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막 4장 - 완벽한 계획(3)
“무슨 소리야, 그게?”
뤼시앵이 얼른 물었다. 은색 머리띠로 금발을 넘겨 드러낸 이마에는 땀이 엷게 배어 있었다. 이븐은 그가 몸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짙은 향수 냄새 아래로 피 비린내가 낮게 깔려 있었다.
“후작은 오펜하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치 우리를 도발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게는 노블 다이스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치욕의 땅을 설욕의 땅으로 바꿀 기회를 너희들에게 주겠다. 그러니 달려들어서 우리를 사냥해라.”
이븐은 뤼시앵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테니아와 안체에게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거기다가 후작은 자신의 위치를 숨기는 데에 그다지 공을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거 말인데요, 이븐. 대체 당신과 웨인은 후작이 있는 위치를 어떻게 알아낸 거죠? 제가 담당하는 지역인데도 저는 당신들이 오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어요.”
테니아의 말이었다. 허드의 시체를 확인한 뒤로 그녀는 무척 혼란스러워 보였다. 테니아는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를 잃고 짙은 갈색 눈동자에 조바심을 한껏 담아 이븐을 쳐다보았다.
“헤레틱스입니다. 헤레틱스의 일원이 제게 찾아와 후작이 오펜하른에 처형단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파하넨에 머무는 동안 그쪽에서 접근해왔고 일방적인 통보여서 뒤쫓을 순 없었습니다.”
“맙소사, 이븐. 그걸 왜 지금······?”
왜냐하면 지금이니까. 그러나 이븐은 테니아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뤼시앵을 향해 말했다.
“저를 찾아왔던 건 페르디낭 랭데라는 사람입니다. 붉은 머리에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기르고 나이는 사십대 중반쯤. 뤼시앵, 이 자를 알거나 본 적이 있습니까?”
확실히 스승은 제자보다 나았다. 뤼시앵은 랭데라는 이름을 듣고도 안체처럼 몸을 움찔거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히 질문을 질문으로 되받았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헤레틱스라는 집단도 너랑 빨간 머리가 처음 발견한 것 아냐?”
“스타샤.”
“뭐?”
“스타샤라고요, 뤼시앵. 빨간 머리가 아니라 스타샤.”
테니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뤼시앵은 집어치우라는 것처럼 허공에 손을 내젓고 이븐을 향해 말했다. 시체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그는 윽박지르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사제가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인지나 설명해! 우리 중에 이 자식처럼 감염된 놈이 또 있을 거라는 말이야?”
“기스데본 사제가 감염되었단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말했잖아. 덤벼들었다고! 저 자식이 먼저 덤벼들어서 치고받고 싸우는 와중에 은이 몸에 닿았는데 살이 탔어. 죽여야 하나 고민했는데 차라리 잘됐지. 제압하고 나서 이유를 캐물으려니까··· 갑자기 저 모양이 됐어. 머리가 터졌다고.”
복잡한 상황, 난데없는 죽음. 그러나 이븐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비린 흉계의 전모를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사냥단, 노블 다이스, 그리고 헤레틱스의 삼파전은 자신을 제외한 둘을 싸움 붙여 약화시키려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헤레틱스는 사냥단을 끌어들여 노블 다이스를 공격하게 만들었고, 후작은 이 도전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건 후작에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븐은 자신에게로 주의가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후작을 찾은 게 아니라 후작이 우리를 여기로 부른 겁니다. 이 과정에서 헤레틱스가 개입하긴 했지만, 그들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기스데본 사제 때문에 어떻게든 알게 됐을 겁니다. 후작은 우리가 우리의 머릿수를 믿고 덤벼들길 원했을 겁니다. 충분히 깊이 끌어들인 다음 감염시켜둔 이들을 이용해 전방위로 우릴 포위할 셈이었던 거죠.”
“그럼 사제님이 스승님을 공격한 이유도 감염시키려 했던 거군요.”
