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막 2장 - 이론과 실재(1)
11막 회감
2장 이론과 실재
“전쟁과 역병의 공통점이 뭐죠?”
테니아에게 서신을 건네주고 자리로 돌아온 스타샤가 허공에 대고 물었다. 테니아는 마일스아이렌으로부터 온 서신을 아직 읽지 못했으므로, 대답은 가장 먼저 서신의 내용을 확인했던 웨인에게서 나왔다.
“죽음이지.”
“그래요, 죽음이죠. 그것도 막대한 수의 죽음요. 그렇다면 ‘문’을 여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이 밝혀졌네요. 죽음과 공작.”
“공작은 확실하지 않네. 헤레틱스가 공작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왔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지.”
테니아는 두 명이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들으며 서신의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 너머로 스타샤와 웨인의 대화가 이어졌다.
“켈레넨스크요, 웨인. 랭데라는 인물이 관여한 건 기정사실이라고 봐도 좋을 테죠. 그렇다면 노블 다이스는 어떨까요?”
“자네 말은 마물들이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춘 현상에 노블 다이스가 개입했을 거란 뜻인가? 그건 아무래도 과한 가정인데.”
“아뇨, 이렇게 가정해야 그 기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요. 이븐이 파악한 헤레틱스의 계획은 뭐였죠?”
웨인은 파하넨에서 이븐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답했다.
“마물과 인간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지.”
“그렇죠. 완전히 뒤섞어 버리는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켈레넨스크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 대신에 마물들이 사라져 버렸단 말이에요. 계획이 틀어진 거죠.”
“그 이유가 노블 다이스 때문이고? 노블 다이스가 헤레틱스의 계획을 방해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카일로파드와 랭데는 노블 다이스의 목적에 대해 일견 상충하는 듯하면서, 또 어느 정도는 맞닿아 있는 설명을 한 적 있어요. 개체수 조절과 항구적 투쟁이라고요. 노블 다이스는 마물들을 통제함으로써 그런 목적을 추구해왔어요. 그런데 헤레틱스가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알아낸 거죠.”
“문을 여는 것이군.”
스타샤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여기에 대한 노블 다이스의 대응이 뭐였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웨인이 노블 다이스라면 말이에요.”
“그런 식의 가정은 별로 하고 싶지 않네만.”
웨인은 오펜하른에서 얻은 부상의 통증이 도진 듯 옆구리를 쥐고 앉은 자세를 고쳤다. 테니아가 이마에 난 동그란 흉터를 매만지며 대신 답했다.
“헤레틱스를 전부 죽이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라면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을 것 같아. 문이라는 게 대체 뭘까, 그 문을 열어서 어떻게 마물과 인간을 뒤섞는다는 걸까, 그런 궁금증들. 무엇보다도 문의 존재는 마물들의 군주를 자처하는 노블 다이스에게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겠지.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어쨌거나 헤레틱스는 비밀을 알아냈고, 노블 다이스는 그 비밀을···”
“뺏어 오려고 했군.”
웨인이 테니아의 결론을 빼앗아 오며 말했다. 스타샤가 양쪽을 향해 모두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추측을 이어갔다.
“자, 다시 한 번, 헤레틱스는 공작을 죽이지 말라고 했어요.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계획에 그가 필요하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냥단을 이용해 노블 다이스의 다른 일원들은 제거하려고 했어요. 헤레틱스의 의도대로 놀아났다는 걸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번 오펜하른에서의 싸움이 그 결과죠.”
“켈레넨스크에서 공작의 수하들이 헤레틱스의 계획을 어그러뜨렸군. 공작만을 남기고 노블 다이스의 나머지 일원들을 제거하려는 건 그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고.”
스타샤의 추측을 웨인이 넘겨받으면서 그들이 붙잡았던 실마리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스타샤는 이제 일련의 사건들로 겹겹이 쌓여있던 계획과 음모가 한 꺼풀씩 위장을 벗는 것을 느꼈다. 테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서류들을 연신 뒤적였다.
“연표를 한번 만들어보자고요. 1271년 켈레넨스크의 기현상, 1273년 오펜하른 사태, 같은 해 잔베르 습격과 탈환, 올해 1275년 루퍼트의 감염과 오펜하른 전투.”
테니아가 골라낸 사건들은 단단하거나 헐거운 연결고리들을 가지고 엮여 있었다. 스타샤가 눈을 감고 자신의 말을 음미하듯 나직이 말했다.
“사 년 전, 헤레틱스와 노블 다이스는 베소니아의 켈레넨스크에 모였어요.”
*
“저건 문이라기보다 마치······.”
“연못 같은데. 아니면 늪이거나.”
