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막 5장 -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1)
10막 불발
5장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달아나는 흑표귀가 휘청거렸다. 다리를 꿰뚫은 작살은 생물과 같이 경련하더니 상처를 넓혀 허공에 피를 뿌렸다. 이븐은 등을 겨냥해 권총을 발사했다. 쓰러진 흑표귀의 새까만 몸뚱이가 바닥 위에서 벌레처럼 오그라들었다.
스타샤는 이븐이 쓰러진 흑표귀에게 다가가 사냥칼로 목을 긋는 것을 지켜보았다. 짧은 순간 격렬하게 몰아친 전투의 여파가 고열이 되어 그녀의 몸 안에서 맴돌았다. 그녀는 호흡을 고르며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차가운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열이 몸을 녹일 듯 스쳐갈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븐이 뽑아낸 작살을 안체에게 건네주고 스타샤와 웨인을 차례로 훑었다. 둘 모두 피를 뒤집어 쓴 몰골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본인들의 지분은 적은 듯했다. 그건 마물들의 피였다. 뤼시앵이 웨인에게로 헝겊을 던져 주었다. 이븐은 누런 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헝겊에서 찌든 기름내를 맡았다.
“놈들이 어떻게 알았던 거지?”
스타샤가 산기슭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그녀와 웨인이 베어 넘어뜨렸던 마물들의 사체가 비탈길을 따라 널브러져 있었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죽어있는 마물까지 합하면 도합 넷. 수적으로는 스타샤와 웨인이 여전히 열세였다. 그러나 마물들은 후퇴를 택했다.
“까마귀를 달고 나타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번에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두며, 스타샤가 다시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연기를 보고 달려온 이븐의 일행 뒤로 수상쩍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븐은 스타샤가 던진 질문의 의미를 곱씹으며 말했다.
“소공녀도 오펜하른에 있어.”
스타샤와 웨인의 얼굴 위로 동시에 당혹감과 의혹의 빛이 한데 섞여 떠올랐다. 그러나 이해를 위한 여유는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븐은 망설이지 않고 덧붙였다.
“우리 중에 감염된 사람이 있고.”
스타샤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이븐이 한 말을 면밀히 따져보는 동안, 웨인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일행을 향해 말했다.
“기스데본 사제가 보이지 않소만.”
“죽었어요, 웨인. 허드는 죽었어요.”
테니아의 말에 울음기가 감돌았으므로 웨인은 보다 냉정히 서있는 이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몸짓이었다. 이븐은 이를 악물어 떨리는 자신의 숨을 죽였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지만 건조하게 필요한 사실들을 짚어 나갔다.
허드의 죽음, 뤼시앵이 목격한 바가 감정이 탈색된 사실로서 제시되고, 그들이 왜 다른 감염자를 밝혀내지 못하고 여기까지 달려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할 때에는 웨인이 끼어들었다.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물러나는 방법도 있을 텐데.”
“아뇨, 웨인. 그럴 수 없습니다. 감염된 사람이 소공녀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물러난다면 이번 기회를 잃게 됩니다. 후작과 소공녀를 잡을 수 있고, 거기에 더해 감염 인자를 제거할 기회 말입니다.”
이븐의 말에 잔주름이 웨인의 입가를 둘러쌌다. 언제 불을 붙였는지, 스타샤는 연기를 뿜고 있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이븐을 향해 물었다.
“뭐가 우선이야?”
“뭐?”
스타샤가 들이켠 숨에 담배 끝이 빠르게 타들어 갔다. 자욱한 흰 연기를 올려 보내며 그녀가 부연했다.
“노블 다이스를 죽이는 일과 감염 인자를 제거하는 일 중에서 뭐가 우선이냐고. 노블 다이스를 죽일 수 있다는 공명심에 눈이 돌아가서 뒷말을 변명처럼 덧붙인 거 아니냐고 묻는 거야.”
그러나 이븐에게 정말로 그런 공명심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뤼시앵의 의견에 동조해 감염자를 처단했을 터였다. 이븐은 스타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녀의 질문은 선택을 견뎌낼 힘이 이븐에게 있느냔 뜻이었다.
스타샤의 말에서 이븐은 다가올 선택의 순간이 머릿속에 자연히 그려지는 것을 느꼈다. 소공녀가 뤼시앵을, 안체를, 혹은 테니아를 인질로 삼아 또 다시 그 질긴 생을 이어가려 한다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 것인가. 상상 속의 방아쇠가 현실의 것보다 배로 무거웠다.
“스타샤, 내가 그런···”
“당연히 감염 인자 제거가 우선이죠. 살아만 있다면 노블 다이스 따위는 언제든 잡을 수 있으니까요.”
이븐의 대답을 가로챈 것은 안체였다.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작살의 날에 걸려 있던 마물의 살점을 빼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흑표귀의 다리에 작살을 꽂아 넣은 뒤로 다른 인격이 들어서기라도 한 듯, 그녀에게선 평소의 머뭇거리며 조심스러운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테지만, 이게 미친 짓거리라는 생각에는 변함없어.”
