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막 4장 - 죽은 자들 가운데(3)
*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는 말은 날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표현일 테다. 몸은 가벼웠으되 확실히 날아갈 것 같지는 않았다. 무게감의 상실은 몸속이 비어버린 듯한 공허한 감각에서 연유했다. 그러니 몸이 베개처럼 느껴졌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고, 이븐은 생각했다.
이븐은 눈을 뜨고 침대 위에 놓인 자신의 몸을 살폈다. 벗은 상체와 하얀 천으로 치부만을 간신히 가린 하체는 북부의 탈색된 듯 힘없는 햇빛 속에서 누런 종이처럼 보였다. 이븐은 자신의 몸이 펼쳐진 책 같다고 고쳐 생각했다. 그가 열흘간 써내려갔던 글귀들은 독한 수정액 속에 담갔다 빼낸 듯이 모두 지워져 있었다.
이븐은 고개를 돌려 몸의 다른 부분들을 살폈다. 손목과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그 반대편 끝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븐은 순전히 침대 옆의 의자에서 졸고 있는 여자를 깨우기 위해 팔을 들었다.
철컹-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친 채로 잠들어 있던 여자는 쇠사슬 소리에 놀라 깨며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그녀는 팔걸이를 잡아 바닥과 둔부의 충돌을 간신히 모면했다. 이븐의 귀에 여자의 콩콩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을 깨운 것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내려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곧 쇠사슬을 경유해 이븐의 뜬 눈과 마주했다.
“정신이 드셨네요!”
“그쪽도.”
이븐은 그렇게 대꾸하면서 아직 앳된 구석이 남아 있는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감탄과 민망함이 차례로, 그리고 그대로 노정하는 투명한 눈망울에는 초췌한 빛이 깔려 있었고, 의자의 등받이에 눌린 형태를 여전히 간직한 검은 단발은 이 병실 같은 공간에서 그녀의 역할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로지아 레니스예요. 항마연구원 소속 연구원이고, 이제는 잔베르에서 일하게 됐어요. 베르자크 씨를 전담하는 일종의 주치의로서 말이에요.”
이븐은 로지아가 내뻗은 손을 맞잡았다. 쇠사슬이 또 한 번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의식한 로지아가 무엇인가를 잔뜩 삼가는 태도로 조심스레 말했다.
“곧 풀어드릴게요. 베르자크 씨의 몸 상태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이븐은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로지아는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었다가 설명 대신 물음으로 이븐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있게 했다.
“어디까지 기억나세요?”
그 말이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격철이 약실을 때리듯 이븐의 머릿속으로 기억이 몰아쳤다. 두꺼운 장서를 뒤적이는 이처럼 이븐은 곱씹고 싶지 않은 기억들의 끝을 엄지로 스쳐 넘기고, 멈춘 페이지에서 필요한 구절을 찾아 검지로 더듬었다.
입안에 넣어 씹던 심장의 감각이 생생했다. 지금도 입을 우물거리면 그 질기고 축축한 장기의 비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븐은 목이 뜯겼고 —목을 만져보려 했으나 손이 닿지 않았다— 이어 배가 뚫렸으며 —뇌가 당길 만큼 눈을 깔아 내려다본 배는 멀쩡했다— 목과 어깨 사이에 마지막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물렸군.”
“맞아요.”
로지아가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븐은 짧은 한숨을 뱉고 물었다.
“그럼 전 감염된 겁니까? 묶어두신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설명 드리기 전에 이 한마디는 꼭 해드리고 싶어요.”
로지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배꼽에 손을 모았다.
“감사해요, 베르자크 씨. 당신이 잔베르를 지켰어요. 여기 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븐은 이명이 찾아와 왼쪽 귀에 내리꽂히고 이어 오른쪽 귀의 고막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바늘 같은 이명이 뇌를 찌르고 그 피가 눈으로 몰린 듯, 두 눈 뒤로 액체가 고이는 느낌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했다. 적어도 지키고자 했던 것만큼은 모조리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파괴했다. 삼킨 울음은 가슴 가운데에 뜨겁게 머물렀다가 곧 화약처럼 폭발했다. 아니, 화약은 이미 쌓여 있었고 목으로 넘긴 울음기가 불을 댕긴 것만 같았다.
