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막 3장 - 방아쇠를 당기다(1)
11막 회감
3장 방아쇠를 당기다
이븐이 히셀 드로크만 대주교를 만난 곳은 그의 집무실이 아니었다. 이븐과 아블린은 하인의 안내를 받아 첨탑의 가파른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하인이 문을 열고 뒤로 물러났을 때, 이븐은 자신이 본 풍경에서 감명을 받았단 사실을 솔직히 인정했다.
“쉬-.”
드로크만은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첨탑의 꼭대기 층에서는 온기를 머금어 조금은 눅눅하고 또 비린 기운이 풍겼다. 그건 날짐승의 냄새였다.
“자네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주게.”
이븐은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대주교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양동이에서 썰어놓은 고기를 한 점 집어 들었다. 대주교의 오른팔에 발톱을 박고 앉아 있던 매가 고개를 돌려 이븐과, 고깃덩이와, 허공의 어딘가를 차례로 살폈다. 서로 다른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넘기듯, 조류 특유의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매사냥을 즐기시는 줄 몰랐습니다.”
“사냥철이 아니어서 고기만 축내고 있네. 여름은 심심한 계절이야.”
“잘생겼는걸요.”
매는 대주교의 가슴 아래부터 그의 머리끝에 이를 만큼 거대했다. 잠시간의 탐색전을 벌이던 매는 이븐의 손에 들린 고기를 받아먹었다. 부리로 고기를 찢는 야만적이고 경건한 감각이 이븐의 팔에 옮겨 붙었다. 이븐은 대주교의 당당한 풍채를 보며 어쩐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을 했다.
“잔베르 교구의 이븐 베르자크입니다.”
“익히 들었네. 랑게 주교께선 무탈하신가?”
드로크만은 팔을 흔들어 매를 날려 보내고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매는 홰 위에 앉아 대주교를 내려다보았다.
“잔베르가 땅 속으로 꺼진대도 무탈하실 분이죠, 교구장님은.”
이븐의 말에 대주교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앉아있는 조악한 나무의자는 장난감처럼 보였고, 동시에 잘 마련된 소품처럼 보였다. 드로크만 대주교에겐 그가 존재하는 곳을 극장으로, 그리고 자신을 주연 배우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대주교가 울림 좋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펜하른 얘기는 들었네. 자네들 덕분에 에이델이 편안히 눈을 감겠어.”
자네들이란 말에 아블린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녀는 둘 사이의 대화에서 겉돌며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이븐은 곁눈질로 아블린을 살피고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대주교님께서 헤레틱스를 향해 내민 손을 거두시지 않는 한, 에이델은 눈을 감지 못할 겁니다.”
이븐은 자신의 말이 불러일으킬 효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대주교의 표정 변화 없는 얼굴을 봤을 때, 이븐은 그가 지금껏 보아왔던 여느 인물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대로 내버려두기로 하고,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겠나, 베르자크?”
“헤르돈 항마연구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구들, 거기에 헤레틱스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븐은 등 뒤의 아블린에게서 불안한 기색을 읽었다. 그는 이 대화의 끝에서 아블린이 그의 옆에 서 있기를 바랐다.
“인간을 감염시켜서 마물의 능력을 얻게끔 하는 실험 말입니다.”
“레니스 연구원이 하는 것과 같은 실험 말인가?”
“대주교님께선 결과의 동일성만을 취해 본질을 흐리고 계십니다. 로지아는 감염을 억제하는 방편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헤르돈의 연구소는 감염을 활용하는 법을 궁리하고 있고요. 둘 사이엔 저와 각하만큼이나 넓고 깊은 간극이 있습니다.”
“본질을 흐리고 있다······.”
드로크만은 마치 이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천천히 발음했다. 이븐은 돌연 앉아있는 대주교를 창밖으로 밀어 떨어뜨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무의미한 탐색전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드로크만은 쉬이 발톱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년째인가, 자네가 사냥꾼이 된 게?”
“삼 년차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교단과 사냥단, 항마연구원의 생리에 대해 더 잘 알아둘 필요가 있을 듯싶네.”
“이런 유의 연구가 교단 내부에서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실 양이시라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감히 답해드리겠습니다. 저는 헤르돈 교구의 연구가 교단 외부의 인물에 기대고 있지 않은지 여쭙고 있습니다.”
