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막 2장 - 침대 밑의 괴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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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을 때 이븐은 이것이 또 다시 찾아온 악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저 앞에 주저앉아 있는 것은 한때의 연인이었으나 이제는 악몽의 여주인이 되고 만 레베카라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악몽은 그를 끔찍이도 지루하게 만들 뿐 더 이상 두려움에 떨게 하지는 못했다. 그건 그가 용기를 단련했던 때문이 아니라 사냥꾼이 됨으로써 악몽을 일상에 구현해냈던 덕택이었다. 꿰뚫리고 찢어지고 터지는 부상으로 점철된 일상 속에서, 밤의 악몽은 차라리 휴식이었다.
이븐은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레베카를 향해 걸어갔다. 울음소리. 레베카가 안고 있는 끔찍한 생물의 정체 역시 낯익은 것이었다. 그러나 레베카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이븐은 이 악몽이라는 것도 쉬이 타성에 갇혀 표백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스타샤.
데스마스크처럼 드러난 창백한 얼굴에 질려서 이븐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븐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주하지 않으면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도 있다. 그는 계속 걸어 나갔다. 스타샤가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
깨닫지 못한 새 울음소리는 그치고, 논리가 부질없는 꿈속에서 이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피가 큰 시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된 노인의 시체. 그 옆에 놓인 익숙한 지팡이. 이븐의 몸 안에서 불길이 번졌다.
이븐은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 빠르게 적응했다.
“깨울까 하던 참이었는데 잘되었군.”
이븐은 가빠진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다. 악몽의 여진(餘震)으로 가슴 가운데서 심장이 요동쳤다. 그가 들은 목소리가 웨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이븐은 얼른 탁자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분명 권총의 손잡이를 잡은 감각이 느껴졌는데도 또 다른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의 몸은 여전히 침대 위에 굳어 있었다. 몸이 여관의 싸구려 침대에 눌어붙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약을 썼으니 한동안 움직이지 못 할 거야. 괜히 무리하지 말고 내가 하는 얘기나 듣게.”
이븐은 재빨리 머릿속의 기억을 뒤져 그것이 최근에 들은 적 있는 목소리라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맹맹한 탓에 경박한 감이 있는 그 목소리는 랭데의 것이었다. 페르디낭 랭데. 헤레틱스, 그 중에서도 삼두회의 일원.
오랜 친우라도 되는 양,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그의 말투는 퍽 친근해져 있었다.
“우선 피츠독슨을 처리해준 일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하네. 골치 아픈 인간이었거든. 그리고 그때 내 행동을 용서해주길 바라. 그 인간이 이상한 소리라도 했다가는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지도 모르잖나. 우린 공통의 적을 앞에 두고 협력해야 하는 사이인데 말이야.”
“므스······ 므스믈······.”
이븐은 입술을 달싹여 웅얼거리는 소리를 뱉어냈다. 페르디낭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이븐의 얼굴에 자신의 귀를 들이댔다. 이븐은 그의 가증스러운 붉은 구레나룻이 자신의 코를 간질이는 것을 느꼈다.
“므싀!”
“아, 막심! 나도 소식 들었네. 유감이야. 좋은 친구였는데 말이지.”
조의를 표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페르디낭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븐은 자리에 앉는 그의 모습을 눈동자로 좇다가 머리가 아파져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네가 우릴 의심하는 것도 이해는 해. 그렇지만 우리도 막심을 죽인 이가 누군지 알아보려 노력하는 중이야. 필시 노블 다이스의 수하 중 하나였겠지.”
이븐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가위 눌린 듯 굳어있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손가락에 힘을 넣었다. 이븐의 몸이라면 페르디낭이 주입한 약물을 해독해낼 수 있을 터였다.
“어쨌거나 그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고 본론을 얘기하겠네. 자네가 일어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얼른 말하고 도망쳐 버려야지.”
그렇게 말한 페르디낭은 자기 농담에 흡족해진 사람처럼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는 곧 웃음을 멈추고 사뭇 진지한 투로 말했다.
“후작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네. 위치를 가르쳐 주도록 하지. 주의해야 할 사실은 후작이 잔뜩 약이 올라 있다는 거야. 자네와 붉은 머리 사냥꾼이 일전에 혼쭐을 내준 적이 있으니까. 거기다 후작은 노블 다이스의 처형단을 이끌고 있지. 준비되어 있는 상태의 후작과 맞붙는다면 전과 같은 요행을 바랄 순 없을 거야.”
