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막 2장 - 이론과 실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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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이 내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동안 레니스 양도 체스바덴에 머물렀지. 서로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으니 어떻다 평하기 힘들어도,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본바탕이 선한 아가씨였어.”
“나도 특별한 교류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로지아가 헬하우젠에서 연구원으로 있을 때 만나봤던 경험으로 얘기하자면, 웨인 생각에 동의해. 피곤할 만큼 학구적이고 고집도 있었지만, 음흉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
웨인에 이은 테니아의 변호에도 스타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 추측을 바꾸지 않았다.
“두 사실은 배치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잘 들어맞지. 레니스가 착해빠졌다는 것과 또 헤레틱스에게 넘어갔다는 것 말이야. 그래, 레니스도 바이스게르버의 정체가 뭐였는지는 몰랐겠지. 어쨌거나 헤레틱스의 의도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스타샤는 불붙인 담배를 물고 웨인에게로 다가가 수통을 뺏어 들었다. 웨인이 손을 휘저어 매캐한 담배 연기를 쫓았다. 스타샤는 뒤로 고개를 젖혀 수통에 담긴 술을 입안에 털어 넣고 인상을 찌푸렸다.
“착해빠진 게 바로 문제의 원인이자 핵심이에요. 죽은 자식 뭐 만진다고, 나도 이런 얘기 하기 싫지만 루퍼트랑 막스를 보세요. 루퍼트요? 세계고(世界苦)를 짊어진 인간이었죠. 그 자식은 이 세상의 악함을 저 혼자 끌어안아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려고 했어요. 그 결과가 뭐였죠? 노블 다이스 놈들의 꾐에 넘어가 결국 우리 손에 죽었잖아요. 막스요? 막스는 루퍼트보다는 감상성은 덜했어도 자신감은 더했죠. 자기가 해결사인 줄 알았어요. 그도 결국은······.”
스타샤는 빈 수통을 웨인에게 넘겨주고 다시 자리로 가 앉았다. 급하게 들이켠 술이 두통을 일으킨 듯 그녀는 이마를 짚고 잠시 말이 없었다. 웨인은 빈 수통에서 일말의 희망이라도 발견해보려는 것처럼 귀에 대고 흔들다가 곧 포기하고 내려놓았다.
“잔베르에서 이븐을 살려냄으로써 헤레틱스는 노블 다이스에 대항할 무기를 얻었지.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있었지?”
“게헤만 혁명.”
웨인의 말에 테니아가 답했다.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부연했다.
“혁명이 일어났죠. 그 후로 제국과 공화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이제 전쟁은 일촉즉발의 국면에 들어섰고요. 노블 다이스가 루퍼트를 끌어들여 헤레틱스를 잡으려 했던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었을 거예요.”
“헤레틱스가 원하던 전쟁은 목전에 다가왔고, 노블 다이스는 전력을 잃어 궁지에 몰렸네. 노블 다이스를 이끄는 공작의 행보가 무엇일 것 같나?”
“힘을 회복하려 들겠죠. 백작을 시켜서 오펜하른 사태를 재현할 수도 있고, 공작 자신이 직접 나서서 사냥단을 쳐 힘의 균형을 실현할 수도 있어요. 그들이 원하는 건 주지하다시피 항구적인 투쟁이니까요.”
“공작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네. 그가 강력한 마물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사냥꾼 가운데 그를 직접 본 자는 없어. 혹은 직접 본 이들이 모두 죽었거나. 어쨌거나 그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네.”
웨인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탁상 위의 보울러햇을 집어 들었다. 기나긴 작전 회의의 종지부를 찍으려는 것처럼 그는 모자를 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헤레틱스의 계획을 막기 위해서라도 에카르트의 유언대로 공작을 죽여야 하네. 그러나 어떻게? 테니아 자네 말마따나 공작이 우리를 먼저 칠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고 보네. 그는 말하자면 노블 다이스 최후의 보루니까.”
스타샤는 웨인의 말을 이해했다. 웨인은 의자의 팔걸이에 기대어 두었던 지팡이칼을 집어 들었고, 스타샤 역시 자신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담배를 비벼 끄고 선언하듯 내뱉었다.
“백작을 잡아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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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임베르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부터 건설하기 시작했다는 헤르돈 대성당은 장엄함으로 치자면 비길 데가 없었다. 황제는 찌를 듯한 기세의 첨탑에 신의 의지가 깃들기를 염원했으나 그가 눈을 감기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도면에 불과했다. 대성당은 하임베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완공되지 않았다.
“또 뭐가 남았죠?”
대성당의 장엄함 따위를 감상할 시간은 없다는 듯, 입구를 통과하는 이븐의 발걸음은 빠르고 거침없었다. 그는 아블린의 물음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대꾸했다.