드로크만은 잠시 이븐을 노려보다가 그 옆으로 눈을 돌렸다.
“메리쿠르 자네는 말이 없군. 자네의 의견을 요청해도 되겠나?”
아블린은 사형수처럼 고개를 숙이고 매 발걸음이 마지막인 듯이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아블린은 이븐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베르자크 앞에서 더 이상의 위장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사냥꾼을 마물화시키는 각하의 계획을 여전히 지지합니다. 이 위험하고 매혹적인 계획이 교단의 질시(疾視)를 받는다 해도 저는 각하의 변호자로 남을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드로크만 대주교 각하.”
아블린의 얼굴에 믿음을 시험 당하는 미물의 비애가 얼핏 서렸다. 믿고 싶은 것과 사실 사이에서 그녀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러나 아블린은 결심 없는 편안한 세계로 달음박질치지 않았다.
“이 계획이 헤레틱스와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면, 각하께서 가장 먼저 대적해야 할 이는 베르자크가 아니라 저일 겁니다.”
드로크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날은 어느덧 저물어 있었다. 흐린 달빛이 쇠창살에 걸려 대주교의 몸 위로 줄무늬를 드리웠다. 이븐은 새장을 떠올렸다. 대주교를 가둘 수만 있다면, 가둬놓고 저 답 없는 침묵을 깨트릴 수만 있다면. 이븐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헤레틱스가 왜 전쟁을 원하는지 아십니까?”
“자네는 왜 그자를 죽였나?”
이븐은 그 갑작스럽고 엉뚱한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가 놓은 덫을 비웃는 것이었다.
“두 가지 질문을 겹쳐서 하고 있다는 뜻일세. 헤레틱스라는 집단이 전쟁을 원한다는 얘기는 처음 듣네. 교황 성하만 할까마는, 나도 사냥단의 활동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네. 그러나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공유되는 정보에 차등이 있는 것 같군.”
드로크만이 매서운 눈으로 이븐을 쳐다보았다. 달빛을 등지고 선 대주교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아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쨌거나 자네는 헤레틱스가 전쟁을 원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이유도······.”
순간 드로크만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오른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움켜쥐고 몸을 숙였다. 이븐은 침묵 속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대주교의 악문 잇새에서 흐느낌이 새어나왔을 때 이븐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홰 위의 매가 날개를 퍼덕이며 자세를 고쳤다.
아블린이 다가가려는 듯 주춤거리자 대주교가 팔을 들어 막았다.
“두통이야, 베르자크. 두통이 나를 죽이고 있네.”
드로크만이 힘겹게 짜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부정할 수 없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조부께서도, 부친께서도 이 고통을 참지 못하셨지. 난 우리 가문의 남자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야. 의사들이 말하기를 두개골을 절개하지 않고선 고칠 방법이 없다더군. 그렇게 하면 두통이 사라지느냐고 물으니 그들이 뭐라고 답했는지 아는가?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종양이군요.”
드로크만은 탈력한 듯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채 대주교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 남은 장작처럼, 두르고 있던 후광이 꺼진 대주교의 얼굴이 납빛으로 파리했다.
“그래, 난 주께서 허락하신 나의 시간이 다만 충분하기를 기도드릴 뿐이라네.”
이븐은 참지 못하고 대꾸했다.
“종양은 악마가 주고 신은 단지 죽음을 예비할 뿐이군요.”
“아, 불신자들. 내가 위안을 갖도록 잠시만이라도 내버려두질 못 하지.”
“신이 있다면 적어도 독주나 진통제보다는 위대해야 할 것 같단 뜻이었습니다.”
아블린이 곁에서 이븐을 눈으로 흘겼다. 드로크만은 성호를 긋고 중얼거렸다.
“우매한 이들은 섭리 속에서 겸허함을 갖추지 못하는도다.”
“고통 속에서 노예정신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봅니다.”
“자네를 위해 기도 드리네, 베르자크.”
“아껴뒀다가 대주교님 본인을 위해 쓰십시오.”
이븐은 생각과 동시에 말했다. 그건 말이라기보다 차라리 어떤 태도나 습관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도무지 경건해질 수 없는 시대였다. 믿음은 이 시대의 것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맹수처럼 대주교가 허공을 올려다봤다.