이제 보니 페르디낭은 캐리온 후작과의 싸움을 눈으로 지켜본 듯했다. 만약 기척을 죽이고 염탐하는 것이 페르디낭의 특기라면, 막심의 마지막 전투를 지켜본 것도 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후작은 오펜하른에 있어. 거기서 다가올 싸움을 준비하고 있지. 오래 전 노블 다이스가 그 마을을 쓸어버린 뒤로 인적이 끊어져 제 집 드나들 듯 하고 있어. 오펜하른으로 가게. 단, 이 년 전의 비극을 재현해서는 안 되니 가능한 한 많은 사냥꾼들을 데리고 가도록 해.”
페르디낭이 말하고 있는 오펜하른의 비극이란 이 년 전 백작과 남작이 주민들을 모조리 잡아 죽인 일을 뜻했다. 여섯 명의 사냥꾼들이 그에 맞서 싸웠으나, 스타샤의 말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말았다.
“아, 그리고, 이 년 전 잔베르에 늑대인간의 군주 볼드윈을 보낸 게 노블 다이스라는 것도 알고 있나? 켈레넨스크에서 우리와 충돌한 뒤로 그놈들은 힘을 비축하기 위해 무고한 이들을 엄청나게 죽여 댔지. 오펜하른의 일도, 그리고 잔베르의 일도 그런 비축의 일환이었던 거야. 노블 다이스를 궤멸시켜 버리게, 늑대사냥개.”
어떤 둔중한 물체가 이븐의 머리를 내리친 듯한 느낌이었다. 이븐은 캐묻기 위해 입을 달싹여 보았으나 제대로 된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페르디낭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타이를 매만지며 떠날 채비를 했다.
“싸움이 끝나면 우리를 다시 찾아오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지금처럼 우리가 찾아가지. 우린 이 세계를 정화시킬 방법을 알고 있어.”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던 페르디낭은 잊고 있었단 것처럼 자리에 멈춰 서서 이븐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모크 공작은 죽이지 말게.”
페르디낭은 다시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아 당겼고, 마침내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이븐 역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페르디낭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넘어졌다. 무릎 뒤를 겨냥했으므로, 그리고 이것 역시 착각이 아니라면 조준이 꽤 정확했으므로 그런 반응은 예상외였다. 이븐은 침대 위에서 몸을 굴려 바닥으로 내려왔다.
가슴 아래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븐은 왼팔을 들어 침대를 짚으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썼다. 페르디낭은 무릎을 꿇은 채 문틈에 머리를 처박은 모양새였다. 다음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페르디낭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무슨 일인가?”
어느새 웨인은 페르디낭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 목에 지팡이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이븐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그를 향해 물었다.
“살아있습니까?”
웨인은 붙잡은 페르디낭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기색이었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페르디낭의 목이 힘없이 이리저리 꺾였다.
“자네가 와서 보게.”
이븐은 한 차례 넘어질 뻔했다가, 오히려 그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가까이서 살펴보니 그건 페르디낭이 아니었다. 그건 얼기설기 엮은 살점들로 페르디낭을 흉내 낸 생물이었을 뿐이었다. 그제야 방부제의 독한 냄새가 살점에서 배어 나와 코를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븐의 혀가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맸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이건··· 인형이군요.”
*
페르디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내려와 방의 구석에 둔 자신의 여행 가방을 향해 서둘러 갔다. 태연히 담배를 피우고 있던 여자가 의아해져서 그를 쳐다보자 페르디낭이 말했다.
“사냥개가 눈치 챘어. 여길 떠야 해.”
“뭐? 약은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어?”
여자도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페르디낭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탁상에 다가가 그 위에 놓인 물건들을 가방 속으로 쓸어 담았다.
“몰라. 제기랄, 로지아 레니스 그 여자가 그 동안 무슨 실험을 했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
“잘하는 짓이네요, 랭데 박사님. 일개 연구원 하나 제대로 계산을 못 하다니 말이야.”
페르디낭은 그렇게 말하는 여자를 쏘아보다가 돌연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콧속을 후볐다. 그러기를 잠시, 그의 손가락 끝에 촉수를 가진 희멀건 생물이 걸려 나왔다. 반투명한 생물의 대가리 속으로 시꺼먼 내장이 비쳐 보였다.
“이리 줘. 다시 쓸 수 있으니까. 그럼 몸도 두고 온 거야?”
“당연하지. 놈이 일어나서 총을 갈겼어. 아파 죽겠네.”
“그거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는 줄은 알고 그렇게 태평한 거야?”
여자는 페르디낭이 건넨 생물을 유리병 안에 담고 뚜껑을 닫았다.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던 촉수가 유리병에 담긴 액체 속에서 생기를 얻어 꿈틀거렸다. 여자는 물고 있던 장죽을 털어 비우고 마찬가지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얘기는 빠짐없이 전한 거지?”
“그래. 할 말 다 하고 나오던 중에 총에 맞았어.”
“그 얘기도?”
페르디낭은 외투에 팔을 꿰다 말고 여자, 아리아나 파르사드를 쳐다보았다.
