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막 3장 - 꼬리잡기(2)
10막 3장(2)
이븐은 웨인의 답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이븐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기다림이 길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다림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의 존경받아 마땅한 스승이 답변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븐을 괴롭게 했다. 그는 웨인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면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쓰게 웃었다.
이븐에게는 웨인의 답을 들을 용기가 없었다. 부정하는 그의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울리히 하르트만이 어째서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고 결국엔 감염됐는지······.”
“그만!”
그렇게 외쳐 이븐의 말을 끊은 이는 웨인이 아니라 뤼시앵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함 소리에 놀란 사람처럼 한 차례 몸을 떨고는 말을 이었다.
“나도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닙니다. 헬라이드 당신 표정을 보아하니, 그리고 저 애송이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무슨 비밀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거 아십니까? 난 조금도 관심 없습니다. 궁금하지도 않다고요. 그러니 베르자크, 너도 입 다물어. 머리 아프게 쫑알대지 말란 말이야.”
“뤼시앵, 저도 물론······.”
뤼시앵은 자신의 앞에 보이지 않는 장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또 그것을 찢어발기려는 것처럼 양팔을 들어 휘둘렀다. 그 억척스러운 몸동작의 기세에 눌려, 이븐은 다시 한 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입 닥치고 있어, 베르자크. 그래,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도 알아, 안다고. 힘들더라도 진실과 대면해야 한다는 뻔한 얘기겠지. 그럼 나도 뻔한 얘기 하나 해줄까? 진실은 칼이야. 하지만 이건 비유 같은 게 아니지. 아니고말고. 진실은 피를 흘리게 만들어. 피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나 진실을 찾는 거지. 그러면 너는 또 진실에 수반되는 고통은 건전한 거라고 말하고 싶어 하겠지. 아니, 아니야. 그건 진실의 칼자루를 쥐고 그걸 흔들어대는 데서 삶의 기쁨을 발견하는 놈들이 주워섬기는 변명이라고.”
뤼시앵은 지치지도 않고 그 긴 말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러고도 그는 할 말이 남은 사람처럼 핏발 선 눈으로 이븐과 웨인을 번갈아 살폈다. 그건 누구든 자신의 말에 끼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로 읽혔다.
그러나 뤼시앵의 다음 말에 이븐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거짓은 세상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만한 곳으로 만들어. 그러니 제발, 진실의 사도라도 된 양 자기 모습에 도취돼서 남의 집을 두드려 부수지 말라고. 그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들은 실상 죽어가고 있는 이들이지요. 그런 이들은 자신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거짓의 온기에 취해 천천히 질식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고통을 가벼이 여기지 마, 사냥개. 너야 그런 몸을 갖고 있으니 모든 것들이 견딜 만한 것처럼 보이겠지. 고작 버티는 게 전부인 사람도 있다는 걸 잊으면,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폭력적으로 변하고 말아. 제 키가 크다고 다른 놈들을 잡아다 깊은 물속으로 끌어당기는 거야. 어째서 빠져 죽은 거지? 물이 이렇게나 얕은데, 이 따위 헛소리나 지껄이고 말이야.”
그로서는 이례적으로, 뤼시앵은 이븐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븐은 뤼시앵의 눈에 초점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인 듯 탈력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을 내려놓았다.
“인간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아.”
그것으로 그 날의 언쟁은 끝이 났다.
*
“그래서?”
“그래서라니?”
스타샤는 장난기 서린 동료의 말에 곧장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스타샤의 동료, 테니아 브록센은 뒷짐을 진 채로 슬며시 다가와 스타샤를 어깨로 가볍게 밀었다. 얼굴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우리 스테이시, 다 컸네. 시집보내도 되겠어. 이 언니는 네가 자랑스럽다.”
“얼굴에 묻은 피나 좀 닦고서 얘기해. 웃으면서 그러니까 소름 끼친다고.”
