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막 4장 - 죽은 자들 가운데(1)
9막 배태
4장 죽은 자들 가운데
“그래서 그렇게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거군. 마물을 산 채로 씹어 먹느라 말이야.”
이븐은 모로 누운 스타샤의 옆구리에 손을 올린 채 그녀의 머릿결에 얼굴을 묻었다. 돌아누운 스타샤를 뒤에서 안는 모양새였다. 목욕도 헛되이, 그들의 몸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축축한 침대보가 다리에 감기는 것을 느끼며 이븐이 나른한 목소리로 답했다.
“총이고 뭐고 수중에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격정이 훑고 지나간 스타샤의 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 있었다. 이븐은 자신의 손에 담긴 체온을 옮겨 울퉁불퉁한 땅을 고르듯 하얀 좁쌀들을 녹였다.
갈빗대와 허리를 지나 언덕을 오르는 이븐의 손을, 스타샤가 잡아 자신의 배 앞에 두었다. 떼쓰는 아이 앞에서 사탕이 담긴 항아리의 뚜껑을 닫는 것처럼 단호한 몸짓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븐은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데릭은··· 데릭은 뭐라고 했지? 전에도 얘기해줬지만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걸.”
“데릭이 좋은 스승은 못 되었을 텐데.”
스타샤의 대꾸에 이븐은 데릭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확실히 좋은 스승은 못 되었다. 그의 밑에서 사냥을 배웠던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데릭은 대체로 술에 전 상태에서 사냥꾼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늘어놓았고, 맨정신일 때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네 말대로라면 나를 살리기로 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니까. 그리고 어쨌거나 내 스승이기도 했고.”
스타샤는 침대 커튼의 자수를 매만지며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도 이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니었다.
“데릭은 이 싸움의 초창기부터 교단의 사냥꾼으로서 자기 자리를 지켜왔어. 팔 인의 사냥꾼은 아니었지만 팔 인의 사냥꾼 다음의 사냥꾼 정도는 됐을 거야. 도끼날 데릭, 북부의 수호자. 노래도 있을걸? 도끼날 데릭 푸주한을 베었네. 음음음-.”
이븐의 기억이 맞는다면 데릭이 잔베르 교구의 사냥꾼으로 부임한 것은 팔 년 전 여름이었다. 이븐은 그때 처음으로 먼발치에서 데릭을 보았고, 스타샤가 콧노래로 눙친 노래의 뒷부분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데릭과 대면했을 때 그의 실망은 더 컸다.
“알아. 지금에 와서야 문득 궁금해진 건데 노래 속 푸주한은 누굴 말하는 거지?”
“푸주한은 다른 사냥꾼 별명이야.”
데릭이 다른 사냥꾼을 베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하나뿐이었다. 이븐이 말했다.
“감염됐군.”
“감염됐지. 사람들은 그냥 악명 높은 마물인 줄로만 알고 있지만. 푸주한이 팔 인의 사냥꾼 중 하나인 울리히 하르트만의 별명이었다는 것도, 그리고 데릭의 스승이었다는 것도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 동네는 존속살해가 전통이군.”
이븐의 말에 스타샤가 팔을 들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 유구한 전통이지. 그러니 너도 다른 사냥꾼들하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되는 건 눈 깜짝할 새거든.”
이븐은 스타샤의 옆에 누워 이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가 알기로 그런 방법은 없었다. 스타샤가 입을 벌려 하품을 한 뒤 말했다.
“그래, 이제 얘기해줄게. 쓰러진 너를 발견한 다음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데릭이 뭐라고 했는지. 그런데 듣다 보면 데릭보다도 로지아 그 여자한테 더 흥미가 동할걸.”
*
“이 녀석이 원흉이었던 것 같군.”
데릭이 할버드의 창날로 늑대인간의 시체를 찍어 옆으로 밀며 말했다. 그 새까만 털의 늑대인간의 외양에는 잔베르의 길을 가로지르며 보았던 다른 늑대인간들과 구별될 만큼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창날이 들어가기 용이하게 늑대인간의 등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살점이 너덜너덜해져 지저분한 상처였다.
허드가 시체 밑에 깔려있던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성한 데가 없었다.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허드가 말했다.
“숨이 붙어있습니다.”
“이 남자인 걸까요? 늑대인간들을 죽인 사람이?”