“공작을 죽이지 말라는 거? 물론이지. 너무 이른 감이 없지는 않은데······.”
“그거 말고. 잔베르.”
“그 얘기도 했지. 지금쯤이면 복수심 때문에 눈이 돌아갔을 거야.”
아리아나는 돌아가는 꼴이 꽤 재미있다는 것처럼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가방 속에서 유리병들이 서로 몸을 부딪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사냥개 놈, 볼드윈을 구슬린 게 우리였단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돌변할지 기대되는데.”
“그런 건 기대 안 하는 게 좋아.”
페르디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베르자크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말로 떠올려 보려는 듯 아리아나가 문 앞에 멈춰 섰다. 페르디낭이 뒤에서 재촉했다.
“뭐해? 빨리 가자고. 서펜트 때문에 벌인 일이지만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애초에 서펜트가 족제비를 제대로 처리했으면 이럴 필요도 없는 거 아냐. 괜히 더 수상쩍게 찾아가서 변명이나 읊어야 하고 말이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꿍얼거리면서 문 밖으로 나온 페르디낭과 달리, 아리아나는 새벽 산책을 즐기는 사람처럼 양팔을 벌리고 폐부 깊숙이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녀가 노래 부르듯 읊조렸다.
“전쟁이야, 퍼디. 전쟁. 이제야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고.”
*
이븐과 웨인은 그들이 머물고 있는 파하넨의 주위를 한 시간여 말을 타고 살폈지만 페르디낭은커녕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페르디낭이 파하넨에 있을 거라는 가정에 이븐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그들이 조사와 추격을 포기하고 비어있는 홀에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는 까닭이었다.
“막심의 유언은 공작을 죽이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랭데는, 아니 그의 꼭두각시는 제게 찾아와 공작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군요.”
“한 가지는 확실해졌군. 에카르트를 죽인 게 헤레틱스라는 것.”
이븐의 말을 웨인이 받았다. 가능성은 이미 제기되었지만 사실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몇 가지 우연이 겹쳤던 덕에 이븐은 거대한 음모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다. 피츠독슨의 저택에서 게라르와 페르디낭의 대화를 엿들었던 일, 그리고 막심이 칼에 찔리고도 유언을 남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줬던 것이 주요했다.
“세계를 정화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켈레넨스크에서 마물이 돌연 사라졌던 것처럼 전 세계의 마물을 한꺼번에 없앨 방법이 있다는 걸까요?”
“정말로 그런 방법을 알고 있다면, 에카르트가 왜 그들에게 협조했는지도 이해가 돼.”
이븐은 다시 한 번 막심의 유언을 곱씹었다. 공작을 죽이고, 서펜트를 막아서 문을 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헤레틱스가 막심을 속였군요. 그렇다면 그들의 계획은······ 세계를 정화하는 것 따위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계획은 심지어 마물들의 통솔자인 노블 다이스조차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고······.”
이븐은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페르디낭이 그의 몸에 썼던 약 때문인지 두통이 사고를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븐은 곧 또 다른 조각을 찾아내어 주어진 단서들 사이에 끼워 넣을 수 있었다.
“마물의 존재 가치는 확장에 있다고 믿는 이들. 헤레틱스는 인류에 대한 이교도로군요.”
카일로파드 자작과 대화를 나눈 건 이븐이었지 웨인은 아니었으므로 늙은 사냥꾼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븐은 그러나 자세히 설명해주는 대신 자신의 머리를 연신 두드리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문을 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문을 열지 못하도록······. 그렇다면 문이라는 것도······.”
“그 문이라는 걸 열면 마물이 쏟아져 나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웨인은 금세 이븐의 추론을 따라왔다. 그러나 이븐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닐 겁니다. 그보다 더,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일 겁니다. 에드가드 바이스게르버는 심연에 대해 얘기했죠. 자기네들은 심연에 뛰어드는 이들이라고 말입니다. 게라르도 피츠독슨은 인간의 육신을 짜기워 마물을 만들었고, 헤레틱스의 또 다른 학자는 본래 인간이었던 카일로파드를 마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븐은 식탁에 반쯤 엎드린 상태에서 깍지 낀 손 위로 턱을 올렸다. 머릿속으로는 지금껏 얻은 모든 정보와 단서들을 각자의 자리에 맞춰 넣는 중이었다. 이윽고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다시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깍지 낀 손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 자신도 아직 무슨 의미인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로, 이븐은 천천히 그가 내린 결론을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합일. 헤레틱스는 문을 열어서 마물과 인간의 경계를 완전히 지우려는 겁니다.”
- 작가의말
당분간은 글이 완성되는 대로, 본래 연재 시간이었던 낮 12시를 데드라인으로 삼고 그 전에 올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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