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극3. 반역자(1)
막간극3. 반역자
“도스피앙은 뭐라고 하던가?”
칼 슈테허 장군의 말에는 이례적인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마흔을 넘기고서부터 가늘어진 장군의 머리칼은 새까만 염색약의 도움으로 중후한 멋을 유지하고 있었다. 귀족 출신답지 않게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부인과 사별한 뒤 남겨진 자리를 넘보는 뭇 여성들을 줄짓게 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에게 순교자라는 별명을 안겨준 것은 근엄하게 다문 입과 진중한 눈빛이었다.
그것들이 지금은 흐트러져 경련하고 있었다. 뢰헤에서부터 줄곧 말을 달려온 마티아스 소위는 자신의 상관이 이번 일로 정말 그의 별명과 같은 운명을 맞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몸을 떨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자신이 뢰헤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음을 알렸다.
“증거가 명백해서··· 구속은 막을 도리가 없다고 합니다.”
“무슨 증거!”
슈테허는 평정을 잃고 탁상을 내리쳤다. 펼쳐져 있던 지도가 둥글게 말리며 흙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마티아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지도를 주워들고 다시 탁상 위에 올려두었다. 지도의 서쪽에는 살바도스의 황제가 고용한 베소니아의 용병단이, 그리고 동쪽에는 게헤만 공화국의 의회군이 각각 자리하고 있었다.
소규모의 접전이 모두 세 차례. 전황은 가벼운 감기를 앓는 사람이 기침하듯 지지부진했고, 그런 식으로 지루한 대치가 두 달간 이어졌다.
“위민위원회(爲民委員會) 말로는 베소니아 용병단에 있던 첩자를 잡아들였답니다.”
“처음에는 날조된 문건들이더니 이제는 첩자를 잡았다고······.”
“말릭 상사라고 하는 남잔데, 장군님과 공모한 사실을 자백했다고 합니다. 적수에는 온통 그 얘기뿐입니다.”
적수는 세스페르를 필두로 하는 급진좌파의 기관지 이름이었다. 슈테허가 지휘관을 자처해 국경으로 온 것도 혁명에 비협조적인 인사들로 지목되어 적수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던 탓이었다.
“뭐라고 하던가?”
“장군님께서 전쟁을 장기화하신다고··· 시간을 끌고 있답니다. 리카드 황제가 얼음송곳 용병단에게 약속한 대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지는 것이고 거기에 장군님의 몫도 있다고, 그렇게 떠들고 있습니다.”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린 슈테허는 옷깃을 쥐어뜯었다. 차라리 늘 하던 대로 그를 겁쟁이라고 불렀더라면 그도 참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부정부패에 슈테허를 연루시키는 것은, 바로 그 부정부패 때문에 혁명을 묵과했던 그를, 그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혁명 원년, 왕궁 앞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 그는 발포를 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슈테허는 그러지 않았고 혁명의 불씨는 불길로 화했다.
“장군님!”
마티아스가 얼른 손수건을 꺼내들자 슈테허도 비로소 자신의 인중을 타고 흐르는 것이 코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슈테허는 손을 내저어 마티아스의 손길을 사양하고 그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코 밑을 닦았다. 손수건 위로 찍힌 핏자국에 병사들의 시신이 겹쳐 보였다.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에 슈테허와 마티아스가 동시에 막사의 입구로 시선을 옮겼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슈테허는 발걸음에 담긴 말들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힘을 비축해둔 듯이 진흙길을 이기는 장화에 둔중한 울림이 있었다.
천으로 된 막사의 입구를 젖히고 낯익은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뒤로 남자 하나와 경관으로 보이는 이들 둘이 따랐다. 슈테허가 여자를 보고 말했다.
“세스페르 의원.”
“오랜만에 뵙습니다, 슈테허 장군.”
엘레아노어 세스페르는 언제나처럼 허리까지 닿는 금발을 한 갈래로 질끈 묶고, 말상의 긴 얼굴엔 득의양양한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배가 짧고 등이 긴 검은 승마복은 그녀의 상징과도 같았다. 세스페르는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상 위에 올려놓고 마편으로 그것을 찰싹 때렸다.
“구속 영장이 나왔습니다. 뢰헤까지 함께 가시죠.”
“죄목은?”
세스페르가 영장에서 해당 부분을 찾아 마편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보자, 작부의 글 읽는 솜씨를 믿으신다면 저건 아마도 내통이라고 적힌 것 같네요.”