“알면 입 좀 다물어, 뤼시앵.”
그렇게 쏘아붙인 스타샤는 오펜하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는 애써 숨길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무리 지은 까마귀 떼가 죽은 마을의 위로 검은 왕관을 씌웠다.
*
“스승님······.”
뤼시앵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매설한 덫 위에 조심스레 흙을 모아 덮었다. 그는 삽을 짚고 일어나며 점찍어둔 다음 자리로 옮겨 갔다. 칼집에서 미리 뽑아둔 채 등에 메고 있는 플랑베르주가 뤼시앵이 삽질을 하는 리듬에 맞춰 위협적으로 번득였다.
그러나 안체가 보기에 그 번득임은 진지하지 못하고 익살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주제에, 없어도 되는 곳에서 존재를 강변하는 꼴이 주인과 겹쳐 보였던 탓이었다.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아. 아니까 입 닫고 있어.”
안체는 바닥의 상자를 들어 뤼시앵의 근처에 내려놓았다. 상자 속에 담긴 덫과 말뚝 따위가 절그럭거렸다. 그녀는 다시 투창기를 손에 쥐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평소였다면 역할이 바뀌어 흙을 파고 있는 것은 안체였을 테지만, 뤼시앵은 선뜻 허드렛일을 자처했다.
그는 홀린 사람처럼, 또는 무엇엔가 쫓기는 사람처럼 함정을 놓는 일에 열심이었다.
“힘을 보태어도 모자랄···”
“그만! 나한테 사냥을 가르치겠다는 거야? 지금 네가 하려는 일이 그런 거냐고!”
뤼시앵은 버럭 고함을 지른 뒤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심어놓은 덫은 뤼시앵의 손끝에서 처음에는 노골적이었다가, 은근해졌다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습기에 젖어 짙은 빛깔의 흙 위로 마른 모래를 설탕처럼 뿌렸다.
허리를 곧게 펴고 주위를 둘러본 뤼시앵은 마물의 시체를 질질 끌어다 덫 앞에 놓았다. 안체도 그녀의 스승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체를 뛰어넘으며 달려든 마물이 다음 순간 덫을 밟고 고꾸라지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선했다.
안체는 습관처럼 그런 뤼시앵의 계획을 걱정했다. 그들 주변에 엎어져 있는 마물들은 흑표귀와 조인이었고 둘 모두 비상한 도약력을 지닌 마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런 마물들의 처리를 다른 사냥꾼들의 몫으로 돌려둔 채 한가하게 함정을 놓고 있는 뤼시앵의 모습이 그녀를 안달 나게 만들었다.
시체를 눈으로 훑는 안체의 심정을 꿰뚫어 본 것처럼, 뤼시앵은 다시금 변명을 읊었다.
“원래 이런 거야. 이런 게 몰이사냥이라고. 너처럼 돌진밖에 모르는 애송이들이나 한꺼번에 덤비는 게 최선이라고 믿지. 우린 아무렇게나 죽어 나자빠져도 되는 병사가 아니야. 사냥꾼이라고. 사냥꾼 하나를 잃으면 그 자리를 다른 사냥꾼이 와서 메우는 게 아니라 마물이 채워 넣는단 말이야.”
그렇게 말한 뤼시앵은 어느새 또 다른 구덩이를 파놓은 뒤 안체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안체는 상자를 다시 한 번 들었다가 위치를 옮겼다. 그녀는 새로운 덫을 꺼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아!”
상자 밖으로 비죽이 튀어나와 있던 말뚝이 소매 속을 파고들어 그녀의 손목에 생채기를 냈다. 안체는 스승의 책망을 듣지 않기 위해 아픔을 참고 재빨리 덫을 꺼냈다. 그녀가 건넨 덫을, 그러나 뤼시앵은 받을 생각 없이 노려볼 뿐이었다.
“장갑 벗어.”
“네?”
눈자위를 포위한 붉은 핏발마다 광기가 깃들었다. 안체가 망연히 덫을 쥔 채로 서있자 뤼시앵이 고함을 질러 다그쳤다.
“장갑 벗고 다시 잡아보라고!”
“하지만 베르자크 씨가 말씀하시기를······.”
“그 놈의 베르자크가 무슨 말을 했는지 따위는 잊어버려! 그 자식은 미친놈이야. 일이 틀어지면 혼자서 책임질 자신이 없으니까 일부러 일을 키우는 거라고!”
안체는 덫을 발치에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장갑의 끝을 잡은 그녀의 손이 머뭇거렸다. 뤼시앵은 조그만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부릅뜬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진즉에 확인해야 했어. 나를 부추겨서 자꾸 싸움에 뛰어들게 만들려는 게 수상해. 뭐해? 당장 벗지 않고!”
안체는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손은 여전히 장갑에 싸여 있었다.
“못 하겠어요.”
“뭐?”
뤼시앵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제가 감염되지 않았다는 게 밝혀지면, 그럼 스승님은 이제 아무런 미련도 없는 거잖아요. 저도 스승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요. 남는 건 베르자크 씨랑 브록센 씨뿐인데, 두 분이 어떻게 되든 조금도 신경 안 쓰실 요량이잖아요.”
