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막 1장 - 최선의 세계(1)
9막 배태(胚胎)
악이 없다면 선은 정의될 수 없다. 악의 진흙탕 속에서 선의 연꽃이 피어날 때 비로소 그 가치와 옳음을 가늠할 수 있다. 밤하늘이 대낮처럼 밝다면 별은 어떻게 빛날 것이며, 모든 곳이 길이라면 길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고트프리트 폰 프리츠바그너, 『선악의 굴레에서』
그렇다.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내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신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신이 있다면 그가 무능하거나 악하거나 혹은 둘 다일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 리하르트 슈바이크, 『에피디데스는 이렇게 죽었다』
1장 최선의 세계
울먹임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마르셀의 추도사 낭독이 끝나자, 그는 다른 사냥꾼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술에 취한 마르셀은 수심에 잠긴 고목처럼 보였다. 스타샤가 옆구리를 찌르자 이븐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막심의 마지막을 지켜봤던 이들의 대표로 이븐이 뒤이어 추도사를 낭독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스타샤는 장례식이 지긋지긋하다고 했고, 웨인이야 그보다 표현은 점잖았으나 지긋지긋하기는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그는 불과 두 달 전에 자기 손으로 죽인 제자의 장례식을 주관했던 것이다. 이븐은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가 까먹은 탓에 떨어뜨려 구기고 만 성서를 집어 들고 관을 향해 나아갔다.
아내가 죽은 이후로 이븐의 부친은 미사에 나가지 않았고 이븐을 데려간 일은 더욱 없었기에 그는 세례를 받은 적도 없었다. 그래도 이븐은 글을 배우기 위해 성당을 드나들었고 그 덕에 성서에서 그럴듯한 구절을 인용할 정도는 되었다.
“너는 거짓된 말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손을 잡아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지니라.”(*)
이븐은 강대상 위에 올려둔 성서를 덮었다. 그는 그 위에 손을 얹었다가 다시 내렸다. 그건 죽은 언어들에 불과했다.
“저는 막심을 잘 모릅니다. 단장님이 제게 막심과 함께 사냥에 나서라고 하셨을 때만 해도 웬 떠버리를 붙여줬나 했습니다.”
좌중 가운데서 코가 벌게진 코리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이븐은 침을 삼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하는 악은 악 그 자체뿐 아니라 거기에 맞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넓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도무지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말입니다. 막심은 일신의 안위를 염려해 머뭇거리는 것마저 악행으로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도처에 산재한 악, 눈길이 가닿는 곳마다 몸을 부풀리는 마물이 도사리고, 죽어나간 이들의 허망한 육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그 따위 것보다, 무엇을 할 수밖에 없는가만이 남았다. 질문보다는 당위의 이름으로, 벼랑에 몰린 심정으로, 마련되지 않은 선택지와 죽음만큼 자명한 정답이 노려보는 것을 느끼며 이븐은 추도사를 이어갔다.
“어쩌면 우리, 조금 더 악해져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의 의지가 고작 이런 모습으로 끝을 맞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다시, 악에 맞서는 의지를 조금 더 날카로이 벼릴 필요가 있겠단 생각도 듭니다.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이븐은 덮어둔 성서에서 눈을 떼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는 얼굴이 몇 있었다. 스타샤와 웨인, 약에 취한 듯 반쯤 눈을 감고 있는 뷔센, 황동으로 된 코를 단 아블린, 그리고 그녀가 연신 등을 쓸어주고 있는 마르셀,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충혈된 눈의 케넌, 등을 돌려 장례식장을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데릭의 것이었다. 데릭, 프리드리히 자켄바흐. 이븐은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을 몇 번 되뇌다가 추도사를 마무리 지었다.
“빛이··· 빛이 비칠 겁니다.”