작부는 슈테허가 언젠가 세스페르를 가리켜 했던 말이었다. 왕당파와 함께 한 자리에서 의원 하나가 그녀를 폭도들의 여왕이라고 부르자 슈테허는 여왕은커녕 작부도 못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슈테허는 위원회 일로 바쁠 세스페르가 여기까지 직접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세스페르를 따라 들어온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경관 둘은 물론 슈테허를 호송하러 온 이들일 테고,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남자는 그를 대체할 인물인 듯싶었다. 풀을 먹여 빳빳하게 깃을 세운 군복이 제법 잘 어울리는 남자였지만 슈테허는 그자가 애송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들이라도 나온 듯 즐거이 미소 짓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한창이오.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는 법은 없소.”
“전쟁이라고요, 슈테허 장군. 전쟁이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아무리 무식쟁이 구두 수선공의 딸이라 해도 전쟁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세스페르의 쾌활한 어조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슈테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렇소? 무엇이오, 전쟁이라는 건?”
“전쟁은 시끄러운 거죠. 여기서 총성이 터지면 저기서 대포가 발사되고, 말이 달려 먼지를 일으키고 전령들은 바쁘게 부대 사이를 오가는 곳, 그런 곳이 전쟁터죠. 그런데 지금 이건 뭐죠? 총성은 어디에 있나요? 제가 귀를 먹기라도 한 걸까요?”
세스페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자신의 귓바퀴에 가져다 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연히 말소리 외에는 들릴 만한 것이 없었다. 그 꼴을 지켜보던 마티아스가 주먹을 부르쥐었다. 슈테허가 말했다.
“그건 전투지. 전투를 기대하고 오신 거라면 날을 잘못 택하셨소. 전쟁은 본질적으로 고요한 것이오. 행군, 야영, 보급, 작전 수립 그 어느 곳에도 세스페르 당신이 말한 소음이 끼어들 자리는 없소. 전쟁은 전투와 전투 사이의 침묵까지 모두 아우르는 것이외다.”
“혁명전쟁이에요, 장군. 이 전쟁은 대륙의 모든 인민을 해방시킬 혁명전쟁이라고요. 장군은 전쟁에 대해 잘 아실지 몰라도 혁명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는 게 없군요. 혁명은 들불 같은 거죠. 제가 오늘 여기서 본 건 장작이 쌓여 있는데도 불붙이기를 머뭇거리는 이들뿐이었어요.”
세스페르의 목소리는 말에 가하는 채찍처럼 카랑카랑했다. 그건 행동에 나설 것을 부추기는 목청이고 언변이었다. 단두대가 놓인 광장에 그녀가 서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몰려들었고, 한 차례 연설이 끝나면 군중은 그냥 흩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원했고, 만들어냈다.
“말릭 상사······. 그게 당신들이 잡아들인 첩자의 이름이라고 들었소. 베소니아 용병단 소속이라고. 그런데 어찌 그 신변은 의회가 구금할 수 있었소?”
“자세한 얘기는 뢰헤에서 모두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세스페르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나섰다. 슈테허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고 세스페르를 향해 다시 물었다.
“세스페르 의원, 말해보시오. 당신은 그걸 정말로 믿소?”
“검사가 기소했고, 판사가 영장을 발부했어요. 위원회의 일인으로서 대답해드릴까요? 네, 저는 혁명재판소의 판단을 믿습니다.”
“당신들이 을러댄 검사와 판사 말이오? 이 영장이란 것도 결국 재판소로 출근하는 길을 막고, 집 앞에 죽은 쥐를 가져다 두는 식의 협박으로 얻어낸 것 아니오? 뢰헤에 쥐가 남아나지 않겠소이다, 세스페르 의원. 생쥐 구제는 확실히 당신의 업적이오.”
혁명의 거두인 도스피앙이 명분과 구실의 정치가였다면 세스페르는 스스로를 실속의 정치가로 여겼다. 무슨 의원, 무슨 위원회 하는 따위의 자리를 챙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도스피앙이 그의 동료들과 정부를 꾸리고 있을 때 세스페르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답은 늘 그곳에 있었다.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민중의 뜻이지요.”
“그렇다면 그 민중이 틀렸소.”
“하!”
세스페르는 기가 찬다는 듯이 그렇게 외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방금 자신이 들은 슈테허의 말이 환청은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혁명이에요, 칼 슈테허! 민중을 부정하는 건 반혁명이라고요!”
“반이성보다는 그게 낫소.”