안체 역시 그들 일행이 당도하기 직전에 스타샤와 웨인을 공격하던 마물들이 후퇴한 일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븐, 테니아, 뤼시앵, 그리고 안체 자신 중 하나가 감염자라는 것. 안체는 물론 자신의 이름을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서 지웠고, 뤼시앵 역시 이어서 제외했다.
그 판단이 뤼시앵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내가 감염되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는데?”
“그 귀고리랑 머리띠, 다 은으로 된 거잖아요.”
뤼시앵은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귓바퀴를 장식한 귀고리를 매만졌다. 안체의 말대로 그건 은제 장신구였다. 몸에 익어 잊고 있었던 감각이 안체의 지적 때문에 비로소 살아난 것 같았다. 그는 멍하니 서서 귀고리를 만지작거리며 머릿속으로 장면들을 되새김질했다.
감염자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장 먼저 지적했던 건 누구였지? 그 자신이 마을로 들어가는 대신 길목에 함정을 놓겠다고 했을 때, 그리고 당연히 스타샤가 반발했을 때 이를 잠재웠던 건 누구였지?
“베르자크도 알고 있었군.”
뤼시앵은 마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넋을 빼고 중얼거렸다.
“그 자식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날 여기에······.”
*
강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깨끗한 생명처럼 퇴색한 마을의 중앙을 가로질렀다. 갈라진 마을의 사이를 잇는 석교 위에서 닳은 영혼과 오염된 생명이 맞붙게 된 것은, 이븐은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일행이 다리 위로 올라서기가 무섭게 인가로부터 숨어있던 마물들이 쏟아져 나와 진로와 퇴로를 동시에 막은 것이었다.
그러나 뤼시앵을 떼어놓은 이븐은 마물을 대적하고서도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븐은 뤼시앵이 지금이라도 감염자를 밝혀내야 한다며 소리 높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전력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두 개 조로 나눈 것은 물론 이 때문이었지만, 이븐에게는 다른 계산도 있었다.
뤼시앵은 깨닫지 못한 듯했지만 이븐은 진즉에 그를 의심 대상에서 제외한 터였다. 그러므로 이븐의 의심은 안체와 테니아를 각각 향했다. 만약 안체가 감염되었다면, 이븐은 뤼시앵의 행운을 빌 뿐이었다. 그러나 감염된 게 테니아라면······.
이븐은 그를 향해 덮쳐 오는 조인의 머리를 쏘아 맞히면서도 테니아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데에 신경을 썼다. 쏘기에 충분하고 반격으로부터는 안전한 거리. 테니아는 달려든 흑표귀를 버클러로 쳐내고 아밍 소드로 목을 찔러 절명시켰다.
“크르륵-.”
죽어가는 흑표귀의 목구멍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마물은 곧 제 피에 질식한 것처럼 혀를 뺐다. 테니아의 뒤를 스타샤가 엄호하고, 스타샤의 옆을 다시 웨인이 막아서는 식으로 그들은 공세를 막아내고 마물들을 수세로 몰았다.
이븐은 스타샤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노블 다이스를 잡는 일과 감염 인자를 제거하는 일 중 무엇이 우선이냐는 질문. 이븐에게 최우선은 전자였다. 사냥꾼 하나쯤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소공녀를 잡아 죽이는 것. 위악을 택해 더 커다란 악을 막아내는 것.
오로지 소공녀를 오펜하른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이븐은 감염자와 함께 싸움에 뛰어드는 편을 택했다. 소공녀와 대면하기 전에 감염자를 밝혀낸다면, 그래서 그를 제거한다면 또 다시 소공녀를 놓치게 될 터였다.
이븐은 자신의 계획이 위태로운 가정 위에서 겨우 버티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감염된 게 안체일 경우, 그리고 뤼시앵에게 그녀를 제압할 능력이 있는 경우가 가장 큰 허점이었다. 이 경우 이븐은 뤼시앵이 자신의 제자를 죽일 정도로 냉혈한이 아니라는 가정에 기대어야만 했다.
두 개 조로 편성한 것은 전장에서 의심의 대상을 향한 주의를 분산시킬 수 없는 탓이었다. 그러므로 이븐은 가장 믿기 힘든 사냥꾼을 믿어야 했다. 뤼시앵에게 안체를 맡겨두고 그 자신은 테니아를 맡는 것이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븐!”
테니아의 외침이 계획을 되짚어보고 있던 이븐을 깨웠다. 그녀가 아밍 소드의 날카로운 끝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새까만 회오리바람이었다. 돌풍은 그들을 마주한 이층집의 지붕 위에서 뭉쳐 익숙한 형상을 빚어냈다.
후작은 그들 사냥꾼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븐은 그 미소를 지우기 위해 후작을 겨냥해 권총을 쏘았다.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하던 차에 발밑이 흔들리고 먹은 귀에 이명이 찾아들었다. 잔해와 함께 강으로 떨어지며 이븐은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마물들이 석교 아래에 설치해둔 폭약을 터뜨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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