“자네가 기어이 방아쇠를 당기고 마는군.”
그러나 다음 순간 대주교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는 듯이, 심지어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말해보게. 헤레틱스는 왜 전쟁을 원하나?”
이븐은 입안에서 혀를 굴려 말을 고르다가, 오래지않아 자신이 진실만을 이야기하게 될 것을 깨달았다. 에두르는 말도, 완곡한 표현도 지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븐은 문에 대해, 전쟁과 문의 상관성에 대해, 그리고 그가 추측한 헤레틱스의 목적에 대해 차례로 모두 얘기했다.
대주교는 말을 잃은 듯 이마를 감싸 쥐고 있었다. 누군가 우그러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의 주름들이 깊어졌다.
“자네가 지금껏 내게 보여준 날선 태도에도 불구하고, 난 베르자크 자네를 믿네. 자네의 최선과 자네의 선의를 믿어.”
종양이 휘몰아온 고통을 겪은 후에, 그리고 이븐의 설명을 들은 후에 대주교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두통이 드로크만의 방어막을 깨고 이븐이 묘파해낸 헤레틱스의 진의가 그 틈으로 침입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가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과오에 대해서도 깨닫는 바가 있네. 그러나 거기엔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들도 있지. 베르자크, 아니, 이븐.”
드로크만의 음성이 간절해졌다.
“자네 말이 맞아. 내 교구의 연구소는 외부 인사의 도움을 받고 있어. 그들은 내게 자신들을 학술원이라고 소개했지. 나는 사냥꾼들에게도 미래가 있기를 희구하네. 내가 겪고 있는 두통 따위보다도 더 격렬할 그들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염원해. 나는 이 땅 위에 현신한 천사가 있다면 자네들 사냥꾼이 아닐까 항상 생각한다네.”
드로크만은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를 올리듯 머리를 숙였다.
“그래서 그들과 손을 잡았지. 학술원 말일세. 그런데 그 학술원이라는 것이 헤레틱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의심이, 결코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드는 것을 느끼네. 자네가 원한다면 그들과의 만남을 주선해주겠네.”
이븐은 뜻밖의 협조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끝나지 않았다는 듯 대주교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이븐, 바로잡되 다리를 불태워 버리지는 말게나. 현명한 이는 망령된 자의 그르친 농사에서도 병들지 않은 씨앗을 발견하고 그렇게 뿌린 씨앗에서 곡식을 얻는다지 않나. 그들에게도 이용 가치가 있을 걸세.”
“제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에 대해선 미리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조차 알지 못하니 말입니다.”
이해한다는 듯, 오히려 그런 솔직함이 더욱 반갑다는 듯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주교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하게.”
“대주교님께서 철회파를 이끌고 계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에 대한 파문을 철회하고, 네 나라의 군대가 교황령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시죠.”
이븐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잠깐의 공백이 다음 말에 담길 힘을 돋울 수 있기를 바라며 그는 힘준 입술 사이로 진심을 흘려보냈다.
“전쟁을 멈추어 주십시오. 영원히 멈추어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고요. 잠시만 늦추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냥꾼들이 헤레틱스가 얽힌 이 복잡한 사건을 매듭지을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전쟁을 멈추어 주십시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전쟁은 한참 전에 내 손을 벗어났어. 아득히 멀리 말일세.”
드로크만은 양손을 펼쳐 보였다.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그러나 그의 손아귀는 힘을 되찾아 허공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노력해보겠네.”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오히려 이븐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블린은 자신의 옆에 섰고, 드로크만은 완전히 물러서지는 않았지만 반걸음 정도는 양보했다. 반걸음 뒤의 대주교가 무엇을 예비하고 있을지, 이븐은 읽어낼 수 없었다. 그는 다만 그것이 계획된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다가오게 둘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저는 물러가보겠습니다. 대주교님께서 말씀하신 학술원과의 만남은 빠른 시일 내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이븐은 문을 향해 돌아섰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 대주교의 것인지, 홰 위의 날짐승이 쏘아 보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블린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가 대주교를 향해 말했다.
“신심을 굳히세요, 각하. 이 일이 끝난 뒤에도 저는 각하의 곁에 남아 있을 겁니다.”
“알아들었네.”
이븐은 잡은 문고리를 돌렸고, 다가올 싸움을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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