스타샤는 진저리난다는 듯이 테니아를 밀치고 걸음을 재촉해 앞질러 갔다.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문질러 닦은 테니아는, 이제 피가 번져 꼭 홍조로 물든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한 갈래로 묶은 스타샤의 붉은 머리칼에도 피가 엉겨 붙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테니아는 말의 꼬리를 손질하듯 손수건으로 스타샤의 머리칼을 닦아 주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부펜하르크엔 일이 산적해 있었다. 그 동안 테니아가 그 많은 임무들을 어떻게든 혼자서 해치워냈다는 사실에 스타샤는 존경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물론 정말로 테니아 혼자 부펜하르크의 모든 마물들을 상대했을 리는 없었을 터였으므로, 그건 곧 제법 반가운 재회로 이어졌다.
“그럼 저는 올라가보겠습니다.”
스타샤와 테니아 뒤에서 멀찍이 떨어져 따라오던 허드 기스데본 구마사제는 머리를 꾸벅여 보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사제복 위로 말라붙은 피가 번들거렸다. 테니아는 루퍼트와 스타샤가 각기 다른 이유로 그웬돌라드로 떠나자, 그 공백을 사냥단 외부 인력의 도움으로 채워 넣었던 것이다.
테니아는 구마사제단과 큰 마찰을 겪지 않는 거의 유일한 사냥꾼이었다. 스타샤는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는데, 도무지 안 해본 일이 없을 것 같은 테니아의 기다란 전직(前職) 목록에 구마사제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웨인이랑 이븐까지 오면 다섯인가?”
“사냥꾼 넷에 사제 하나, 다섯 맞지.”
테니아가 합쳐서 헤아린 머릿수를 스타샤가 구태여 다시 나눴다. 이 년 전 허드가 스타샤에게 꽤 좋은 인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과는 별개로 그녀에게 구마사제는 여전히 껄끄럽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집단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스타샤가 보기에 부족한 역량을 키울 생각은 없이 그저 우는소리만 늘어놓는 구마사제단은 오래 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야 할 유물이었다. 사냥단의 출중한 실력과 교단의 지원 사이에는 명백한 인과 관계가 있었고, 구마사제들이 그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염치없는 짓이었다.
이런 그녀의 입장은 루퍼트를 쫓던 중 만났던 또 다른 구마사제의 영향으로 더욱 강경히 변했고, 교단의 복귀 명령을 거부하며 수도에서 뻗대고 있는 사제단의 최근 동향에 이르러서는 거의 폭발 직전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녀는 언제나 솔직했지만— 구마사제라면 누구든 하나 붙잡고 당신들 아주 뻔뻔한 인간이라며 분풀이를 하고 싶어 몸이 달아 있었다.
“너도 참 여전하구나. 허드한텐 왜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던 거야?”
“내가 뭐?”
스타샤는 이번에도 대답을 반문으로 갈음했지만 테니아의 물음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부펜하르크의 밀린 업무들을 처리하는 요 며칠간, 괜스레 허드를 찔러 그로 하여금 사냥단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을 주문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 과묵한 구마사제는 스타샤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답을 한 적이 없었다. 그건 그가 스타샤를 한심하게 여겼기 때문도 아니었고, 그저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정말로 그렇겠지요, 따위의 맥 빠지는 답변을 표정으로 대신한 것이어서 스타샤의 성질머리를 더 돋웠다.
“뭐야, 왜 따라 들어오는 건데?”
스타샤가 닫으려는 문을 테니아가 붙잡자 예상했던 반응이 바로 튀어나왔다. 테니아는 샐샐 웃으며 스타샤를 방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 얘기 좀 더 해봐. 전설 속의 늑대사냥개는 사석에서도 전설적인지 궁금하다고.”
“전설은 무슨 놈의 전설. 만나보면 실망할걸.”
“왜, 못생겼어?”