세스페르의 입꼬리가 올라갈듯 올라가지 않으며 경련했다. 그녀는 경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다가가 슈테허의 양팔을 하나씩 잡았다. 경관들을 저지하려는 마티아스를 향해 슈테허가 고개를 저었다. 등 뒤로 놓인 그의 두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입구까지 경관들의 인도를 차분히 따르던 슈테허가 걸음을 멈추고 세스페르를 향해 말했다.
“역사가 그대들을 심판하리다.”
세스페르는 연극적으로 코웃음을 한 번 친 뒤 대꾸했다.
“우리가 바로 그 역사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슈테허도 세스페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알고서 한 말이었다.
*
총성이 울리고 흙으로 빚은 표적이 산산조각 나며 땅으로 떨어졌다. 연소한 화약의 냄새가 콧속을 후볐다. 나이로드가 빈총을 쥐고 팔을 뻗자 곁에 서있던 남자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나이로드의 손에는 곧 장전된 다음 총이 들렸다.
“다음은 이시도라 국왕의 머리입니다.”
나이로드의 말에 로덴치오가 땅을 내려다보고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파일로드의 대주교인 시니안 살리오든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사로의 옆에 서있던 하인이 표적을 바꾸었다. 이시도라 국왕의 머리도 곧 잘게 부서졌다.
“이번엔 장 자네가 한번 쏴보게.”
나이로드가 장전된 총을 든 채 대기하고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장이라고 불린 남자는 검은 수단을 입고 있었는데 그를 둘러싼 교황, 추기경, 그리고 대주교와 비교되어 공작새 가운데 놓인 까마귀처럼 보였다.
“저는 이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장도 교황이 두 번 거절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인물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곧 기다란 머스킷을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자세를 잡았다. 겸양한 것치고는 제법 자세가 잘 잡혀 있었다. 총성이 울리고 탄환은 표적의 끄트머리를 맞혔다.
나이로드가 박수를 쳤고, 살리오든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장은 비뚤어진 안경을 바로잡고 교황과 대주교에게 차례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이로드가 손짓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권하자 그들은 천막 아래 마련된 테이블과 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의자가 왜 세 개뿐이지?”
나이로드가 음료를 들고 오는 하인을 향해 얼른 추궁했다. 하인은 발이 붙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가 대답 대신 딸꾹질을 시작했다. 병 안에 담긴 얼음들이 짤랑거렸다. 가련한 하인을 구하고자 나선 것은 장이었다.
“저는 서있는 것이 편합니다, 교황 성하.”
“그래도···”
“리로댕 사제도 자신의 직분에 맞는 위치에서 편안함을 느낄 겝니다.”
로덴치오 추기경의 말이었다. 그는 벌써 자신의 의자 뒤에 서서 등받이를 잡고 있었다. 다른 의자보다 방석 하나가 더 쌓여 있었고, 거기엔 우대보다 배려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테이블을 한쪽만 낮출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대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자리에 앉은 나이로드가 단어를 고쳐 문장을 반복했다.
“아니, 추기경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예하께서 보시기엔 어떠세요? 리카드 황제가 국왕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할까요?”
살리오든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로덴치오를 향해 물었다. 그녀에게는 어떤 심각한 주제도 잠깐의 여흥거리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리카드 8세가 빌세뇨에서 세 국왕을 모아 회담을 가진 일처럼 중대한 사안도 그녀의 음성만큼이나 부드러운 굴곡을 지닌 몸을 거쳤다 나오면 가벼운 잡담으로 탈바꿈하는 듯했다.
로덴치오는 대답 대신 나이로드 뒤에 선 장 리로댕 사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추기경은 그가 걸치고 있는 예복만 아니었다면 고리대금업자 같은 인상이었다. 등이 약간 굽고 목은 그보다 조금 더 굽었으며, 주름에 둘러싸인 눈은 아래가 둥근 반원 모양이어서 늘 상대를 노려보는 듯했다.
“앞으로 듣게 될 얘기를 감당할 능력이 제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추기경의 눈 덕분에 자신의 직분에 맞는 위치를 떠올려내는 데 성공한 것처럼 장이 말했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물러날 모양새를 취하자 나이로드가 말했다.
“내 옆에 늘 붙어 있으라고 특무사제라는 직함을 준 건데.”
“장도 쉬어야죠. 뭣하면 제가 교황 성하의 곁을 지킬 테니 염려 놓으셔요.”
“시니, 네가?”
“그럼요.”
장은 살리오든이 나이로드의 주의를 끌고 있는 동안 요령 좋게 물러갔다. 로덴치오는 그가 충분히 멀어진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 작가의말
‘삼 개월간’을 ‘두 달간’으로 수정했습니다. - 2018.11.19.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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