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막 4장 - 완벽한 계획(1)
10막 불발
4장 완벽한 계획
“이 건물은 아직 남아있습니까?”
이븐은 지도 위에서 회관이라는 글씨 옆에 그려져 있는 네모난 도형을 가리키며 물었다. 테니아의 말에 따르면 지도는 이 년 전에 썼던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말을 부연하듯 지도의 끄트머리에는 압착된 꽃잎처럼 갈색 핏자국이 찍혀 있었고, 글자는 최근에 다시 덧입힌 듯 희미한 잔영이 남아 있었다.
“아마 그럴 거예요. 남작의 능력은 밀폐된 공간에서 최대의 효율, 그러니까 최악의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 개활지로 끌어내려고 애썼거든요.”
테니아는 검은 단발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답했다. 이븐보다 적어도 서너 살이 많은 듯한 테니아는, 그러나 그녀 특유의 붙임성 때문에 함께 있는 이들과 비슷한 연배로 느껴지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가령 웨인과 대화할 때 그녀는 예순 먹은 노인처럼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고, 안체와 있을 때면 그녀보다 한두 살 많은 친언니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그 반대가 될 겁니다. 지붕이 낮고 장애물이 많은 곳에서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캐리온 후작이 그런 곳에서 싸우려고 할까요? 후작의 능력은 후작 자신이 제일 잘 알 텐데요.”
이븐의 말에 반론을 제기한 건 안체였다. 별로 기발할 것 없는 반론이었지만 테니아는 제법이라는 듯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격려에 자신감을 얻은 안체가 이어 말했다.
“거기다가 후작이 오펜하른에 머물면서 건물들을 자신의 전투 방식에 맞게 뜯어고쳤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되고요.”
“좋은 지적이야. 그건 스타샤랑 웨인이 돌아오면 알 수 있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마물을 우리가 원하는 사냥터로 끌어들이려면 말이야.”
테니아가 안체의 분석에 맞장구쳤다.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수습 사냥꾼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 주었다.
스타샤와 웨인은 척후의 역할을 맡아 오펜하른으로 먼저 떠났고, 뤼시앵과 허드 역시 사냥에 필요한 물품을 구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실정이었다. 아직 작전의 얼개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뤼시앵의 불만은 이해할 만한 것이었지만 다른 사냥꾼들이 계획을 밀어붙여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왜 자신을 스승과 떨어뜨려놓았는지에 대해 알 길이 없는 안체가 열성적으로 답했다.
“마물에게 상대가 약하다는 확신을 심어줘야죠. 우선 사냥감이 되지 않으면 절대 사냥꾼이 될 수 없으니까요.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는 계산, 쫓아가 끝장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을 마물에게 줘야 해요.”
“좋아. 뤼시앵이 잘 가르쳤네.”
이븐은 안체와 테니아가 말을 주고받는 동안 다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큰 길과 건물의 위치만 대강 그려진 지도를 뚫어지게 본다고 해서 쓸 만한 작전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테니아의 필체로 적힌 ‘실제보다 길게 표시됨’, ‘도랑이 있음, 폭은 한 팔’ 따위의 메모도 큰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븐은 피츠독슨의 저택에서 있었던 싸움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그건 싸움이라 부르기엔 너무 짧은 충돌이었고, 그들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났던 탓에 서로의 실력을 충분히 가늠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엔 우리 편의 수도 만만치 않게 많고, 그렇다면······ 제가 맡게 되나요?”
안체 나름의 작전 수립이 질문으로 끝나자 테니아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가 곧 경악 섞인 반응을 보였다.
“뭐? 아냐. 그럴 리가.”
안체의 말은 그녀에 대한 뤼시앵의 대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했으므로 테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군주급 마물을 상대로 수습 사냥꾼을 내보내는 일은 없어. 그건 그냥 자살하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니까. 둘째로 그럴 일은 없지만, 안체 너를 미끼로 쓴다고 해도 그건 너무 뻔한 함정이야. 후작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너처럼 어린 사냥꾼의 뒤를 쫓아가지는 않겠지. 마지막으로 그 역할에는 더 적합한 사람이 있어. 그렇죠, 이븐?”
이븐은 지도에서 눈을 떼고 테니아와 안체를 번갈아 살폈다.
“그렇습니까?”
“왜 이러세요. 당신만큼 적합한 사람도 없다고요. 쫓기는 중에 부상을 입어도 버텨낼 능력이 있고, 무엇보다도 후작이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쫓아가고 싶어 할 사냥꾼이 이븐 말고 누가 있겠어요?”