그렇게 묻는 테니아의 태도가 퍽 진지해서 스타샤는 한숨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외투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묶은 머리를 풀었다. 갇혀 있던 몸의 열기가 밖을 향해 쏟아졌다가 다시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냥 우리 같은 인간이라고. 알아, 마물의 피가 반쯤 섞였겠지. 근데, 그냥, 인간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피 흘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아픈 상처도 있고 어떨 땐 농담을 던지다가도 또 어떨 땐 더없이 진지해져서··· 의심하기나 하고 말이야······.”
“의심?”
“있어, 그런 게.”
테니아는 더 캐물으려다 스타샤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바꿔먹은 눈치였다. 또 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그들의 대화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테니아가 다가가 문고리를 당겼다.
“내가 방해했나?”
“아니에요, 레온. 들어오세요.”
레온이라고 불린 남자는 테니아가 비켜준 틈으로 들어오는 대신 품 안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건 밀랍으로 봉한 서신이었다.
“이것만 전해주면 돼.”
“누구한테서 온···?”
테니아는 부펜하르크 지역의 연락원 레온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녀가 서신을 넘겨받기 위해 손을 뻗자 레온은 그것을 건네주는 대신 다시 품 안으로 거둬들였던 것이다.
“알렉쟝드르가 꼭 스타샤 손에 전해주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말이야. 이해 좀 해주게. 나도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몰라.”
테니아는 갈 길 잃은 손을 허공에서 꼼지락거리며 스타샤 쪽을 쳐다보았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던 스타샤가 일어나 다가왔다. 그녀는 서신을 넘겨받으며 레온에게 물었다.
“알렉 그 아저씨는 괜찮아요?”
“다리를 좀 절기는 하는데··· 알잖나. 이 나이에 몸이 상하면 잘 아물지도 않는 거.”
“알렉이 다쳤었어?”
스타샤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서신을 살폈다. 밀랍에 새겨진 인장은 뿔피리, 사냥단의 상징이었다.
“그럼, 확실히 전했네.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말라고.”
“내가 언제 그런 적이나 있어요?”
스타샤는 이제 의심 받는 일 따위에 질렸다는 것처럼 손을 저어 레온을 돌려보냈다. 테니아는 스타샤가 봉랍을 뜯고 그 내용을 읽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스타샤는 곧 서신을 테니아에게 건넸다.
“뤼시앵이 같이 온다는데.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제자까지 데리고서.”
서신을 꼼꼼히 읽는 테니아를 향해 스타샤가 말했다. 서신은 케넌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가 테니아를 믿지 않기로 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스타샤는 테니아를 의심하느니 차라리 케넌의 판단을 의심하는 편이 더 낫다고 믿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이번에는 스타샤의 예상대로 테니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신의 내용에 의문을 표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운 빛이 노정했다. 스타샤가 입술을 한 번 짓씹었다가 힘준 발음으로 대답했다.
“적힌 그대로야. 막스는 헤레틱스와 내통했어.”
테니아는 서신을 양손으로 붙든 채 서서히 뒷걸음질 쳐 의자에 털썩 앉았다. 주름을 눌러 펴려는 것처럼 그녀는 세운 손끝으로 자신의 미간을 연신 매만졌다.
“뭣 때문에?”
“몰라. 전당 찾아가서 물어보시든가.”
스타샤는 허리띠의 칼집을 풀어 벽에 기대어 놓았다. 그녀는 그 칼이 적을 겨누는 데에만 쓰이기를 바랐다.
“지금 설명해줄 기분이 아니라면, 그래, 적절한 때가 있겠지. 막심도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근데 더 이해하기 힘든 건 뤼시앵을 여기로 보낸 게 케넌일 텐데······.”
테니아는 말을 멈추고 자신이 서신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듯 다시 내용을 읽었다. 서신의 내용이 그 사이에 바뀌었을 리는 없었으므로 그녀가 가졌던 의문도 그대로였다.
“뤼시앵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건 또 무슨 이유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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