안체의 말에 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혼란스러워 보이긴 테니아와 마찬가지였다. 이븐은 화약고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불을 댕기기라도 하면 모조리 터져버릴 것 같은, 화약으로 가득 들어찬 창고 속에서 그는 손을 움켜쥐어 불씨를 죽여야 했다.
뤼시앵이 돌연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확인해야겠어. 우리 중에 감염된 게 누군지 알아야겠다고. 살에 은만 갖다 대면 확인될 일이야. 나부터 할 테니까 잘 봐두라고.”
“아뇨, 뤼시앵. 그러지 마십시오.”
“뭐?”
이븐은 뤼시앵을 향해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긴장으로 팽팽히 당겨진 근육이 손아귀 속에서 느껴졌다. 뤼시앵은 잡힌 팔과 이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뤼시앵 당신 말대로 누가 감염되었는지 밝혀내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시커먼 거머리를 머릿속에 집어넣어 수족으로 부리는 건 소공녀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에는 소공녀의 의지대로 대상을 부리는 것 외에도 보셨다시피 감염된 대상을 죽이는 것 역시 포함됩니다.”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것은 테니아였다.
“감염 사실이 밝혀지면 허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공녀가 그 사람을 죽여 버리겠군요.”
“그럴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엔 우리와 싸우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감염된 사람이 있다는 가정하에서 우리 중 누군가는 분명 죽거나 다치게 됩니다.”
이제 이븐이 갖고 있는 상황 인식은 모두에게 공유되었다. 모여 있는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폭탄을 삼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폭탄은 그것을 지목하는 일만으로도 뇌관이 터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 어떡하자고? 이대로 오펜하른에 진입할 수는 없어.”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뤼시앵은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이븐의 손을 뿌리쳐 냈다. 삿대질은 이븐을 향한 것이었지만 핏발 선 눈은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헛소리하지 마.”
“기스데본 사제는··· 허드는 자신의 감염 사실을 몰랐을 겁니다. 저는 모르델반트에서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허드처럼 감염된 그 사람은 자신이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뤼시앵, 모르시겠습니까? 우리 중 누구든 감염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난 아냐. 내가 감염됐으면 이 사제 놈하고 싸웠겠어?”
뤼시앵은 불타는 집에서 가장 먼저 뛰쳐나가려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자신을 변호했다. 이븐은 그 태도가 너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분노가 차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싸운 다음에 감염됐을 수도 있지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은 소공녀의 조종을 받은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걸 증명하겠다는 거 아냐!”
“소공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변이시켜 만들어낸 거머리는 인간의 정신 작용에 관여합니다. 감염되었던 기억을 지웠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소공녀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봅니다.”
뤼시앵은 반론을 생각해내려는 것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며 선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기발한 반론을 떠올린 듯 그가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기고 말했다.
“그 소공녀라는 년도 머리에 총 맞은 게 아니고서야 자기 권속이 은을 몸에 가져다 대겠다는데 가만히 있겠어? 당연히 막았겠지. 정말로 감염되었다면 들켜선 안 되니까!”
“당신은 감염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뤼시앵, 당신이 그 사실을 증명하면 그 다음은요? 거기서 멈추실 겁니까? 아뇨,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확인하려고 하시겠죠. 그럼 결국 제가 말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말한 뒤 이븐은 안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듯 앳된 얼굴에 아래로 처진 눈꼬리 때문에 유약한 인상이었다. 수습 사냥꾼이 되기 전부터 몸을 단련해온 덕분인지 옷 위로 드러난 골격은 탄탄했으나, 사냥꾼들만이 가지고 있는 모질고 독한 분위기는 아직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안체는 수습 사냥꾼이죠. 우리 중에서 노블 다이스의 접근에 가장 취약한 인물일 겁니다.”
“말도 안 돼요!”
이븐은 안체의 말을 무시하고 이번에는 테니아를 쏘아 보았다. 그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테니아도 피하지 않고 이븐을 마주했다.
“테니아, 당신은 허드와 함께 사냥에 나선 전력이 있죠. 그것도 꽤 많이 말입니다.”