“뭐가 남다니, 무슨 뜻입니까?”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또 뭐가 있냐고요!”
아블린은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븐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븐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옆으로 밀었다.
“켈레넨스크로 갈 거란 얘기를 제하자면 그 날 제가 말씀드렸던 건 전부 사실이고, 더 숨기는 것도 없습니다.”
이븐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뒤에서 슬로언과 베른트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면서도,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듯 거리를 유지했다. 아블린이 이븐을 뒤쫓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나를 대체 왜 데려온 거예요? 또 그 때와 같은 수작인 건가요?”
이번에는 이븐이 멈춰 섰다. 그는 자신의 등에 부딪힐 뻔한 아블린에게로 돌아서며 말했다.
“제가 아블린 당신을 설득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대주교의 계획과 그가 지금껏 벌여온 일들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당신의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설득하려는 태도예요? 사람을 속여서 곤란한 상황에 끌어들이는 게?”
이븐은 그 이상으로 대답하지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목적지의 위치 정도는 이미 숙지해뒀다는 듯 그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고, 지나가는 이를 붙잡아 길을 묻지도 않았다. 그런 확신에 찬 행동은 물론 철저한 사전 준비를 암시하는 것이었으므로, 연구실의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아블린은 거의 황소처럼 성난 숨을 씩씩대고 있었다.
“슬로언.”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이븐이 슬로언을 불렀다. 슬로언은 가슴을 붙잡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호명에 고개를 든 슬로언을 향해 이븐이 떠넘기다시피 종이를 건넸다.
“받으십시오.”
“이게 뭡니까?”
슬로언은 이마의 땀을 훔치고 종이를 펼쳤다. 멋들어진 글씨가 무색하게 간략한 내용이었다. 그조차 다 읽기 전에 이븐이 내용을 일러주었다.
“임명장입니다. 지금부터 헤르돈 항마연구소에 대한 내부 감사를 벌일 겁니다. 슬로언 연구원님께서 감사의 담당자가 되셔서 연구 활동 제반에 걸쳐 부정이 없었는지 확인해주셔야겠습니다.”
“감사라뇨? 그보다도 저 혼자서요?”
“베른트가 도와드릴 겁니다.”
슬로언이 고개를 돌리자 베른트가 참으로 믿음직스럽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븐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모두 주목해주십시오.”
구태여 목소리를 높일 필요 없이, 또 주목을 요청할 필요도 없이 연구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연구원들은 이븐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븐은 목을 고르고 그의 목소리가 연구실의 구석까지 닿을 수 있도록 우렁차게 말했다.
“지금부터 헤르돈 항마연구소에 대한 내부 감사를 실시합니다. 모든 연구원 분들은 하시던 일을 멈추시고 연구실을 떠나주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오늘부터 닷새 동안 진행될 예정이고, 이 기간 동안 연구실에 출입하여 상호 간에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요?”
이븐은 고개를 돌려 발언한 연구원을 쳐다보았다. 나이가 지긋하고 풍채가 좋은 남자였다. 이븐은 남자가 서있는 곳 뒤에 마련된 별도의 방과, 남자가 방금 열고 나온 듯 흔들리는 문에 차례로 시선을 두고 답했다.
“잔베르 교구의 사냥꾼 이븐 베르자크입니다. 숀더베르트 소장님이십니까?”
“···그렇소.”
숀더베르트 소장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동안 이븐은 연구원들의 면면을 천천히 훑었다. 마치 당신네들을 모조리 꿰뚫고 있다는 듯 위압적인 응시였다. 오래지 않아 소장이 황망한 정신을 수습하고 말했다.
“베르자크 엽사, 무슨 자신감을 갖고 연구소까지 찾아왔는진 모르겠지만, 항마연구원의 활동은 사냥단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되어 있소. 두 기관은 독립되어 있고, 밀접한 연관을 갖는대도 협조 관계이지, 어느 한 곳이 다른 곳에 부속되어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좋습니다, 소장님. 제가 말씀드리길, 내부 감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냥단의 개입이라 할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감사 사실의 고지는 제가 목청이 좋아서 대신 해드렸을 뿐입니다. 더욱이 이번 감사는 교단의 감찰부 수준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항마연구원장님의 특별 지시로 발효된 것입니다.”
소장은 연구실을 가로질러 이븐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대머리를 가리고 있던 머리칼이 희극적으로 휘날렸다. 그렇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처럼, 그는 코끝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눈앞으로 바싹 당겼다. 안경의 위치를 고칠 때 소장이 사용한 손가락 때문에 이븐은 어쩐지 면전에서 욕을 먹은 기분이었다.
“특별 지시라고 하셨소? 연구소장인 나는 모르고 사냥단의 일개 엽사인 당신은 알고 있는 특별 지시 말이오?”
