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막 2장 - 이론과 실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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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레넨스크에서 있었던 싸움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죠. 그 일대의 마물들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노블 다이스도 타격을 입었을 거예요. 삼 년 전 기억나세요, 웨인?”
스타샤의 말에 웨인은 회상에 잠긴 기색이 되었다. 사냥꾼의 기억은 흉터로 남았으므로 쉬이 잊히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웨인은 그답게 심상하고 짤막한 어구로 지난했던 시간들을 압축했다.
“마물들이 유난히 극성을 부리던 해였지.”
“마물들에 대한 노블 다이스의 통제력이 약해졌다면 그것도 설명 가능해요. 1272년엔 마물들이 들끓기도 했지만, 그 마물들은 그만큼 저급한 부류이기도 했죠. 감염시키는 수를 조절해서 저들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힘이 한동안 사라졌던 거예요.”
스타샤가 말한 저급한 부류의 마물이란 한때는 인간이었으나 감염된 후로 인간의 외양을 흉내 내지 못하게 된 마물을 일컫는 것이었다. 감염력을 지닌 마물은 대를 거듭할수록 이성 없이 본능에 충실하고, 인간의 모습을 취하지 못하는 저급한 부류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들 저급한 마물은 인육을 취함으로써 인간의 외양을 흉내 내는 능력을 얻고, 동시에 마물의 힘이 강성해져 역설적으로 인간으로부터 더욱 먼 존재가 되었다. 감염의 첫 번째 단계는 인육을 향한 무서운 허기이며, 그 두 번째는 권속 생성을 통해 무리를 이루려는 습성의 발현이었다.
성공적으로 무리를 만든 마물은 곧 군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군주의 난립은 마물 세력의 번영을 뜻함과 동시에 쇠락의 길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스타샤는 비로소 노블 다이스가 유지하려는 균형이 진정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테니아가 손끝으로 서류들을 헤집어 스타샤의 논지를 보강할 자료들을 찾아내며 말했다.
“스타샤 말이 맞아요. 삼 년 전 제국에서는 마물들이 준동했고, 베소니아에서는 노블 다이스의 소행으로 짐작되는 습격이 몇 차례 있었죠. 이제 이해가 돼요. 노블 다이스는 켈레넨스크에서 힘을 잃었고, 잃은 힘을 회복하기 위해 일련의 습격을 벌였던 거죠. 이듬해 있었던 오펜하른 사태도 그 가운데 하나고요.”
“헤레틱스가 후작의 위치를 알려줬던 날, 잔베르 함락도 노블 다이스의 소행이라는 말을 남겼네. 그걸 믿어야 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웨인의 말에 테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잔베르 함락은··· 모르겠어요. 그건 너무 이질적이지 않아요?”
테니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이 느낀 이질성의 근거를 머릿속으로 하나씩 헤아려보는 기색이 되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오펜하른과 같은 습격에서는 노블 다이스의 일원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어요. 그들은 권속을 만드는 대신 끊임없이 인간의 육신을 취했죠. 백작에게 오펜하른의 대식가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그가 무수한 인간들을 녹여서 삼켰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잔베르는 경우가 달랐어요. 잔베르에 나타난 늑대인간의 군주는,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야심가였죠.”
“확실히 그건 노블 다이스의 방식이 아니었지. 오히려 그들이 퇴세한 틈을 노려 발흥을 꾀했다는 설명이 더 부합할 테지.”
웨인 역시 테니아의 추측에 동의했다. 스타샤는 만족하지 않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오히려 헤레틱스가 잔베르 함락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더, 가능성이 더··· 농밀? 그걸 뭐라고 하지, 테니아?”
“농후.”
“그래요, 그럴 가능성이 더 농후해요. 그 연구원의 등장요, 웨인. 그건 정말이지 너무···”
“시기적절했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스타샤와 테니아는 새로운 인물을 논의의 수면 위로 띄웠다. 웨인은 빠르게 진행되는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지 못한 듯 스타샤와 테니아를 번갈아 살핀 뒤 물었다.
“레니스 양이?”
“테니아가 지적한 대로예요. 생각해보세요. 잔베르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발생 시점으로부터 여드레나 지난 뒤였어요. 영악한 늑대인간 놈들이 길목을 틀어쥐고 구원 요청을 막았기 때문이었죠. 그 구마사제가 아니었다면 더 늦어졌을 거예요.”
“별빛이 그의 영혼을 인도하기를.”
웨인이 손을 들어 성호를 긋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테니아 역시 눈시울이 조금 붉어진 채로 성호를 그으며 복창했다.
“별빛이 인도하기를.”
테니아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짐짓 쾌활한 어투로 스타샤를 향해 물었다.
