939년 9월 1일」(봉준수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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