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막 3장 - 방아쇠를 당기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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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은 느닷없이 말(馬)이 가질 수 있는 평화에 대한 사색에 잠겼다. 조금 전 발굽을 디딘 곳과 지금 발굽을 디딘 곳 사이의 거리를 몸에 새긴 듯, 땅을 분절하는 규칙적인 보폭과 그 사이에 깃드는 정직한 호흡이 무료해서 경이로웠다. 생각과 판단을 기수에게 맡기고, 고삐와 박차가 간혹 의무를 일깨우는 단조로운 말의 세상이 이븐은 부러웠다.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거기에 낙관적 견해를 조금, 그러나 큰 기대 없이 덧붙이는 것이 다가올 일을 대비하는 이븐의 방식이었다. 최악을 상정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언제든 권총을 뽑아들 수 있게 만들었고, 낙관적 기대는 방아쇠에 걸린 손이 아군을 향해 당겨지지 않게끔 하는 최소의 장치로 기능했다.
이븐은 말을 타고 앞서 가는 아블린의 등을 보았다. 옅은 땀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막심은 헤레틱스를 위해 일했습니다.”
고삐를 잡은 아블린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은 그 조그만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걸음을 늦추었다. 이븐은 그녀를 따라잡아 옆을 점할 수 있었다.
“당신은 계속 저를 놀래는군요. 이제는 당신의 배 속에 뱀 수십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해도 믿겠어요.”
“중요한 건 막심이 잘못을 깨닫고 바로잡으려 했다는 겁니다. 뤼시앵에 대해선 이미 말씀드렸었죠. 언제부턴지는 알 수 없지만, 헤레틱스는 꾸준히 사냥단 내부에 내통자를 심어두려 했습니다.”
이븐은 아블린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앞을 보고 묵묵히 말을 몰아갈 뿐, 이븐이 던져오는 시선에 자신의 관심을 보태지 않았다.
“웨인을 아십니까? 체스바덴의 사냥꾼 웨인 헬라이드 말입니다.”
“당신의 스승이죠. 왜요, 그 사람도 헤레틱스와 내통했나요?”
이븐은 웨인에게 접근하는 헤레틱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상상 속에서 웨인이 지팡이를 휘둘러 그들을 쫓아내는 모습이 논리적 귀결처럼 자연히 따라붙자, 이븐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제가 하려던 말은······. 수습 기간이 끝나고 그웬돌라드의 어느 마을에서 사건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무난히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죠. 실수라고 해야 할지 방심이나 자만이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제 잘못으로 애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븐은 이 얘기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한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븐은 뤼스베르크에 가게 된다면 그의 무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가, 곧 그런 무덤조차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위르겐 마이어의 감염된 시신은 그가 맞섰던 다른 마물들과 함께 재가 되었다.
“무섭게 혼이 났죠. 웨인한테 말입니다. 다시 그 마을을 찾은 웨인과 저는 제가 미처 처리하지 못했던 마물들을 마저 죽였습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저는 풀이 죽었죠. 유족들도 저를 죽일 놈으로 몰아세우고요. 그때 웨인이 저한테 그렇게 말하더군요.”
웨인은 거의 모든 면에서 이븐의 스승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밤바다 위로 당당히 버티고 있는 샛노란 불빛을, 등대처럼 곧은 모습을, 이븐은 그의 스승에게서 느꼈다.
“죽은 사람들이 위인으로 칭송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말입니다. 죽었기 때문이라더군요. 죽어서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를 수 없고, 저질렀던 잘못들도 시간이 지나 잊히면 그의 공적을 기억하는 이들이 그 사람을 위인으로 떠받든다고요. 돌려 말하자면, 살아있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겁니다.”
웨인의 말을 전하던 이븐은 어느새 그 자신의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하물며 매번 선택의 기로에 서는 사냥꾼들이야 어련하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자면 두 배는 많은 잘못을 저질러 왔을 겁니다. 그렇다면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의 유무가 선악의 기준이 될 겁니다. 아무리 좋은 활이라도 도지개로 바루지 않으면 결국엔 휘고 틀어져서 제 구실을 못 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븐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이야기가 훈계조로 마무리된 것에 후회했다. 그는 쑥스러운 듯 덧붙였다.
“아블린, 옆에 서 줘서 고맙습니다.”
“이븐 당신은 당신의 옳음을 확신하는군요. 잘못된 건 다른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을 교도해야 할 의무가 당신에게 있다고 믿는군요.”
“헤레틱스에 관한 한, 그렇다고 믿습니다.”