“네 애인 생각은 어떤데?”
스타샤는 테니아를 쏘아보고, 웨인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이한 어조로 답했다.
“갈팡질팡하는 눈치야. 왜, 그런 거 있잖아. 맞는 것 같은데 아니었으면 좋겠다 싶은 일들.”
“그런 일들은 대체로 아니었으면 했던 게 사실로 드러나던데.”
“이번에도 그럴 거야. 로지아 레니스는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등장했으니까. 레니스는 에드가드 바이스게르버와 알던 사이였어요. 웨인도 알다시피 바이스게르버는 헤레틱스와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죠.”
웨인은 잠시 눈을 감고 스타샤가 한 말을 머릿속을 되짚어 보는 기색이었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얽히고설키며 끝 간 데 없이 뻗어나가는 수형도가 자리 잡았다.
“그럼 자네 말은 이븐의 감염과 치료가 모두 계획된 일이었단 뜻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그건 계획이었지만, 덕지덕지 기운 구멍투성이 계획이었죠. 제 생각은 이래요. 켈레넨스크에서 노블 다이스에게 된통 당해본 경험이 있는 헤레틱스는 갖은 수를 다 써서 힘을 키우려 했어요. 늑대인간의 군주는 그 과정에서 포섭된 놈일 거예요. 하지만 돌발 변수가 이번에도 계획을 어그러뜨렸어요. 네, 이븐요. 누구도 그가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를 거라곤 생각 못 했던 거예요. 아니,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를 만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계산 밖의 일이었던 거죠.”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진심 이상이었다. 그 미친 짓을 다시금 머릿속으로 그려보려는 듯 눈을 감고 있던 스타샤가 이윽고 입을 열어 추측을 이어갔다.
“헤레틱스는 계획을 바꿨어요. 뭐라도 건져보자는 심정이었던 거죠. 그래서 그들은 레니스 그 여자를 잔베르로 보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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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이스게르버 박사님.”
응접실의 문을 연 로지아는 의아함 반, 반가움 반을 각기 담아 말했다. 그녀는 잔걸음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에드가드에게로 다가가, 그의 뺨에 얼굴을 맞대어 인사했다. 에드가드는 문이 완전히 닫혔는지 확인하려는 듯 로지아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두꺼운 외투를 껴입은 그의 몸에서 더운 김이 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잘 오셨어요. 저번에 일러주신 투석법 말인데요. 정말로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비교한 자료를 보시면 박사님도······.”
로지아는 말을 멈추고 자신의 흰 가운을 두 손으로 더듬었다. 찾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듯 그녀는 몸을 돌리고 말했다.
“실험실에 있어요. 금방 가지고 올게요.”
“그러지 마시오, 레니스 양. 급한 용건이오.”
에드가드가 다급히 로지아를 불러 세웠다. 로지아의 눈이 겁에 질린 동물처럼 동그래지자, 에드가드는 자신의 조급한 말씨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투석법을 활용하겠다는 발상은 무척 탁월한 것이었소. 나야 레니스 양의 빛나는 지성에 연마제 역할밖에 더 했겠소?”
“역시 그렇죠?”
로지아는 그렇게 말했다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얼른 덧붙였다. 겸양으로 시작되었던 그녀의 말은 점차 열성적으로 변하며 장황해졌다.
“아니에요, 박사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어떻게 그런 방법을 적용할 수 있었겠어요.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그냥 추출액이라고만 언급하셨던 용액요. 효과도 있고 실험체한테도 잘 듣긴 하는데 성분이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마물들의 위(胃)에서 발견되는 성분과 비교해서 대조표를 작성해봤는데 상당히 공통된 부분들이······.”
“로지아, 로지아.”
에드가드가 손을 내저어 로지아의 말을 끊었다. 그제야 로지아의 눈에도 외투를 벗고 있지 않은 에드가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곧 떠나야 할 사람 같은 품새였다. 들켜서는 안 되는 관계인 양, 교구 밖으로 로지아를 불러냈던 것과 달리 직접 헬하우젠 성당으로 찾아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추출액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해 주리다. 지금은 내가 하는 얘기를 들으시오.”
에드가드는 그렇게 말하고 품속에서 두 개의 봉투를 꺼냈다. 그는 그렇게 꺼낸 봉투들 가운데 하나는 로지아에게 건네주고, 다른 하나는 허둥지둥 봉랍을 뜯어 내용을 보여주었다.
“항마연구원장의 서명이 있는 서류요. 하겐펠트 마을로 가서 사냥꾼들과 합류하시오. 잔베르에 늑대인간들이 나타났소. 아주 많이, 정말로 많이 말이오. 늑대인간들의 대규모 습격의 진상을 규명하는 학술 연구의 일환이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요.”