이븐은 발작을 일으키듯 침대 위에서 사지를 휘둘러 허공에 대고 무용한 공격을 해댔다. 몸이 참을 수 없이 갑갑했다. 이븐은 산 채로 파묻히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시체와 내장으로 칠해진 잔베르의 거리를 내달리던 때가 돌연 그리웠다. 분노는 편안했고 안정은 노여웠다.
“풀어주십시오.”
이븐은 팔다리를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흥분으로 몸이 뜨거웠고 침대보는 금세 땀으로 젖었다. 로지아가 가슴 앞에서 모아 쥔 두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안 돼요. 지금은······.”
“풀어!”
이븐은 버럭 고함을 지르고 다시 한 번 몸을 들썩였다. 바닥에 고정된 쇠사슬은 튼튼했으나 힘주어 당기면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지아가 침대 곁을 서둘러 떠났다. 그러나 도움을 요청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앰풀을 집어 들었다.
이븐은 돌아선 로지아의 하얀 뒷목에 군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내보이는 희고 부드러운 목이 경박한 여자의 속치마처럼 매혹적이었다. 이 끝이 간지러웠다. 이븐은 난폭하게 구는 것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니스 연구원님. 저를 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누워만 있었더니 몸을 움직이고 싶군요.”
로지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앰풀에 주사기를 꽂아 넣고 이븐을 향해 다가왔다. 이븐의 팔뚝에서 핏줄을 찾는 그녀의 손이 애처로울 만큼 떨렸다. 그럴 때마다 로지아의 체취가 파도처럼 몰려와 코끝을 간질였다. 이븐은 하체를 덮은 흰 천이 저절로 끌려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로지아는 심호흡을 한 뒤 이븐의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이븐은 주사기의 약물이 몸속으로 번질 때까지 얌전히 있다가 말했다.
“안정제로군요. 보십시오. 저는 이제 안정됐습니다. 그러니···”
“수면제예요.”
온화한 표정으로 가장하고 있던 이븐의 얼굴이 다시금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거 당장 풀지 못······!”
마치 다른 생물처럼 입안의 혀가 제멋대로 입천장에 들러붙었다. 이븐은 폐병 환자처럼 가르랑거리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몸이 점차 굳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로 이븐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굵직한 남자의 음성을 들었다.
“깨어났소?”
이븐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로지아가 그를 향해 눈길을 한 번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뭇거리는 음성이 이어졌다.
“아직요.”
거짓말이었다.
*
“이제 보니 거짓말 하는 게 아주 몸에 밴 여자였네.”
한 가지 사실만 모르고 있었다면 스타샤의 그와 같은 날선 반응도 독점욕에 기인한 질투쯤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그 한 가지 사실이란 바이스게르버를 만난 이후부터 스타샤가 가지기 시작했던 로지아에 대한 의심이었다.
평소였다면 아주 작은 의심도 물고 늘어졌을 이븐이었지만, 그는 로지아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수했다. 로지아에게 그처럼 관대한 기준이 적용된 까닭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런 건 아냐. 나 때문이었어. 내가 난폭하게 굴었고 그래서 다시 잠재워야 했단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내 목숨이 위태로웠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 자기의 실험 성과가 의심 받을까 봐 그랬던 거 아냐?”
확실한 건 이븐과 스타샤 중 누군가 하나에게 아주 짙은 색안경이 씌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븐은 모든 것이 희다고 말했고, 스타샤는 검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세상은 회색이라는 식으로 적절히 타협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로지아는 절대 자신을 위해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냐. 난 로지아를 이 년 동안 알고 지냈어. 예의 바르고 유순한 데다가 뭔가를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야.”
“이 년 동안 그 여자한테서 세뇌 당한 건 아니고? 진실은 언제나 단순한 곳에 있고, 없어진 물건은 그 집주인보다 처음 방문한 손님이 더 잘 발견할 수 있는 법이거든. 안경이 안 보이면 코끝에서 찾으라는 말 몰라?”
이븐은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은 몰랐지만 그 뜻은 알 것 같았다. 이븐이 말했다.