흙길이 끝나고 숲길이 이어졌다. 이븐은 말이 나무뿌리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히 이끌었다. 햇살을 받아 전리품처럼 빛나던 아블린의 코가 나무 그늘 아래서는 녹슨 병장기처럼 보였다.
“신을 믿지 않나요, 이븐?”
“믿기 어렵다고만 해두겠습니다.”
“신을 믿는 이들은 신을 내세워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울 수가 있죠. 하지만 내가 볼 땐 신을 믿지 않는 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신을 믿지 않는다는 건,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아무것이나 믿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죠. 불신자들은 신을 대신할 것을 찾아요. 그건 이론이나 사상일 수도 있고, 위대하다 여겨지는 사람일 수도 있죠.”
아블린이 고개를 돌려 이븐을 쳐다보았다.
“혹은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요. 이븐 당신처럼 말이에요.”
이븐은 대꾸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아블린의 말이 이어졌다.
“정신병원에 가본 적 있나요? 감옥과 다를 바가 없죠. 거기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놀랄 거예요. 왜냐면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정말로 논리적이거든요. 자기가 찻주전자라고 믿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렇게 믿기만 했다면 그건 광기라고 불러도 달리 할 말이 없겠죠. 하지만 이 사람은 매일 아침 사슴가죽과 호분으로 몸을 닦고, 찻잎과 뜨거운 물을 입안에 머금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어요.(*)”
아블린의 입가에 불완전한 미소가 걸렸다. 사산된 태아처럼, 이븐에게는 그 미소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는 거죠. 자신의 세계에서 그 사람들은 모두 정연한 논리를 갖고 있어요. 모르시겠어요, 이븐? 광기란 논리의 결여가 아니에요. 자기가 가진 논리를 극단까지 밀고 가는, 그 주저 없음이 광기인 거죠.(**)”
이븐은 그 광기가 자신뿐 아니라 아블린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입을 열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블린의 덧붙이는 말이 더 빨랐다.
“자신을 너무 믿지 마세요.”
이븐은 아블린이 하지 않은 말까지도 모조리 귀로 삼켜 머리로 곱씹었다. 이븐은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입천장에 닿는 혀의 감각이 거슬거슬했다.
아블린이 먼저 말에서 내렸고 뒤이어 이븐도 땅에 섰다. 그는 평소처럼 고삐를 말 머리 위로 던지려다, 교구에서 빌려온 말임을 떠올리고 아블린을 따라 나무에 매어두었다.
드로크만 대주교가 일러준 접선 장소는 숲속의 오두막이었다. 그건 에드가드 바이스게르버를 만났던 오두막보다는 작았고, 잔베르에 있는 이븐의 집보다는 컸다. 이제 이븐은 문 뒤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그것은 헤레틱스와 관련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블린이 하지 않은 말이 머릿속을 헤집는 가운데, 이븐은 전혀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그는 권총의 손잡이를 잡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문을 열었다.
“앉으시오.”
이븐은 한숨을 뱉고, 탁자로 다가가 앉았다. 발음의 강세가 부자연스럽고 튀는 에케메니아인의 말씨였다. 구릿빛의 짙은 피부는 남자의 가깝거나 먼 조상이 케스타리카 대륙에서 건너왔음을 알려주었다. 이븐은 에케메니아 출신의 사냥꾼 이름을 하나 알고 있었다.
남자가 두른 복면이 들썩이며 이븐의 추측을 확인해주었다.
“다모크 자한. 헤르돈 대교구의 사냥꾼이오.”
“이븐 베르자크입니다. 알고 있겠지만.”
아블린이 문에 빗장을 걸었다. 그녀는 그렇게 닫아건 문에 기대어 섰다. 이븐은 눈을 굴려 오두막의 다른 출입구를 찾았다. 가구며 집기 따위를 끌어다가 창문을 모두 막아두어 실내가 컴컴했다.
“대주교는 계획을 포기할 생각이 아니었군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고.”
“네.”
아블린은 잠시 뜸을 들이고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덧붙였다.
“아니었어요.”
“들어나 봅시다. 당신들이 그 따위 계획에 매달리는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저 문 밖으로 함께 걸어 나갈 수 있소.”
아무리 목이 쉬었다 한들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여들지, 그 반대는 아닐 터였다. 그러나 다모크의 음성은 쇳소리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를 찾아야 할 지경이었다. 머리 잘린 시체의 목 단면에 바람을 넣어주면 저런 소리를 낼 듯싶었다.
“선심 쓰듯 말하는군요. 문 밖으로 나가는 길이라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길은 언제나 있지. 문제는 항상 그 위에 서있는 사람 때문에 생기오.”
“지금 아블린이 저러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까?”