모르델반트에서 카일로파드의 숨통을 끊은 것도, 그리고 피츠독슨의 저택에서 후작으로 하여금 치욕적인 줄행랑을 놓게 만든 것도 이븐이었으니 테니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븐이 반문했던 것은 테니아가 얼마나 냉철한 인물인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븐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아서, 테니아는 동료의 목숨도 얼마든지 판돈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인이야 자주 쓰는 전술이니 거기에 대해선 의문을 표할 일도 없겠습니다만, 어디로 끌어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싸움이 벌어질 곳을 적이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함정이라는 것도 그 형태가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고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스타샤와 함께 맞서 싸워봤다면서요.”
이븐은 탁자 위에 놓인 잔의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잔으로 눌려 있던 지도가 둘둘 말렸다가 안체의 손에 의해 다시 펴졌다.
“그 방향을 자유자재로 통솔하는 후작의 까마귀 떼 공격에는 마땅한 대비책이 없습니다. 뤼시앵은 그런 공격에 제가 나름의 강점을 가지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 날아다니는 것들을 쏘아 맞히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권총에는 탄환이 각각 다섯 개씩 장전되어 있고, 후작의 까마귀 떼는 기십 마리를 가뿐히 넘습니다. 오히려 날붙이가 더 유효할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뤼시앵의 말대로 폭약을 매설하는 편이 나을 듯싶고요.”
“하지만 그건 여의치 않죠. 이븐 당신의 말대로 적이 위치를 선점하고 있으니까요.”
이븐은 테니아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뒤 설명을 이어갔다.
“다행인 점은 한 번의 공격은 한 방향으로만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충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또 후작에게는 전신을 까마귀들로 변이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본체는 존재하는 듯합니다. 의식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다른 까마귀들을 통솔하는 본체 말입니다. 그리고 이 본체는 다수의 까마귀를 부릴 때 공격에 취약해지는 것 같고요.”
블런더버스의 폭발은 분명 파괴적인 위력을 지녔을 테지만, 후작은 군주급 마물이었다. 총기의 폭발에 팔이 날아갈 만큼 연약한 몸을 지니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므로 이븐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였다.
“헤르돈 교구에서 보내준 보고서는 후작을 검은 머리의, 풍만한 몸을 지닌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스타샤와 함께 싸웠던 날 마주했던 후작은 기스데본 사제만큼이나 말랐었죠. 다모크가 후작과 싸운 이후에 후작의 신변에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보다는 까마귀를 체외로 전개하는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까마귀를 얼마나 뽑아내느냐에 따라 몸매를 조절할 수 있다는 거죠? 탐나는 능력인데요. 아무튼 정리해보자면 까마귀를 최대로 전개하게 만든 다음, 약해진 본체에 타격을 가하자는 말씀이시군요.”
이븐의 설명을 테니아가 요약했다. 이븐은 점차로 작전이 형태를 갖춰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덧붙여서 후작이 만들어낸 까마귀들과 후작 자신의 본체를 떨어트려놓을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격벽해서 둘 사이를 막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겠군요. 무엇보다도 우리가 까마귀라고 말하는 것들도 사실은 마물이잖아요?”
물론 그 사실은 그렇게 말한 테니아보다 이븐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살진 새들의 부리에 속수무책으로 몸이 찢겨나가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뒷목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스승님이 방법을 알고 계실지도 몰라요. 아시다시피 스승님은 그런 방면으로 정통하시니까요.”
“우리들끼리 있을 땐 그냥 뤼시앵이라고 해도 돼.”
안체가 테니아를 향해 예의바르게 고개를 꾸벅였다. 이븐은 창밖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그는 이제 본론을 꺼낼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뤼시앵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안체 양, 뤼시앵이 로스키르헨이나, 로스키르헨에서 마일스아이렌으로 오던 중에 특별히 접촉한 사람은 없습니까?”
“네··· 네?”
안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므로 이븐은 무엇인가가 있기는 한 모양이라고 지레짐작하며 천천히 접근했다.
“뤼시앵이 갑자기 저와 웨인을 돕겠다고 나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어서 말입니다. 안드로스 단장님이 설득해서 보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뤼시앵은··· 그렇게 열성적인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스승님께 그런 말 마세요, 베르자크 엽사님.”
이븐으로서는 언젠가 뤼시앵이 자신에 대해 했던 말을 반복한 것뿐이었지만, 그는 안체가 보여준 의외의 반응에 재빨리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경솔했군요. 하지만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뤼시앵이 아직 로스키르헨에 있을 때, 안체 당신에게 복귀한 뒤의 임무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까? 마일스아이렌으로 돌아간 뒤에는 어떤 임무를 맡을 생각이라거나 하는 것들 말입니다.”