“이븐, 나는······.”
“그리고 저는, 제 몸에는 늑대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은을 가져다 댄다고 해도 소공녀에 의해 감염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죠.”
이븐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콧김을 뿜어내며 다시 떴다. 최선의 세계. 그러나 그런 건 없다. 이븐은 다만 최선의 노력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소공녀에 의한 감염은 다른 마물에 의한 감염과 달리 그 감염 인자를 제거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제가 모르델반트에서 겪은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오펜하른에서 소공녀를 붙잡아, 감염 인자를 제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븐은 그렇게 말하면서 허드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허드 자신이 내렸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날 늑대인간에 물려 쓰러져 있던 남자를 구한 것이 옳은 일이었다는 것을 증명해달라던 말. 지금 이븐을 괴롭히는 것은 허드가 했던 그 말조차 소공녀의 조종에 의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알게 될 것이었다. 오펜하른에서 소공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내가 볼 땐 감염의 확인을 막으려는 네놈이 제일 의심스러워. 누가 감염되었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오펜하른에서 후작을 상대로 싸우자고? 섶을 쥐고 불 속에 뛰어들자는 말이란 뭐가 다르냔 말이야!”
뤼시앵의 얼굴은 이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이마를 짚고 있던 테니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이븐의 말이 맞아요, 뤼시앵. 사냥꾼은 소모품이 아니죠. 나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당신이 가장 잘 알 거라고 믿어요.”
“다 안다는 듯이 지껄이지 마! 내가 그날 배운 건 누구도 나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어. 날 제외한 누구도! 그러니 난 나를 구하기 위해 뭐든 하겠어. 우리 중 감염된 게 누군지 밝혀내서! ······위험을 제거할 거야.”
그건 이븐이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다. 사냥꾼이 된 지 이 년째, 그러나 이븐은 여전히 사냥단의 주변을 맴돌았을 뿐 그 내부의 소문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케넌이 그를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것도 결국 외부인으로서 이븐의 위치가 유용했던 때문일 터였다.
“그러지 마세요.”
안체였다. 뤼시앵은 안체를 향해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가 곧 거둬들였다. 그는 또 다시 허공의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뤼시앵의 얼굴 위로 잔인한 비웃음이 서렸다.
“안체 너까지······. 정신 차려. 이 사냥꾼들이 네 친구처럼 보이나? 사냥단은 네 아버지를 버렸어, 안체.”
“알고 있어요.”
뤼시앵의 얼굴 위로 당혹한 빛이 감돌고, 그건 이븐도 마찬가지였다.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지 궁금해서······. 저도 들었다고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처럼, 뤼시앵의 표정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가, 이를 덜덜 부딪었다가, 결국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그럼 너도 당연히 내가 하려는 일에···”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거예요. 사냥단이 감염된 제 아버지를 그토록 쉽게 버렸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그런 인간이 되지 않으려는 거예요.”
이윽고 안체가 한 말은 수습 사냥꾼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지극히 그녀다웠다.
“세상이 추악하다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될 필요는 없어요, 뤼시앵. 아니, 나 하나라도 그런 세상에 맞서야 하는 거예요.”
“잘도 그 따위 훈계를······.”
이를 갈면서 씹어뱉듯이 말한 뤼시앵은 이내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웃어젖혔다. 이제 그의 모습은 단순한 다혈질로 치부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븐은 뤼시앵이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인간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지리멸렬한 말싸움을 끝낸 것은 테니아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붉은 연기··· 신호예요!”
테니아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엔 그녀의 말대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늘 위로 돌연 돋아난 핏줄처럼, 연기는 굵고 분명한 동맥으로 시작해서 가늘고 옅은 모세혈관으로 끝이 나고 있었다. 붉은 빛깔이 소리 쳐 알리고 있는 신호는 자명했다. 그건 위험이었다.
- 작가의말
상황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한 인물이 한 마디씩 던지다 보니 진행이 조금 더딥니다. 5장에서 다시 빠르게 달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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