아블린은 이제 그녀의 글레이브를 꺼내어 들고 있었다. 이븐은 은으로 된 칼날을 곁눈질로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회는 주어졌고 당신은 각하도, 저도 설득하지 못했어요. 이젠 우리 차례죠.”
대화는 자신에게 맡겨두라는 듯, 다모크가 손을 들어 아블린을 제지했다. 복면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다모크는 그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단서는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한 듯한 눈가의 주름뿐이었고, 그마저도 세계의 끝을 확인한 것처럼 초연한 눈동자 때문에 인상이 흐려졌다.
“당신의 입장을 이해하오. 당신이 고민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소.”
“고민요?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이븐은 아블린과 다모크를 번갈아 살핀 뒤 다시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들 둘 중 누구를 먼저 쏴야 할지에 대해선 확실히 고민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속될 수 없다는 것 때문이겠지. 베르자크 당신 말대로 이 몸은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파멸이 예정되어 있지.”
이 몸이라고? 이븐은 가늘게 뜬 눈으로 다모크를 노려보았다. 그가 사용하는 표현들은 마일스아이렌에서 이븐 자신이 아블린에게 썼던 것이었다. 둘의 단단한 결속을 확인한 이븐은 등받이에 몸을 편안히 기대며 자연스레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헤르돈의 연구원들은 바로 그런 지속 가능성을 얻어내려 노력하고 있소. 발전으로 향하는 그 길 위에서 당신이 버티고 서있지만 않는다면, 우리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소.”
“난 당신들이 자기 몸에다 무슨 짓을 벌이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건 헤레틱스입니다. 당신네들의 정신 나간 계획에 대해서라면, 우선 그놈들을 잡고 난 다음에 마저 듣기로 합시다. 그때는 나도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요. 헤레틱스를 잡아들여 마물화의 비법인지 뭔지 여하간 그딴 걸 실토할 때까지, 고문을 하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헤레틱스는 자신들의 계획이 실현될 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을 것이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들의 등을 먼저 긁어주어야 하는 입장이오.”
이븐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제기랄, 다모크, 제발. 모르시겠습니까? 헤레틱스가 문을 열면 모든 게 끝이란 말입니다!”
“숱한 사람들이 종말에 대해 얘기했소.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실현되지 않았지. 마물이 처음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세상이 끝장났다고 말했소. 그 후로도 세상은 수십 번 끝장났지,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두려운 거요, 베르자크? 그들, 정신이 온전치 못한 학자들의 엄포가? 그게 아니라면 당신도 거리의 광신도들을 본받아 종말을 주워섬기며 온순한 영혼들을 겁박하려는 거요?”
다모크의 말은 점점 알아듣기 어려워졌다. 말이 더해지고, 점차로 속도가 붙으면서 이븐이 마지막으로 들은 다모크의 목소리는 짐을 가득 실은 마차가 진흙탕에서 빠져나올 때 내는 소리에 가까웠다.
“대담한 척 하지 마십시오, 다모크. 내가 보기엔 당신이나 아블린이나 똑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헤레틱스 따위의 미친놈들과 손을 잡을 이유가 없지. 뭡니까? 뭐가 당신을 그토록 두렵게 하는 겁니까?”
이븐은 다모크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아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말을 할 때마다 괴이하게 움직이는 복면이었다. 그건 일반적인 입을 가진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언제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도록, 이븐은 탁자를 짚고 있는 왼손에 힘을 넣으며 물었다.
“뭘··· 감추고 있는 겁니까?”
다모크는 손을 들어 천천히 자신의 머리 뒤로 가져갔다. 이윽고 복면이 무대의 개막처럼 벗겨져 내려갔다. 이븐은 재빨리 권총을 꺼내들어 다모크를 겨누었다. 그러나 다모크가 더 빨랐다. 그가 휘두른 사슬낫의 추(錘)가 이븐의 손을 가격했고, 권총은 바닥에 뒹굴었다.
“협상은 결렬되었소. 베르자크 당신이라면 교단이 사냥꾼의 전당에 묻어줄지도 모르지.”
세로로 갈라져 곤충을 연상시키는 아래턱을 움직이며, 다모크가 말했다. 턱마다 두 줄로 들어찬 날카로운 이빨, 선홍빛 잇몸과, 그와 대비되는 검은 혀.
그건 흡혈귀의 입이었다.
*에드거 앨런 포,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요법』에서 따옴.
**마찬가지로 포가 한 말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가 썼던 편지의 구절인 “I became insane, with long intervals of horrible sanity.”가 와전된 것으로 보임.
- 작가의말
초등학생 때 책장에 꽂힌 「검은 고양이」를 뽑아 드는 실수만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저도 조금 더 밝은 분위기의 글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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