캐리온 후작의 말을 쿼그마이어 백작이 이어받았다. 수상쩍은 학자들의 주문대로 그들은 ‘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학자들이 벌이는, 역시 수상쩍은 일을 지켜보았다. 전염병이 휩쓸고 간 도시의 한 가운데에는 거대한 늪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저기서 태어났단 건가? 이봐, 넌 뭐 기억나는 거 있어?”
천천히 소용돌이치며 점차로 반경을 넓혀가는 늪을 보며 쿼그마이어가 말했다. 질문을 받은 아메나이타 남작은 양팔의 인형을 분주히 놀리며 무어라 지껄였으나, 색색대는 그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학자들 무리가 벌인 의식이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기라도 한 듯 하늘은 온통 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썩은 시체의 악취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고, 후작이 풀어둔 까마귀들이 하늘을 배회하며 간혹 우짖었다. 시체에 홀린 잡스러운 마물들이 주위를 서성거리자 처형단의 마물이 도끼를 휘둘러 그들 불청객을 쫓았다. 늪의 가장자리에서 무릎을 굽힌 채 소용돌이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말했던 문이라는 게 이거로군.”
“방금 열었던 것이 문이었고, 우리 눈앞의 이 검은 연못은··· 우리는 이걸 심연이라고 부르오, 아모크 공작.”
서펜트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안경을 벗어 옷깃으로 닦는 그의 모습에선 지친 기색이 완연했지만 동시에 엷은 흥분도 느껴졌다. 아모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머리칼은 피를 뒤집어쓴 듯 검붉었고 하관을 덮은 철제 마스크에서는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모크 공작은 심연에 담갔던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카일로파드가 말하길 당신네 학자들은 세상을 마물로 뒤덮고 싶어 한다던데.”
“그놈은 배신자야! 오늘 같은 날에 얼굴도 안 비춘 건 다 켕기는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한 건 게라르도 피츠독슨이었다. 서펜트가 그를 향해 매서운 시선을 보내자 게라르도는 소리 낮춰 꿍얼거렸다. 서펜트는 다시 공작을 향해 말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오. 그러나 그건 한 단면만을 짚어낸 것에 불과하지. 우리가 원하는 건 인간의 마물화이고, 마물의 인간화외다. 지난 이십 여 년간 인간은 마물에 대항해왔소. 그러나 그건 무의미한 싸움이었고 또한···”
“가능성의 제약이었지.”
아리아나 파르사드가 장죽에서 입을 떼며 말을 받았다. 서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우리들 인간이 승리를 기약할 수 없는 무의미한 저항 따위에 힘을 낭비하지 않고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를 바라오. 그 새로운 단계에는 마물들이 가득하고, 동시에 인간들도 가득해서 역설적으로 마물도 없고, 인간도 없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새로운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것이오.”
“새로운 세계를 목도하시오, 공작. 그 단초가 우리 눈앞에 있지 않소이까?”
에드가드 바이스게르버가 심연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고 호탕하게 웃었다. 아모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어떻게? 당신들 말대로 문은 열렸지만 내가 볼 때 뭔가 튀어나올 것 같지는 않군.”
“이건 단지 작은 실험일 뿐이오. 원료가 다하면 문은 닫히고 심연은 사라질 테니, 정말로 세계를 바꿀 양이라면 훨씬 규모가 커야 할 테지.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도 확실히 세계를 조금은 바꾸었소. 보시오, 난 당신들과 이만큼이나 가까워졌소이다.”
서펜트는 말을 멈추고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그는 소매를 걷어붙인 자신의 팔뚝을 단도로 그었다. 비밀을 누설하는 입처럼 벌어진 상처가 천천히 아물었다. 서펜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무것도 튀어나올 것 같지 않다고 하셨소, 공작? 아니외다. 어쩌면 당신처럼 심연 속에서 이 세계로 넘어올 마물이 있을지도 모르지. 열쇠를 쥔 자 말이오. 방금 당신이 심연에 손을 담갔을 때, 당신은 건너편의 세계에 악수를 건넨 것이오. 화답을 기다린다 해도 무리는 아니지.”
“우리를 도와줌으로써 아모크 공작 당신이 새로운 세계의 개척자이자 그 인도자가 된 거란 말입니다.”
페르디낭 랭데의 말이었다. 그의 얼굴에도 서펜트와 비슷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새로운 세계라······. 그 다음은? 마물화된 인간이든 인간화된 마물이든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인육이 필요할 텐데. 그건 생각해봤나?”
