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막 2장 - 늑대굴 비가(1)
9막 배태
2장 늑대굴 비가(悲歌)
스타샤는 자신의 방으로 가는 대신 문을 여는 이븐의 뒤에 섰다. 이븐은 그녀의 얼굴을 슬쩍 돌아봤다가 문을 잡아주었다. 무엇인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 듯, 팔짱을 낀 스타샤가 이븐을 따라 들어왔다.
“두십시오. 제가 할 테니.”
이븐은 하인으로부터 양동이를 받아들고 욕조에 물을 채웠다. 저녁의 공기로 차갑게 식은 유리창에 김이 서렸다. 하인은 이븐과 스타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손을 넣어 욕조의 물을 저은 이븐은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스타샤가 의자를 끌고 와 곁에 앉았다.
그녀가 늘 그렇듯 스타샤는 고개를 돌리거나 곤혹스러운 기색을 내보이는 일 없이, 이븐이 벗은 옷을 침대 위에 차곡차곡 개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븐의 벗은 몸은 단단하고 날렵한 근육으로 감싸져 있었고, 사냥꾼답지 않게 상처 없이 매끄러웠다.
“발목은 어쩌다가 그런 거야?”
물이 흘러넘치지 않게 조심히 욕조 속으로 들어가는 이븐을 보며 스타샤가 물었다. 이븐의 오른 발목에는 발찌를 두른 것같이 새하얀 흉터가 선연했다.
“어렸을 때 덫을 밟았어.”
“실수로?”
이븐은 욕조 밖으로 오른발을 빼내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그의 몸에 흐르는 피도 감염되기 전에 얻은 흉터까지 재생시켜주지는 못했다.
“아니. 일부러.”
“왜?”
“궁금했거든.”
이븐은 눈을 감고 잔베르 근교에 있는 오두막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사냥총을 쏘는 법을 배우던 날 이븐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걸었다. 걸을 때마다 개머리판이 무릎 뒤를 통통 두드리는 것을 느끼며. 서투른 솜씨로 심장이 아니라 폐를 쏜 탓에 자신의 피 속에서 익사하는 사슴을 봤을 때 철부지는 키가 한 뼘쯤 자랐다.
“아버지 따라 사냥을 배우는데 어느 날은 덫에 걸린 사슴을 봤거든. 그런데 내 자신이 너무 치사하게 느껴지는 거야.”
“걔는 덫에 걸려 죽을 운명인데 넌 곧 걔를 맛있게 요리해 먹을 예정이라서?”
“비슷했지.”
“그래서?”
“그래서 나도 덫을 밟아봤어. 얼마나 아픈지 궁금해서. 아니, 호기심보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어. 공평하게 피를 흘리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러고도 파상풍에 걸리지 않은 것은 사냥 도구들을 항시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고 관리하는 부친의 정갈한 성격 덕분이었다. 피를 흘리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이븐에게 부친은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자신을 닮아 조심성 많은 아들이 실수로 덫을 밟았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던지 그는 상처를 꿰매고 나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을 소중히 여겨라. 네 어머니가 네 몸에도 들어있다.’
“지랄. 총 맞아볼 용기는 없었냐? 그건 또 못 했지? 그건 진짜 죽을 것 같으니까. 하여간에 감성적인 척은······.”
스타샤의 냉소적인 반응에 이븐은 정말로 즐거운 듯이 고개를 젖히고 웃다가 그녀를 향해 손으로 물을 튀겼다.
“죽는다. 그만해라.”
이븐은 욕조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어 잠시 숨을 참다가 곧 올라왔다. 머리를 흔들어 물기를 털려다 스타샤를 의식한 탓인지 멈칫한 그는 손으로 머리칼을 쥐어짰다. 이븐이 스타샤 쪽을 흘깃 쳐다보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욕조가 넓은데.”
“그래서 뭐?”
“그냥 넓다고. 잔베르에 있는 내 방 욕조는 좁거든.”
스타샤는 물 흐르듯 숙련된 동작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다시 넣으려던 담뱃갑을 이븐의 뻗은 손에 던져주며 말했다.
“케넌한테는 아직 얘기 안 했어.”
이븐은 스타샤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의심은 여전하고?”
“로지아 레니스, 그 여자를 추궁해봐야지.”
스타샤가 자신이 던진 말의 효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븐의 표정을 살폈다.
“왜? 그 여자한테는 그러면 안 돼? 넌 막심을 묻기도 전에 의심부터 했으면서?”
“안 된다고 한 적 없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나도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 테니까.”
이븐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로지아는 그로 하여금 마물 사냥을 시작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로지아는 이븐을 살렸고, 계속해서 그를 살리고 있었다. 스타샤의 진초록색 눈동자가 이븐을 쏘아보았다. 사나운 눈매는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 년 전 잔베르··· 거기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랑 데릭이 도착하기 전에 말이야.”