“명령서의 내용을 조금 바꿔서 읊었던 것도 결국 나를 위해서였을 거야. 로지아가 아니었다면, 물론 너와 데릭, 그리고 기스데본 사제 덕택도 있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난 그 자리에서 잔베르의 두 번째 늑대인간 군주가 될 수도 있었어.”
“정말 그럴까? 재료가 상하는 것 때문에 급해졌던 게 아니라? 몸이 달아있었던 거지. 빨리 이 남자를 실험실로 데려가서 이런저런 실험들을 해봐야 하는데 길을 막고 있으니 오죽 답답했겠어?”
“오히려 로지아에게 그런 유의 복잡한 계산이 있었다고 가정하는 편보다, 그녀가 나를 구하려 했다고 인정하는 편이 더 단순한 것 같은데? 네 말대로라면 더 단순한 것이 진실이라며.”
화가 치민다는 듯이 스타샤가 누운 자리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언제부터 선의가 단순한 게 됐어? 도대체 그런 정신머리로 여태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선행이 쉽고 단순하게 할 수 있는 거였으면 세상이 이 모양이겠느냐고.”
누군가의 동기를 파악하는 스타샤의 추론 과정은 언제나 선후가 뒤바뀌어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에 세상이 추악한 곳이 되었다는 식이 아니라, 세상의 추악함이 사람들의 악행이 아니라면 어디서 나왔겠느냐는 식이었다.
이븐은 누운 채로 고개를 저었다.
“로지아는··· 그냥··· 그럴 사람이 아니야.”
“막스는······!”
발칵 성을 낸 스타샤는 스스로를 억누르려는 듯 콧김을 길게 내뿜었다.
“막스는 뭐 그럴 사람이라서 그랬어? 루퍼트도 음침한 게 기분 나빴을 뿐이지 그런 짓을 저지르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자식이었어.”
이븐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는 사람의 살결을 보고도 이(齒)를 간질이는 욕구를 참아낼 수 있었다. 긴장의 고삐를 늦추면 식인의 욕구는 여전히 고개를 쳐들었지만 그는 그것을 제어하고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븐은 로지아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어디에 연원을 두고 있는지 발견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를 믿지 않으면, 그녀가 잔베르의 연구실에서 이븐 자신에게 행하는 ‘진료’를 의심한다면, 그도 존재할 수 없었다. 이븐은 다소 차가워진 말투로 물음을 던졌다.
“그럼 넌?”
“난 뭐?”
“넌 믿을 수 있나?”
“당연히 믿을 수 있지!”
“어떻게?”
이제 이븐도 상체를 일으켜 침대의 머리판에 등을 기댔다. 의심은 역병과 같아 조금 전 몸을 섞었던 이에게도 예외 없이 스몄다. 스타샤는 이븐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단지 그녀가 로지아를 몰아붙였던 데에 대한 이븐 나름의 반감 표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난 내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아니까!”
그러나 스타샤 스스로도 자신이 뱉은 말에 내재한 모순을 깨달았는지 등을 돌리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옷가지를 주워드는 그녀에게로 이븐이 물었다.
“어디 가?”
“먹을 거 가지러 간다, 왜?”
스타샤는 방문을 거칠게 닫고 나갔다. 이븐은 닫힌 문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것을 노려보았다. 이븐은 그가 믿고 있는 것들로 단단히 다져진 지반 아래서 의심의 뿌리가 뻗치는 것을 느꼈다.
믿음은 거침없이 나아가는 힘이지만 동시에 만족이 찾아오면 기다렸다는 듯 안주하는 힘이기도 했다.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이고 싶다는 욕망은, 그렇게 해서 안전을 보장받고 싶다는 욕구는 인류가 포식자에게 쫓기던 때부터 가졌던 것일 터였다. 그런 욕구는 원초적이라는 점에서 허기와 유사했다. 허기 때문에 쑤셔 넣은 음식은 쉽게 포만감을 약속했고, 그렇기 때문에 위험했다.
그러나 의심은 더디고 서툴지만 끝내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븐은 잔베르로 돌아간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
“다비드의 장남이로군.”
“그리고 막내죠. 자식은 저뿐입니다.”