“문이 닫힌다면 그럴 테지. 그러나 문이 열려있다면, 이 세계에 심연이 계속 버티고 있다면 구차하게 인간의 육신을 취할 필요가 없소. 인간의 응축된 절망이 열어젖힌 문을 통해 바야흐로 두 세계는 연결되는 거요. 어비도트에서 처음으로 문이 열렸을 때, 심연은 가장 먼저 당신과 같은 최초의 마물들을 뱉어냈고 이어서 그 주변의 인간들을 변화시켰지. 그때를 기억해보시오, 공작. 당신은 처음부터 인간을 향한 허기를 품고 있었소? 그렇지는 않을 거외다. 인육에 대한 갈망은 문이 닫힌 뒤부터 시작되었을 거요. 두 세계가 단절되었을 때 당신들 마물은 발판을 잃은 것이오.”
공작은 고개를 들어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는 학자들의 면면을 훑었다. 반나절 동안 복잡한 기호와 도형 따위를 땅에 새겨 넣었던 그들은 헝클어진 머리와 땀에 전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이 광기에 물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기억해내기 어려울 테지. 저 심연 속에서야 어땠는지 몰라도, 이 땅에 발을 들일 때 당신은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 불과했고 보모 따윈 없었을 터이니.”
서펜트는 마치 다 이해한다는 것처럼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페르디낭 역시 우쭐거리는 말투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지금이야 연구가 부족해서 내가 솜씨를 발휘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린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안 그런가, 게리?”
“그렇고말고. 인간은 정말로 무한해서 수백 명의 죽음에 상응하는 절망을 한 명의 몸 안에서도 발견해낼 수 있단 말이지.”
게라르도가 모은 두 손을 음흉하게 비비며 답했다. 서펜트는 공작을 향해 돌아섰다. 수천 명을 몰살시켜 얻어낸 결과물이 여전히 그들의 발치에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더 커다란 문을 열어서, 더욱 거대한 심연을 이 세계에 들여놓게 된다면 인간과 마물의 지난한 반목은 그것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는 거외다. 평화와 번영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것이지. 어떻소? 악수라도 해야지 않겠소? 두 세계의 대사로서, 하나 될 세계의 왕들로서 말이오.”
서펜트가 내민 손을 아모크가 맞잡았다. 그는 사뭇 정겹게 잡은 손을 흔들다가 일순간 힘껏 끌어당겨 서펜트의 이마에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아모크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게 더 재밌다면?”
서펜트의 눈이 의아함을 담아 커졌다. 아모크는 목을 빼 서펜트의 귀에 대고 말했다.
“반목 말이야, 순진한 학자 양반. 이 반목이 내게는 더 재밌게 느껴진다면 어떡할 텐가?”
“나도 아오. 투쟁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지. 그러나······.”
아모크가 그를 밀쳐내서 서펜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서펜트는 휘청거리다 어렵사리 균형을 잡고 손자국이 남은 자신의 손을 주물렀다. 위험을 감지한 학자들은 약속한 것처럼 뒷걸음질 치며 한데 모였다. 초식동물들처럼, 겁에 질린 학자들은 서로의 등을 맞대었다.
“처음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내겐 적수가 없었지. 인간들이란 것들은 세계의 주인인 듯이 행세하면서도 나약하기 그지없더란 말이야.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이것들은 점점 더 대담해졌어. 그리고 사냥꾼들··· 이 정신 나간 족속들 말이지······.”
아모크는 말을 멈추고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입을 가린 철제 마스크 속에서 웃음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렸다.
“투쟁이라고 했나, 학자 양반? 그래, 투쟁이지. 나를 즐겁게 하는 건 바로 그 투쟁이야. 네놈들은 지금 내 앞에서 그런 즐거움을 앗아가겠다고 선언한 거야. 대체 뭘 기대했나? 네깟 것들이 작성한 평화 협정문에 서명이라도 해주길 바랐나?”
어느새 아모크 옆에서 까마귀 떼가 모여 형체를 갖추고 있었다. 쿼그마이어는 산성 용액으로 변이시킨 몸을 해일처럼 몰아 달려오고 있었다. 아모크가 서펜트를 향해 최후통첩처럼 내뱉었다.
“너희의 죽음은 너희가 자초한 거다.”
그 다음 벌어진 풍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에드가드는 양손으로 상의를 찢어발기며 몸을 부풀리고, 게라르도가 열어젖힌 인가의 문에서는 실험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캐리온의 손끝에서 날아간 까마귀들이 에드가드를 덮치고, 쿼그마이어가 휘두른 팔에 맞은 아리아나가 화상의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페르디낭은 땅에 납작 엎드려 엉금엉금 기어갔다.
“제기랄, 서펜트! 문을 닫아!”
페르디낭이 비명처럼 내지른 소리가 켈레넨스크의 빈 건물들을 때리며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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