*
애도의 분위기를 더하는 비도, 산 자를 더 처량하게 만드는 따가운 햇살도 없었다. 다만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날이 으레 그렇듯, 기분 좋을 만큼의 따스한 온기가 사냥꾼의 전당으로 향하는 길을 덥혔을 뿐이었다. 사냥꾼이 죽을 때마다 그의 이름으로 정원에 나무를 심는 관습은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정원에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르셀이 막심의 얼굴을 한 번 더 봐야 한다고 우겨서 행렬이 지체되었다. 석관에 옮길 때 볼 수 있다고 말렸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관을 열었고 시신은 부패하고 있었다. 쓰러져 오열하는 마르셀을 이븐과 아블린이 다가가 팔을 하나씩 잡고 일으켜 세웠다. 웨인이 지팡이를 짚고 무릎을 주물렀다.
사냥꾼의 전당은 향냄새로 가득했다. 막심의 시신은 나무판자로 덮인 데릭의 무덤의 대각선 아래 석관에 안치되었다. 그들 사이에는 여덟 개의 석관이 있었다. 이 년 새 열 명의 사냥꾼이 죽은 것이었다. 감염된 사냥꾼은 제외되었다. 사제가 조문을 읊는 동안 스타샤는 외따로 떨어져 사냥꾼들의 비석을 손으로 쓸며 전당을 거닐었다.
사제는 막심이 부름을 받아 천당에 가게 되었노라 말했다. 이븐은 천당을 믿지 않았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막심이 그런 따분한 곳으로 갔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장례가 끝나자 사람들이 흩어졌다. 막심은 다행히 돌로 된 관뚜껑을 갖게 되었다. 데릭처럼 팔이나 다리가 없는 사냥꾼들의 석관은 나무판자로 덮여 있었다. 시신의 다른 부위가 후에 수습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뭐였을까?”
스타샤의 말에 이븐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성냥을 흔들어 끄고 말을 이었다. 에이델 그란트라고 적힌 묘비 앞에서 향이 타고 있었다.
“막스가 알아내려던 거. 혼자 싸우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알아내려 했던 것 말이야.”
“그보다는······.”
이븐은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말을 골랐으나 논쟁을 피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왜 혼자여야 했을까? 우리가 알면 안 되는 사실이라도 있었던 건 아닐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스타샤의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이븐은 에둘러 말하는 대신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결탁. 막심은 헤레틱스와 내통하고 있었어.”
“속단하긴 이르네.”
이븐이 웨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속단이 아닙니다, 웨인. 부검 결과는 막심이 백작, 남작과 싸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녹아내린 피부와 화상, 손상된 호흡기, 그리고 폭이 넓은 칼에 의한 자상이 이 싸움에서 얻은 상처들입니다. 그러나 그의 목을 찌른 것은 폭이 좁고 날카로운 검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길에 남겨진 출혈의 흔적은 우리가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당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요.”
이븐은 말을 멈추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븐을 비롯한 사냥꾼들은 충분히 신속하지 못했고, 경황이 없어 주위를 살피지 못한 탓에 범인마저 놓치고 말았다.
“우리조차 막심의 싸움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모르던 때에, 남작의 죽음을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마물들이었습니다. 노블 다이스가 복수를 천명하면서 남작의 죽음을 알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작에 이어 남작도 사냥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단 사실이 알려지면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는 것은 바로 노블 다이스 자신들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다른 집단의 존재를 상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작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막심의 시체와 함께 마일스아이렌에 당도했을 때였다. 케넌이 그 사실을 알려왔고 정보원(情報源)은 사냥꾼에게 붙잡힌 마물이었다. 이븐은 복잡한 상황에 대해 한 가닥 통찰을 제공해줄 수 있는 문장을 알고 있었다. 누가 이득을 보는가?
“‘누가 이득을 보는가?’ 남작의 죽음을 알린 건 경쟁 세력인 헤레틱스입니다. 헤레틱스는 전투의 결과를 알고 있었고, 그건 그들이 전투의 현장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코리나 본크 씨가 말하길 막심이 사냥에 나서기 전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속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이븐은 손에 쥔 조각들을 가지고 그림을 맞춰 나갔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죽여야 할 대상은 막심 에카르트였다. 그를 오로지 선한 동기를 지니고 행동했던 인물로 파악한다면 놓치게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러므로 이븐은 무덤을 파헤치는 심정으로 추측을 이어나갔다.