“표면적인··· 이유라고요?”
“자세한 내용은 방금 건네준 종이에 다 적혀 있소. 레니스 양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거기 다 적혀 있단 말이오. 읽고, 숙지한 뒤 태워버리시오.”
로지아가 손에 든 봉투를 열어보려 하자 에드가드가 제지했다. 그는 억센 손으로 봉투를 든 로지아의 오른손을 품 안으로 밀었다. 그는 누가 볼까 두렵다는 듯 주위를 살피고 낮게 속삭였다.
“나중에 혼자 확인하시오.”
“하지만 저도 무슨 일인지 알아야······. 그보다도 잔베르에 늑대인간들이 나타났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알게 될 거요, 레니스 양. 설명할 시간이 없소. 지금 당장 짐을 꾸려 하겐펠트로 떠나시오. 사냥꾼들을 놓치면 다 허사가 되오. 이번 일로 우리의 연구, 아니, 레니스 양 그대의 기발한 발상으로 시작된 연구가 결실을 보게 될지도 모르오. 그러니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소.”
로지아는 그러나 에드가드의 주문대로 얼른 움직이지 않고, 선 자리 위에서 봉투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박사님. 이렇게 불쑥 찾아오셔서 영문 모를 말씀만 하시고··· 거기다가 마물의 대규모 이동이라뇨. 그건 제 전공 분야도 아니에요. 그 서류도 어디서 구해오신 건지 모르겠지만······.”
“이 서류엔 아무 문제도 없소. 믿어도 되오. 전공 분야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소. 내가 도와주리다. 게다가 대규모 이동의 이유 따위야 밝혀내지 않아도 상관없소.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레니스 양의 연구는 교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될 거요.”
로지아는 머리를 떨구었다. 그녀는 계시라도 나타나길 기대하는 것처럼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로지아의 눈동자에는 전에 없던 결의가 담겨 있었다.
“대학에서 연구자의 윤리에 대해 배운 적이 있어요. 논문 인용법도 배우고 피험자에 대한 의무도 배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런 딱딱한 말보다 교수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었어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과학자야말로 최악이래요. 저는 지금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을래요.”
“한 남자가 있소.”
에드가드는 그렇게 말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시간을 확인하려는 듯 회중시계를 꺼내 살핀 그는 여태 그래왔던 것보다 훨씬 다급한 말투로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 남자가 군주급 늑대인간의 힘을 계승하게 될 거요. 군주급 마물의 힘을 이제 막 계승한 실험체는 우리 연구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지. 이상적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거요. 너무 이상적이어서 사고실험에서밖에 가정할 수 없는 그런 상태란 말이오! 그런데 지금 그 이상적인 상태를 현실에서 구할 수 있게 되었소. 레니스 양, 로지아.”
에드가드는 허리를 숙이고 숫제 사정하다시피 로지아의 양팔을 붙잡았다. 준비해둔 최후 변론처럼 그의 입에서 절절한 언설이 막힘없이 창달했다.
“두 가지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소. 아니, 그대 앞에 놓여 있소. 지금 이 서류를 갖고 잔베르로 가면 역사의 새로운 장의 첫머리에 그대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소. 그러나 거기서 계속 망설이고 있으면, 나는 그대의 양심과 정직함에 경의를 표할 거요. 그러나 역사는? 역사는 그대의 양심을 기억할까?”
에드가드는 로지아를 놓아주고 다시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는 구겨진 서류를 펴 로지아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선택하시오, 레니스 양. 방관자요, 개척자요?”
로지아는 부르튼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핥고, 연구원장의 직인이 찍힌 서류를 흘겼다가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움켜쥔 로지아의 주먹이 천천히 펴지고, 이내 들어 올린 손이 서류를 붙잡았다. 그녀는 뻗은 팔을 내리지 않은 채로 물었다.
“만약 우리가 틀린다면요? 군주에게 감염된 그 남자가 혹시라도 잘못되어서······ 그래서 사람들이 다치게 된다면요?”
에드가드는 빙긋이 웃으며 로지아의 팔을 접어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녀의 얼굴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큰 손으로, 에드가드는 로지아의 손등을 다정스럽게 두드렸다.
“역사가 우리를 심판하겠지. 심판일랑 역사가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합시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에드가드는 삼류 시인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또 한 번 거창한 말을 덧붙였다.
“지도 위에 표시되지 않은 길을 걸어 나가는 거요.”
- 작가의말
종종 반응이 궁금해 제 글의 제목을 구글에 검색해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저더러 설명충이라고 하는 분을 봤는데, 제가 설명충이 아닌 이유를 우선 설명 드리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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