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막 4장 - 사냥꾼은 두 번 죽는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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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쓰러진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재구성된 머리가 불완전해 사고에 서툴렀다. 몇 가지 분명한 기억들이 망각의 깊은 바다 위에 섬처럼 떠오르고, 섬 위에 발 딛고 서서 사라지는 기억들을 계류했다. 밧줄을 던져··· 밧줄··· 밧줄? 그렇지, 사슬.
남자는 떨어져 있던 사슬낫을 집어 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알지 못할 때, 그의 눈에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의 얼굴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사지는 그러나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몸짓에 홀린 듯 남자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내게도, 그걸, 내게도······.”
여자의 입에서 부서진 치아가 우수수 떨어졌다. 무엇인가를 갈구하듯 여자의 눈동자가 애절했다. 그러나 무엇을? 삶의 방식은 다채롭되 죽음의 얼굴은 한결같았다. 생이구나, 남자는 중얼거렸다. 여자는 생을 원하는구나.
여자, 아블린이 힘겹게 고개를 틀어 흰 목을 드러냈다. 저 하얀 살갗 아래로 꿈틀대고 있는 핏줄이 훤했다. 다모크는 아블린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다모크는 아블린의 목을 물었다. 덧없는 유희를 즐기는 듯 아블린의 일그러진 입술이 미소를 띠었다.
“다모크··· 그만··· 이건······!”
그러나 곧 피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은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팔을 들어 다모크를 밀려 했지만 그의 탐식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악착같이 목에 매달려 피를 들이마셨다.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아블린의 뒷굽이 바닥을 무용하게 긁었다. 나무 바닥에 벗겨낸 속살처럼 흰 줄이 남았다.
다모크는 몸을 일으켰다. 이 두 번째 기립은 첫 번째와는 달랐다. 회생. 그는 손아귀 속의 낫을 움켜잡았다. 이제 모든 것이 여름날의 태양만큼이나 환하고 분명해졌다. 그림자는 주인을 버리지 않는다. 감염되어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던 다모크 자신을 대주교가 끝내 저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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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말을 타고 숲을 빠져나가며 베른트가 말했다. 이븐은 자신이 아블린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무슨 모습 말입니까?”
“떠시는 모습요. 떨고 계시더라고요.”
이븐은 두 사냥꾼의 시체를 뒤로 하고 오두막을 나오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나 열병을 앓은 듯이 조금 전의 기억은 흐릿했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헤르돈까지 오는 데 썼던 마차였다.
“베른트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군요. 바로 방금 전에 사냥꾼의 머리를 망치로 날려버렸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그냥 뭐,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단순하게요?”
“그 왜, 있잖습니까. 목표가 정해지면 그것만 생각해야지, 전 머리가 나빠서 복잡하게 이걸 하면서 저것도 해야겠다, 저걸 할 때 이렇게 해야겠다 그런 식으로 생각 못합니다.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인 거죠.”
베른트가 말에서 내리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삐를 들고 서있었다. 이븐이 고삐를 넘겨받아 나무에 매어 두었다. 교구의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고삐를 느슨하게 조였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도 무섭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일단 싸움에 돌입하면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지더군요. 총성이 들렸을 때 뭔가 잘못됐다 싶었습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메리쿠르 씨가 당신한테 총을 겨누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시다시피··· 그렇게 된 거죠. 잘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잘하기 힘들 겁니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슬로언의 꼴을 보고 이븐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수줍은 듯 앉아있는 연구원이 간통 현장을 들켜 쫓겨나온 정부(情夫)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눈인사로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한 이븐은 마차에 올라탔다.
헤르돈으로 올 때 아블린이 앉았던 자리에는 나무상자가 놓여 있었다. 이븐은 나무상자를 옆으로 밀어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베른트가 한 발로 껑충 뛰어 오르자 마차가 들썩였다. 이븐은 부목을 대고 있는 베른트의 발목을 보고 말했다.
“좀 봅시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늘 있는 일인걸요.”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으나 이븐은 베른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을 보았다. 슬로언이 둘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얼른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일단 그웬돌라드 쪽으로 갑시다.”
이븐은 총알이 관통한 자신의 허벅지를 살피며 답했다. 슬로언이 말을 몰아 마차의 방향을 돌렸다. 동쪽이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마차는 덜컹거리다가 더디지만 확실히 자신의 리듬을 찾아갔다.
이븐은 눈을 감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드로크만은 계획을 포기할 의향이 조금도 없는 듯했고, 이븐이 다모크를 죽여 버렸으니 결과적으로 가속화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드로크만의 다음 행보가 무엇일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단 것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이븐은 드로크만의 입장에 자신을 이입해볼 수밖에 없었다. 수하의 두 사냥꾼이 방해꾼을 처리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도 전에, 아주 처음부터 방해꾼에게 협조할 생각은 없었다. 이 방해꾼이 가진 정보가 교단에 공유되면 입지는 위태로워진다. 적과의 내통, 협력, 사냥꾼의 마물화. 방해꾼을 처리하고 나서 움직인다면 너무 늦고 만다.