“제 추측은 이렇습니다. 막심은 헤레틱스가 세운 모종의 계획에 동참합니다. 이 계획은 서펜트라는 인물, 그리고 ‘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막심은 그들의 계획을 따르다 어느 순간 자신이 속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용병들이 말했던 길목에서의 전투, 즉 백작과의 조우에서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백작은 이때 막심이 헤레틱스와 결탁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생포하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막심은 막심대로 노블 다이스가 헤레틱스의 계획의 이면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단 것을 파악합니다.”
스타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븐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막심은 노블 다이스를 사냥하려 합니다. 목적은 헤레틱스의 계획을 파헤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냥꾼을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헤레틱스와 결탁하고 있단 사실을, 외부 집단과 내통하고 있단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되니까요. 남작을 죽이는 데 성공한 막심은 그 과정에서 어떤 비밀을 알게 됩니다. 헤레틱스는 그가 비밀을 알게 된 이상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공작을 죽이고, 서펜트를 막아서 문을 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븐은 체스바덴에서 마일스아이렌으로 오는 동안 줄곧 그 유언을 곱씹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첫 번째 구(句)였다. 공작을 죽이라는 말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사냥꾼이라면 누구든 그렇게 할 터였으므로.
웨인이 입을 열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그는 초췌해 보였다.
“헤레틱스가 전투의 현장에 있었다면, 그리고 막심에게 위험한 정보가 흘러들어갔음을 알게 되었다면, 왜 거기서 그를 처리하지 않았겠나? 왜 번거롭게도 길 위에서 그를 죽였으며, 왜 우리에게 유언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은 남겨두었겠느냔 말이야.”
“여러 추측이 가능합니다. 남작은 죽었으되 백작은 죽지 않았죠. 전투 현장에 몸을 드러내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막심의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전투 현장에 있었던 이에게는 막심을 죽일 만큼의 힘이 없었고, 그 일은 다른 이에게 맡겨졌던 것일 수도 있지요.”
웨인은 이븐이 했던 말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해보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자네가 하려는 말은······ 손을 잡은 대상만 바뀌었을 뿐 막심이 루퍼트의 뒤를 따랐다는 거군.”
*
“마르셀.”
회랑의 기둥에 기대어 있는 사냥꾼을 알아보고 이븐이 말했다. 마르셀이 기둥에서 어깨를 떼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좀 괜찮으십니까?”
“그래.”
마르셀이 쉰 목소리로 답했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그다지 유쾌하게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븐은 걸음을 옮기려 했다.
“마지막에 다른 말은 없었나?”
“어떤···?”
이븐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반문했다. 마르셀이 손을 들어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가족이나 재산하고 관련된 것들 말이야.”
“가족들 이름을 부르긴 했습니다. 재산 처분과 관련해서는 저도 알거나 들은 바가 없군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이븐은 문득 마르셀이 금전에 대해 기이한 집착을 지닌 인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가 죽은 사냥꾼의 재산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에 대한 불쾌한 호기심이 이븐의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아네트, 에카르트 부인이 델루즈에 묻혀 있어. 마일스아이렌으로 이장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비용을 대려고.”
“관대하시군요. 막심도 기뻐 할 겁니다.”
이븐은 그를 향해 머리를 한 번 꾸벅이고 길을 재촉했다. 마르셀이 한 번 더 그를 붙잡았다.
“이븐.”
이븐은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 멈춰 섰다. 마르셀이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놈을 찾아 죽이게. 나도 그럴 테지만, 막스를 이렇게 만든 놈을 찾아서 기필코 죽여 버리란 말일세.”
이븐은 고개를 돌려 마르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븐은 마르셀의 부어있는 눈두덩 사이 까맣게 빛나고 있는 조약돌 같은 눈에서 감정을 읽었다. 상실, 분노, 고통, 피로······. 이븐이 답했다.
“그렇게 할 겁니다.”
*출애굽기 23장 1-3절 부분 인용
- 작가의말
서두에 인용한 글은 각각 라이프니츠와 에피쿠로스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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