“기습적이란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럴 만한 이유에 대해서도 물론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이븐은 숀더베르트 소장의 부릅뜬 눈에 맞서는 대신 연구원들을 둘러보며 또 다시 큰 목소리로 말했다.
“헤르돈 항마연구소의 연구 활동 가운데 이적 행위에 해당하는 사실이 있다는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이 시간부로 연구실 내의 모든 기물과 문서는 감사 대상입니다. 거기, 선생님? 책상에서 손 떼십시오. 베른트!”
베른트는 자신의 임무를 곧 파악하고 이븐이 손으로 가리킨 연구원에게 다가갔다. 그는 연구원이 손으로 짚고 있던 문서들을 빼앗아 들었다. 문서를 읽는 베른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암호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비밀문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연구원이 베른트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연구원이 한 마디 할 때마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던 베른트는 한층 심각해진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원소 기호라고 합니다! 해독할 수 있는지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베른트는 솔직히 얘기해줘서 고맙다는 듯 연구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의 눈동자에 퍽 비장한 빛이 서렸다. 이븐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위엄을 갖추려 노력하면서 말했다.
“마일스아이렌 연구소의 드웬다이크 선임 연구원이 감사를 주관하실 겁니다. 모쪼록 협조를 부탁드리며, 항마연구원의 자정 능력을 믿어보겠습니다. 베른트, 암호 해독은 슬로언에게 맡겨두고 연구원 분들 좀 밖으로 안내해주십시오.”
연구원들을 몰아내는 데에는 베른트가 도움이 되었다. 그는 우람한 체구로 연구실 안을 쏘다니며 양치기처럼 그들을 입구로 내몰았다. 이븐의 자정 능력 운운도 효과를 발휘했을 터였다. 그건 연구소가 협조하는 한 일을 키우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슬로언은 베른트가 소장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집어넣고 번쩍 들어 밖으로 쫓아내는 것을 지켜보며 말했다.
“제가 정확히 뭘 하면 됩니까?”
“선생님의 경력을 살펴봤습니다.”
이븐은 베른트가 문을 잠그려 하자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볼프스하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셨고 우수논문상을 제법 많이 받으셨더군요. 글라트펠트 연구소에서 경력을 쌓은 뒤엔 마일스아이렌으로 옮겨 오셨고요.”
“우수논문상은 졸업할 때랑 박사 학위 받을 때, 그렇게 두 번밖에······.”
“헤르돈 연구소의 활동에 대한 윗선의 개입 여부, 그 가운데서도 특히 대주교의 지시로 이루어진 연구 활동을 살펴봐 주십시오. 마물의 재생력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연구를 중점적으로 검토하시면 될 겁니다.”
이븐의 말에 아블린은 이적 행위에 대한 진술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슬로언은 자신 없다는 투로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연구원(硏究院)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저어되지만, 마물의 재생력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명목으로 진행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고요. 비단 헤르돈 교구에서뿐 아니라, 당장 북부의 거점 연구소인 글라트펠트의 실정만 하더라도 재생력 억지 방안을 강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런 쪽으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압니다, 슬로언. 글라트펠트에서 그런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슬로언 당신에게 이번 감사를 맡긴 겁니다.”
이븐은 슬로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치 주어진 임무의 무게감을 느껴보라는 듯, 그는 책상 앞에 오래 앉은 이들이 그렇듯 조금 굽은 슬로언의 어깨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이븐은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뚜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건 이질성입니다. 항마연구원의 연구 결과라고 보기 어려운, 독창적이고 그래서 위험한 실험들. 어디선가 다른 곳으로부터 흘러들어왔을 것만 같은, 이물감을 불러일으키는 자료들. 그런 것들을 찾아주십시오.”
이븐이 돌아서자 베른트가 문으로부터 비켜섰다. 그는 어느새 전투망치를 꺼내 그것으로 땅을 짚고 서 있었다.
“베른트, 잘 부탁합니다. 슬로언 연구원을 도와드리고,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늑대사냥개. 누구든 연구실에 들어오려고 하면 제가 망치로 머리를 찍어 버리겠습니다.”
이븐은 콧김을 내쉬고 스승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참을성 있게 대꾸했다.
“들고만 있어도 충분히 위협적일 겁니다. 가능하다면 말로 해결하시고, 일이 있으면 저를 부르십시오. 그리고 아블린.”
이븐이 문을 열고 정중하게 밖을 가리켰다. 팔짱을 낀 채로 서있던 아블린이 아랫입술을 내밀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금속으로 된 코에 입김이 서리고, 앞머리가 들렸다가 풀썩 내려앉았다. 이븐이 덧붙였다.
“저와 함께 대주교 각하를 알현하러 갑시다.”
- 작가의말
연구원(硏究員)과 연구원(硏究院)의 표기가 동일하다는 사실이 늘 저를 괴롭힙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엔 11막 3장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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