순진하게 묻는 로지아를 스타샤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로지아는 스타샤의 치켜 올라간 눈매에 담긴 뜻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일지, ‘보면 몰라’일지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스타샤는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고 다시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허드와 스타샤가 남자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동시였다. 그러나 각각 발견한 사실은 달랐다. 스타샤는 남자의 목과 왼쪽 어깨 사이에 난 이빨 자국을 발견했고, 허드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속도로 아물어 가는 상처를 발견했던 것이다. 스타샤가 허드의 옷깃을 잡아 얼른 뒤로 당겼다.
그러나 마침 허드도 뒤로 물러나려던 차여서, 둘은 각자의 예상보다 더 극적으로 후퇴했다. 스타샤와 허드는 뒤로 넘어져 굴렀고, 스타샤가 먼저 일어나며 재빨리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감염의 징후를 읽어낸 이상 결론은 한 가지였다.
“멈춰!”
“안 돼요!”
데릭과 로지아가 동시에 소리를 쳤고, 둘은 어리둥절해져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로지아가 해명했다.
“그러니까, 저는 자켄바흐 씨께 안 된다고 한 게 아니고, 메이츠니르 씨께 한 말이에요. 다시 말해 자켄바흐 씨의 말에 동의하는 의미이고······.”
“감염됐어, 데릭. 베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야?”
스타샤가 로지아의 말을 끊고 데릭에게 물었다. 그러나 데릭도 뭔가 다른 수가 있어서 스타샤를 멈춰 세운 것은 아니었던지 잠시 할버드의 끝을 내린 채로 말없이 서있었다. 이윽고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자가 잔베르를 지켰어. 내가 교구를 비운 동안 이자가 여길 지켰다고. 적어도 아무것도 모른 채로 죽게 할 순 없어. 정신을 잃은 틈에 목을 베어버릴 순 없다고.”
“그러면? 이 남자가 정신 차리고 일어나면 거기다 대고 고맙습니다, 한 마디 한 다음 죽이게? 그러면 뭐가 좀 달라져?”
데릭이 성큼성큼 다가가 스타샤와 쓰러진 남자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이제 스타샤는 데릭을 올려다봐야 했다. 그러나 전혀 위압감을 느끼는 기색 없이, 그녀는 여전히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그 전에 이 남자가 순순히 죽어줄 것 같아? 잔베르를 지켜준 건 고마운데 그건 그거고 이제 감염되었으니 머리통을 날려드려야겠습니다, 그러면 목 빼고 기다려준대? 비켜, 데릭! 네가 못 하면 내가 할 테니까.”
데릭은 오른손에 쥔 할버드의 자루 끝을 땅에 박고 도끼날은 스타샤를 향해 기울이며 응수했다.
“물러서라, 스타샤. 이건 내 명예와 관련된 일이다.”
“명예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왜 그 따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거에 목숨 거는 건데! 명예로운 데릭 여기 잠들다. 묘비명에 이딴 거 적어 넣고 싶어서 그래? 정 명예롭고 싶거든 술부터 끊어, 이 주정뱅이야.”
“이 남자가 사냥꾼이었어도!”
데릭이 벼락같은 노성을 터뜨렸다. 그 기세에 스타샤도 한 걸음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사냥꾼이었어도 죽이자고 했을 건가? 이 남자가··· 에이델이었어도, 그래도 죽이자고, 때마침 의식을 잃었으니 아주 죽여 버리자고 했을 거냔 말이야. 이 남자는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잔베르를 지켰어. 사냥꾼조차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봤던 광경들을 떠올려 보라고. 적어도 열 마리, 아니 스무 마리가 넘는 늑대인간을 이 남자가 죽였어.”
그건 스타샤도, 그녀뿐 아니라 여기 있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길목마다 널브러져 있는 늑대인간의 사체들은 하나같이 은탄환에 맞아 죽었고 그 사격 솜씨는 부정할 수 없이 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리고 또 여기 쓰러져 있는 검은 늑대인간. 그건 군주급 마물이었다.