이븐은 고개를 뒤로 젖혀 나무로 짠 욕조에 목을 기댔다. 목욕물의 훈기 때문에 담배 연기가 더욱 매캐하게 느껴졌다.
“레베카하고 나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어. 그날은 레베카의 부모님을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려던 차였지.”
“복수였군.”
스타샤의 말에 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의 부모님은 제법 성공한 상인이었고, 사업을 확장하는 기회로 쓰일 수 있는 딸의 혼사에 나 같은 사냥꾼 나부랭이가 끼어든 걸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어. 집에서 책만 읽는 딸의 건강이 걱정돼서 몇 번 사냥에 데리고 나갔던 게 실수였지.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 옆에 나를 붙였던 게 실수였지.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첫눈에 반했어. 코허리를 덮은 주근깨며, 살짝 들린 코끝과, 부드럽게 굽이치는 빨간 머리까지······.”
이븐이 말을 멈췄다. 자신도 깨닫지 못한 사이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던 스타샤는 곧 손을 거두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답지 않게 묻고 싶은 말이 혀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이븐은 회고를 이어갔다.
“난 죄 많은 인간이었어. 생트바이룬에서 분리주의자들을 많이 죽였고, 그 대가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이 삶이라는 것에 도무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어. 가계를 돌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사실 먹여 살려야 할 사람이라고는 나뿐이었으니 온종일 총 한 자루 메고 숲을 돌아다녀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지. 그러다가 레베카를 만난 거야. 내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사나흘에 한 번씩 책을 빌려주러 왔지. 그 방문을 기다리며 살았어.”
이제 이븐은 다른 공간과 시간에 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 낭만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책장(冊張)과, 책장을 넘길 때 풍겨 나오는 특유의 냄새와 함께 찾아왔다. 이븐이 가죽 장정으로 된 책의 표지를 손끝으로 쓸어보는 동안, 곁에 앉은 레베카는 저자의 약력과 출간에 얽힌 비화들을 읊어주었다.
어떤 이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글을 쓴 죄로 감옥에 갇혔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처음 내놓은 책의 명성을 뛰어넘을 작품을 쓰지 못해 그만 자결하고 말았다고 했다. 이븐에게는 그 얘기가 모두 우습게 느껴졌다.
레베카의 말이 끝나면 이븐은 전에 읽었던 책에 대한 자신의 유치한 감상을 밝혔다. 할 말이 떨어질 때면 그가 잘 아는 가죽에 대한 얘기로 돌아갔다. 표지를 감싼 가죽이 무엇인지, 그 가죽을 지닌 동물을 잡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따위의 실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오래 가지 못했지. 부모가 눈치를 채고 내 오두막에 가는 걸 막았고, 한 달··· 아니, 정확히 스물여섯 날째 되던 밤에 마침내 다시 왔어. 핼쑥해진 얼굴로 말이야. 단식 투쟁을 했다나봐. 강단 있는 여자였지. 결혼 생활이 어떨지 그때 보였다고 할까. 아무튼 부모가 나를 만나보자고 했다더군. 날짜를 정하고 헤어졌지.”
*
이븐은 솜을 누빈 외투를 벗어 다시 벽에 걸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이 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벽의 못에 걸린 옷을 손가락 걸음으로 하나씩 짚어보던 그는 아버지의 고급 외투에서 잠시 멈췄다.
그건 이븐의 부친인 다비드가 귀족들을 만날 일이 있을 때 입고 가던 옷이었다. 다비드는 담비를 잡아 그 가죽을 파는 것이 왜 기약할 수 없는 일인지, 낮고 차분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그들은 공공연히 다비드를 앞에 두고 실력이 더 좋은 사냥꾼을 알아봐야겠다고 말했다. 이븐이 무례하게 끼어들기 전에 다비드는 공손히 절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븐은 고급 외투를 손으로 한 번 쓸어보고 그 옆에 걸린 자신의 외투를 빼내 몸에 걸쳤다. 아버지의 고급 외투를 입는 것은 어쩐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븐은 몇 번 몸을 돌리며 다시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레베카는 그의 수염을 좋아했지만 이븐은 코 아래 수염만 조금 남기고 말끔히 깎았다.
문을 닫아걸고 나온 그는 밤에게 다가가 안장을 얹었다. 아마도 그의 재산 가운데 가장 값진 품목일 밤은 주인의 긴장한 기색을 읽은 것처럼 주둥이를 이븐의 목에 대고 비볐다. 이븐은 밤의 목을 몇 번 두드리고 올라탔다. 공기 중에 탄내가 섞여 있었다.