막달레나 랑게 교구장은 침엽수처럼 곧고 메마른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회색빛으로 센 머리는 이마 가운데서 나누어 흐트러짐 없이 뒤로 넘겨 쪽 지어져 있었고, 잔베르를 휩쓸었던 일대 난리가 채 정리되지 않아 어수선한 때에도 교구장의 복식을 갖춰 입고 있었다.
코에서 내려와 입을 감싸는 주름은 입을 앙다무는 버릇 때문인 듯했고, 눈가에 포진한 주름의 정체도 곧 해명되었다. 막달레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다비드는 미사에 나오지 않았지.”
“주님이 제 어머니를 그렇게 빨리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부친께서도 좀 더 오래 성당에 나가셨을 겁니다.”
그러면서 이븐은 교구장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얼마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님의 신비로운 방식이 기껏 만들어 놓은 게 지금의 잔베르냐고, 그는 되받아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알브라이트 씨 댁 딸 때문이었다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됐나?”
“죽었습니다.”
종이 위에 무엇인가를 기록하던 막달레나가 눈을 치켜뜨고 이븐을 쏘아봤다. 그녀는 상처를 후벼 파는 데에 능숙했다.
“자네가 직접?”
“제가 직접.”
이븐은 그의 말을 막달레나가 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대답하던 순간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븐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불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와 그보다 노골적인 냄새를 통해 새로이 등장한 인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켄바흐, 또 술을 자신 건 아니겠지요? 제발 부탁이니 내가 지금 맡고 있는 냄새는 양조장의 늑대인간들을 처리하고 왔기 때문이라고 해주세요.”
“제가 언제 기대에 부응해드린 적이 있기나 합니까? 마셨습니다. 계속 마실 거고요.”
자켄바흐라고 불린 남자는 한 손으로는 술병을 들어 입안에 흘려 넣고 다른 손으로는 이븐의 옆에 놓인 의자를 짚었다. 그가 그 위로 풀썩 앉자 의자가 삐거덕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이븐은 그가 잔베르 교구의 사냥꾼인 데릭 자켄바흐라는 사실을 알았다. 데릭이 말했다.
“거리에 있는 놈들은 오늘 낮에 정리가 끝났습니다. 그러느라 성당 내부는 오후에나 겨우 작업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요, 그런데, 교구장님.”
그렇게 말한 데릭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교구장의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려놓았다. 책상까지의 거리가 제법 있었는데도 앞으로 쓰러진 듯한 모양과 그의 거구는 그런 자세를 가능케 했다. 데릭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맡는 것만으로도 취기가 올라올 듯이 진한 술 냄새가 이븐에게도 뻗쳤다.
“보육원의, 성당 내부로 통하는 문이 막혀 있더군요.”
“그래서요?”
막달레나는 책상 위에 깍지 낀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대꾸했다. 충분히 숨기지 못한 적의가 말의 가죽 위로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교구장님께서 하명하신 일입니까? 문을 걸어 잠그고 물건을 쌓아 막으라고 지시하신 게 교구장님이 하신 짓··· 일이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했어요. 내게는 그럴 책임이 있으니까요. 남아있는 사람들의 피해와 감염을 미연에 방지할 책임 말입니다.”
책상에 엎드린 데릭이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그는 곧 몸을 일으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븐은 곁눈질로 데릭을 살폈다.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는 체구였으나 음주가 문제였는지 오래 전 먼발치에서 봤던 모습과 달리 배가 불룩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위로 술을 흘린 자국이 덕지덕지했다.
데릭이 말했다.
“늑대인간들이 뒤뜰로 들어왔던 모양이더군요. 저도 흔적들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늑대인간들은 아이를 물지 않습니다. 감염시키지 않는다고요. 그렇게 해서 늑대인간을 만들어봐야 전력이 손실되기만 하니까. 그래서 그 마물 놈들은 아이들을 먹어치웁니다. 애들 고기는 부드럽고 연하거든요.”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뭐지요, 자켄바흐 엽사님? 이 늙은이의 우둔함을 꾸짖는 것이 목적이라면 보다 적절한 시기가 있을 거라고 사료되는데요.”