데릭이 으르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넌 지금 비겁자처럼 이 남자를 죽여 버리자고 말하는군. 마주할 용기조차 없어서 잠든 이의 얼굴에 베개를 대고 눌러 죽이는 겁쟁이들처럼 말이지. 깨어나면 내가 상대하겠다. 감염되어 늑대인간이 되었으면 죽이더라도 그때 죽이겠다고. 나는 그때까지는 이 남자가 지키려 했던 것들을 마저 지키겠어. 인간의 품위를, 그 포기할 수 없는 고결성을.”
“꼴값 떨지 마, 데릭. 이 남자가 뭘 지키려 했는지 따위엔 관심 없어. 난 내 뒤에 남아있는 것들만 생각할 거니까. 내가 지켜야 할 것들만 지킬 거니까. 담을 높게 쌓고 문 앞에 버티고 서서!”
스타샤가 검지를 치켜들고 데릭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개 같은 마물 놈들은 한 마리도 들여보내주지 않을 테니까. 구구절절한 사연 따위는 뒤지고 지옥에나 가서 떠들라고 해. 지옥에 떨어진 놈들 중에 사연 없는 놈 없으니까.”
“스타샤, 네가 하는 말은 쓸모를 다했으니 이제 버리자는 것처럼 들리는군. 우리가 여기서 이 남자를 버린다면, 우리 스스로가 소모품이란 걸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아. 네가 그렇게도 증오해 마지않는 교단의 행태를 답습하는 꼴이 되고 만다고.”
“그래, 그럼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 난 나대로 옳은 일을 할 테니.”
스타샤는 말을 마치고 칼자루에 올린 손을 불끈 쥐었다. 가로막는 이라면 누구든 베어버릴 기세였다. 둘을 중재하려는 듯이 허드가 대치하고 있는 데릭과 스타샤에게 다가왔지만, 뭐라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상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고 간 것은 로지아였다.
“제게 방법이 있어요.”
셋의 고개가 한꺼번에 로지아를 향했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로지아가 조금 움츠러든 기색으로 말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물론 마물의 비정상적인 대규모 이동과 습격을 규명해내는 일 때문이지만, 제 전공 분야는 그게 아니에요. 전 감염을 막는 법을 알아요.”
“그런 건 없어.”
스타샤의 단호한 음성에 로지아가 한쪽 발을 땅에 구르며 말했다.
“있어요! 여기서 다 설명드릴 순 없지만 저는 오래 전부터 이 일에 매진해왔어요.”
스타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로지아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찬찬히 뜯어보았다. 스타샤 자신과 비슷한 나이였고, 연구원의 자격이 주어지는 건 대학 졸업 이후였으니 오래 전이라고 해봐야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았을 터였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허드가 입을 열었다.
“저 남자를 감염시킨 건 군주급 마물입니다.”
“저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 가능성이 높은 거예요. 군주급 마물의 감염인자는 여러 층위의 보균자들을 거쳐 얻은 감염인자보다 더 순수한 성질을 띠고 있어요. 그래서 감염인자만을 선별적으로 억제하는 일이 일반적인 마물에 의해 감염된 경우보다 더 수월해요.”
“할 수 있겠소?”
데릭이 로지아를 향해 물었다. 그의 말투는 전보다 더 정중해져 있었다.
“군주급 마물이 인간을 물었다면 둘 중 하나예요. 감염시켜 권속으로 만들었거나······ 힘을 전이시켜 후계자를 만들었거나. 전자였다면 이 남자는 이미 늑대인간이 되어 활보하고 있어야 할 테니, 지금 상황은 후자일 거예요.”
“‘계승’에 의한 신체 변이는 진행이 더디지.”
로지아에게 힘을 보태려는 것처럼 데릭이 덧붙였다. 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쓰러져 있는 것은 감염되기 전에 얻은 부상을 회복하는 중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반론을 제기하기 전에 얼른 로지아가 데릭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그러니 아직 시간이 있을 거예요.”
로지아는 데릭과 스타샤를 번갈아 쳐다본 뒤 조금 줄어든 목소리로, 그러나 전보다 단호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두 분께서 말다툼 하느라 시간을 더 잡아먹지 않는다면 말이죠.”
데릭이 고개를 돌려 스타샤를 쏘아보았다. 스타샤도 그를 마주 노려보다가, 그녀답지 않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숨을 쉬었다. 데릭은 그것을 동의의 몸짓으로 받아들이고 얼른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데릭이 남자를 들쳐 업으려 할 때 허드가 말했다.
“입에 뭐라도 물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코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혹시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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