“아뇨, 저는 사실······.”
테니아는 지도를 보는 척하고 있었지만, 이븐은 그녀가 곁눈질로 안체를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죄송해요, 이븐. 스승님, 그러니까 뤼시앵이 없는 자리에서 그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안체의 말을 들으며 이븐은 답을 구하는 계산식에 몇 가지 항들을 수정했다. 뤼시앵에 대한 안체의 존경심을 음수 아닌 양수로 고치고, 말을 삼가는 그녀의 태도도 더 높게 잡았다. 그러나 이븐은 계산을 끝마칠 수 없었다.
안체가 그를 똑바로 쏘아보며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저를 곤란하게 만들고 계세요.”
“그래요, 이븐. 안체 입장도 생각해야죠. 제가 당신한테 웨인에 대한 험담을 하라고 하면 하시겠어요?”
테니아가 얼른 끼어들어 중재했다. 이븐은 어깨를 으쓱인 뒤 답했다.
“웨인에 대해서라면야 일러바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얼마든 험담을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까. 어쨌든 안체 당신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뤼시앵이 이 임무에 자원한 것에 대해서, 그에게 복안이 있을 거란 의심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뤼시앵에 대해 잘못된 인상을 갖고 있다면, 이를 수정해주는 것도 제자로서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문제가 있다면 그 분과 직접 대화로 해결하시는 편이 좋겠다는 게 부족한 제 의견이에요.”
안체의 딱딱한 대꾸에 이븐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는 체념한 것처럼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조금 불분명해진 발음으로 이븐은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만 답해주십시오. 제가 말하는 다음의 이름들 중에 최근 들어보신 게 있는지 말입니다. 헤레틱스, 서펜트, 페르디낭 랭데······.”
이븐은 물었던 담배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안체 쪽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는 이름들을 다시 읊었다. 안체로 하여금 움찔거리게 만든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
“찾았다.”
그렇게 말하며 눈을 뜬 주사위의 다섯 번째 눈, 캐리온 후작은 그녀의 명령을 받들 이를 찾아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건 커다란 덩치의 남자 하나와 소녀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후작은 물론, 덩치 큰 남자를 향해 말했다.
“뒷산에서 어슬렁거리고 있군. 두 놈이야. 노인네랑 빨간 머리. 빌어먹을 놈들. 길목이란 길목은 다 지키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깔끔하게 벗겨진 머리에 검은 피부를 지닌 근육질의 남자는 후작의 말이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시해도 좋을 혼잣말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턱수염을 긁적였다.
“어쨌든 찾았으니까 됐어.”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덩치에 어울리는 굵직한 저음이 남자의 입으로부터 나왔다. 캐리온은 팔을 뻗어 남자를 가리켰다. 그녀의 팔을 두르고 있던 의복 위로 검은 깃털이 자라나고, 근육이 솟아난 듯 부풀어 오른 팔뚝은 이윽고 까마귀를 토해냈다. 까마귀는 방을 가로질러 남자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당연하지. 위치를 안내해줄 테니까 네가 이끄는 놈들을 데려가서 죽여 버려. 죽이는 게 우선이고 감염은 상황을 봐서 하라고. 그것들이 없어도 전력은 이미 충분하니까.”
남자는 고개를 꾸벅여 보이고 뒤를 돌아 문을 향했다. 캐리온이 그를 불러 세웠다.
“아냐, 그걸론 부족해. 볼프강과 함께 가. 확실히 끝내버려.”
남자가 떠나고 문이 닫히자 캐리온은 이제 남은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녀 역시 후작이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소피, 그 쪽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캐리온은 남자에게 그랬던 것과는 달리 무척 부드러운 어조로 어르듯 소녀에 물었다. 소공녀 소피아는 눈을 뜨고 캐리온 쪽을 쳐다보았다가 면목이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소공녀가 우물쭈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캐리.”
캐리온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소공녀는 무릎 위에 모아 쥔 두 주먹에 더욱 힘을 넣으며 울먹였다.
“망했어.”
“뭐?”
캐리온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날카로웠다. 소공녀의 목소리는 더 작아졌지만 그녀가 한 말은 분명히 들렸다.
“사제를 죽여 버렸어.”
- 작가의말
다섯 번째로 추천글을 받았습니다. 추천글을 작성해주신 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더 진심을 담아, 더 나은 글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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