돌아본 잔베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 군데가 아니었다. 이븐은 밤의 배를 차며 재촉했다. 언 흙이 말발굽 아래서 부서져 날았다. 성 밖의 민가에 도착했을 때 길게 찢어지는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났다. 모든 비명이 레베카가 내는 것처럼 들렸다. 이븐은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말을 달려 달아나는 남자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남자는 고삐를 틀어 재빨리 말을 멈춰 세웠다. 말발굽에 치일 뻔한 밤이 푸르르 울며 흥분한 콧김을 내뿜었다.
“젊은 베르자크구먼. 마물이야. 마물이 떼로 나타나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네. 자네도 성 안에 볼일이 있거든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도망치게나.”
이븐은 말 머리를 돌렸다. 도망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두막에 있는 총에 생각이 미친 것이었다.
*
“처음에는 습격의 규모를 알지 못했어. 하지만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은 그때도 알고 있었지. 아버지께 배운 거야. 평생을 보낸 숲에서도 길 잃을 것을 대비해 식량을 챙겨 사냥을 나가는 분이셨거든. 그때는 다행히도 은탄환을 사인(私人)이 소지하는 것을 막지 않았어. 은탄환은 물론이고, 챙길 수 있는 총기는 모두 챙겨 다시 잔베르로 향했지.”
“눈이 멀었군.”
스타샤의 말에 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욕조에 담배를 비벼 끄고 말했다.
“하지만 눈을 감아버리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지.”
*
늑대와 인간의 형상을 반씩 갖추고 있는 이들이 집에 불을 놓고 있었다. 안에서는 요강이며 화장대 따위의 집기를 던지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었고, 늑대인간들은 놀이인 양 그것을 피하며 웃었다. 이븐은 밤을 멈춰 세웠다. 이븐을 향해 고개를 돌린 늑대인간은 흥미롭다는 듯 씩 웃었고, 그 표정으로 죽었다.
탕-
늑대인간 무리가 재빨리 산개했다. 그들은 자세를 낮추고 천천히 이븐을 향해 다가왔다. 밤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븐은 총을 바꿔들고 그 가운데 하나를 겨냥했다. 늑대인간이 도약해 왔고, 이븐은 얼른 머리에서 심장으로 표적을 바꾸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바로 옆에 늑대인간이 떨어졌다. 회복되지 않는 상처로부터 피를 뿜어 올리며 늑대인간은 엎어진 채로 밤의 다리를 할퀴려 들었다. 이븐은 밤의 배를 차 앞으로 나아갔다. 오른손으로는 손에 들린 장총을 권총으로 바꿔 쥐며 그는 좌우의 늑대인간들에게 한 발씩 쐈다.
한 마리는 탄환을 피했고, 다른 한 마리는 다리를 맞았으나 조금도 수그러든 기색 없이 이븐의 등을 노리고 뛰어들었다. 이븐은 허리 부근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이를 깨물었다. 밤의 허구리에도 길게 찢어진 상처가 남았다. 이븐은 왼발을 뒤로 넘기며 재빨리 말에서 내렸다. 그는 달아나지 않고 서있는 밤의 엉덩이를 때렸다.
“은탄환이야. 놈은 사냥꾼일지도 몰라.”
탄환을 피했던 늑대인간이 색색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에 총을 맞은 늑대인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븐도 아는 얼굴이었다.
“아냐. 아니, 사냥꾼은 맞는데 마물 사냥꾼은 아니야.”
그러나 이븐은 그의 이름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잔베르의 주민이었고, 털로 뒤덮인 얼굴에는 아직 인간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이븐은 그것이 늑대인간 가운데서도 저급한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다만 얘기로만 전해 들었던 감염을 직접 목도하고, 죽음보다 더 가혹한 운명이 레베카를 덮쳤을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에 몸을 떨었을 뿐이었다.
어깨에 걸린 두 개의 장총은 모두 비었고, 손에 들린 권총에는 네 발이 남아있었다. 바닥에 엎어져 피를 흘리던 늑대인간은 그대로 죽어버린 모양이었고, 남은 적은 둘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전부는 아닐 터였으므로 총성을 낸 이상 빨리 자리를 떠야 했다. 어차피 불타고 있는 집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일가가 살고 있었다.
타탕-
이븐의 선택을 도와주려는 듯, 늑대인간이 그를 향해 뛰어들어 왔다. 이븐은 당황한 탓에 연달아 두 번 방아쇠를 당겼고, 두 발 모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이븐은 재빨리 사냥칼을 꺼내 늑대인간의 접근을 막았지만 무용한 동작이었다. 늑대인간이 휘두른 팔에 이븐은 피를 뿌리며 사냥칼을 떨어뜨렸다.
- 작가의말
이븐을 더 괴롭혀(?) 달라는 요청을 댓글로 받았습니다. 그 독자 분께는 이번 막이 마음에 드실 것 같습니다.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