막달레나가 이븐을 의식하며 말했다. 그러나 데릭은 말을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술 취한 사람이 으레 그렇듯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뒤뜰에서 보육원으로 통하는 문은 좁습니다. 장정 두 명만 들어가서 늑대인간들을 막고 나머지는 아이들을 구출할 수도 있었단 겁니다. 문을 닫아걸고 그 어린 것들이 산 채로 뜯어 먹히도록 내버려두는 대신에 말입니다. 문에··· 문에 손바닥 자국들이··· 너무 작아서 처음엔 뭔지도······.”
돌연 정신을 잃은 것처럼 데릭은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에게서 빠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븐은 떨리는 숨결을 통해 그가 울음을 참고 있단 것을 알아차렸다. 막달레나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켄바흐, 확실한 건 당신은 여기에 없었단 겁니다.”
경멸이라도 하듯 막달레나는 한쪽 눈언저리를 찌푸렸다. 데릭이 다시 한 번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야수의 털처럼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이 웃음으로 떨렸다. 들어 올린 그의 얼굴은 취기로 불그죽죽했다.
“그렇죠. 교구장님은 여기에 계셨고요.”
교구장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작성하던 서류를 마무리 지었다. 이미 데릭이 오기 전부터 작성하던 것이었다. 거기엔 이븐이 조건을 받아들일 경우 사면되는 죄목들도 적혀 있었다. 막달레나가 말했다.
“이븐 베르자크는 자켄바흐 엽사님도 아시겠지요. 이자를 ‘주워온’ 것이 당신이니 말입니다. 베르자크는 방금 교단의 사냥꾼이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냥꾼의 양성과 사제(師弟) 결연은 사냥단 고유의 권한이지만, 자켄바흐 당신이 이 일을 맡아줄 거라고, 이번에는 기대해도 되겠지요?”
데릭은 이제야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동하기 시작한 것처럼, 고개를 돌려 이븐을 뜯어보았다. 이븐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가볍게 목례만 했다. 데릭은 그와는 나눌 대화가 없다는 듯이 다시 교구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르치죠.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이게 옳은 일일지. 저 청년을 우리 같은 인간들로 만드는 게, 그게 과연 옳은 일일지 모르겠단 겁니다.”
*
우리 같은 인간들이 어떤 인간인지 이븐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마물을 잡기 위해 수녀를 미끼로 쓰는 인간, 동료라 해도 감염되는 순간 가차 없이 머리를 날려버리는 인간, 그러면서도 지켜야 할 것들을 속절없이 잃고 마는 인간, 적을 앞두고 서로를 속이는 인간······.
선택지가 많아서, 한 손에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넘쳐서 이븐은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없었다.
이븐의 스승이 되기로 한 데릭은 한 달하고 엿새 뒤에 죽었다. 아델라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냥 중에 잃어버리고 만 수녀,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잊을 수 없었던 그 수녀를 찾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사냥꾼이었다면 그는 동요 없이 감염된 아델라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데릭은 인간이었다. 인간의 이름을 그는 끝내 떨쳐내지 못했다.
이븐은 창가에 앉아 어둠이 낮게 깔린 마일스아이렌을 내려다보았다. 교황령의 가장 거룩한 심장에서 이븐은 신성보다 인간적 절망에 더욱 가까워진 듯했다. 칠흑 속에서 윤곽으로만 드러난 건물들이 비석처럼 보였다. 눈을 조금만 찌푸리고, 물기를 애써 닦아내지 않는다면 그 비석에 적힌 이름들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븐은 오른손을 오므려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쥐었다. 그는 데릭이 죽어가며 자신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이븐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소리 내어 읊조렸다.
“빛이 비칠 겁니다.”
9막 마침.
- 작가의말
개인적으로 9막은 지금의 『심연의 사냥꾼들』을 있게 만든 에피소드라 쓰고 난 뒤의 감회가 남다릅니다. 한 남자가 혈혈단신으로 늑대인간들에게 점령된 도시로 들어가 기적적으로 그들을 모두 물리친 뒤 자신도 감염되고 만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머릿속에 있었지만, 연재를 시작하고도 5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드디어 쓰게 되었네요.
네 번째로 추천하기 게시판에서 추천을 받았습니다. 정성 들여 추천글을 작성해주신 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항상 더 나은 글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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