‘자네가 기어이 방아쇠를 당기고 마는군.’
슬로언의 말이 사색에 잠겼던 이븐을 깨웠다.
“저희들을 잡으러 왔던 병사들이 묘한 말을 하더군요. 교구의 경비병들인 것 같았습니다.”
“묘한 말요?”
“대치하던 중에 베른트가 우리는 교황 성하의 명에 따른다고 소리쳤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이 뭐라고 받아쳤느냐면······ 뭐라고 그랬죠, 베른트?”
“저한테 물으셔봤자··· 저야 영 정신이 없어서요.”
둘 모두 연구실 습격에 적잖이 당황했었던 모양인지 회상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목적지는 알되 그리로 가는 길이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잠시 몇 마디를 중얼거리던 슬로언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지, 우리 뒤에도 곧 하나 생긴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뭐가 생긴다는 겁니까?”
“글쎄요, 맥락을 살펴보면······.”
자신이 내뱉은 다음 말에 슬로언은 본인이 놀랐다.
“교황이겠죠?”
이븐은 무엇인가 중대한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는 슬로언이나 베른트,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얼른 물었다.
“드로크만은, 대주교는 어디 있습니까? 헤르돈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희가 습격을 받기 직전에 어딜 가는 모양이더라고요.”
베른트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리둥절해져서 답했다. 이븐은 이마를 감싸 쥐고 나직이 말했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븐은 베른트의 물음에 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일어난 일들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파문 이후 더욱 첨예해진 교황과 황제의 대립, 목전에 당도한 전쟁, 그리고 발각된 적과의 내통. 드로크만 대주교의 선택은 명백했다.
슬로언도 동일한 결론에 이른 듯했다.
“반역입니까? 대주교가 결국 교황 성하를?”
“슬로언, 마일스아이렌으로. 교황청으로 가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드로크만 대주교도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 텐데요. 교황이란 자리는 그저 빼앗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로덴치오 추기경이 각지의 고위 성직자들을 불러 모았지요.”
나이로드 교황이 리카드 8세를 파문한 일의 전언(傳言)은 분명했다. 전쟁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 리카드 8세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저 살기등등한 교황에 맞서는 대신 각지의 성직자들을 움직이는 편을 택했다. 주지 않던 돈을 주는 일에서 양심을 떠올리고 저항한 성직자는 제법 있었지만, 주던 돈을 주지 않는 일에는 대개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그럴 듯한 명분도 있었다. 게헤만 공화국의 지도부는 교회를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해 척결에 나섰고, 그들 혁명 세력이 항시 그렇듯 그런 척결은 최대한도의 완곡어법을 동원해도 불미스러운 것이었다. 교황청의 침묵 속에서 피의 대가는 이자만 불렸고, 종내 오래 전 잊혔던 단어, 성전(聖戰)을 끌어오는 성직자도 있었다.
슬로언이 이븐의 말을 받았다.
“이번 파문 결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죠. 파문을 번복하진 않더라도 원성을 잠재울 필요는 있었으니까요. 자문회의라고 하던가요, 그걸?”
“그렇게 모은 고위 성직자들에는 추기경들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추기경들이 모이면······.”
“콘클라베.(*) 교황을 선출할 수 있죠.”
슬로언은 자신이 말하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베른트는 여전히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만은 느꼈는지 잠자코 있었다. 슬로언이 교황의 변호인을 자처했다.
“하지만 무슨 명분으로요? 나이로드 교황 성하께선 대마항쟁에 최선을 다해 오신 분이고, 그 사실만큼은 자타가 공인하잖습니까?”
“저도 정치는 잘 모릅니다만, 드로크만과 결탁하고 있는 남부의 귀족들이 사병을 올려보내고, 로덴치오 추기경이 콘클라베를 주도한다면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로덴치오 추기경 예하는 교황의 사람인데요, 이븐.”
“교황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븐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 추기경의 얼굴을 떠올렸다. 독대한 적은 없었지만 스치듯 인사를 나눈 건 수차례였다. 조심성이 몸에 배어 오히려 망설임 없던 동작들,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주위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삼키는 눈동자. 그 왜소한 노인은 드로크만 대주교보다도 거대했다.
“그래서 자문회의를 구성하자는 제의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겠죠. 로덴치오는 누구의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교단이죠. 그가 대변하는 건 교단의 영속성입니다. 나이로드 교황이 시국에 홀로 맞서 위태롭게 버틸 때, 추기경은 다른 길을 본 겁니다.”
“저기, 이븐······?”
“하지만 로덴치오 추기경은,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교황의 후견인인데 설마 대주교와 손을 잡으려고요.”
“슬로언, 저 뒤에······.”
이븐과 슬로언이 말을 멈추자, 베른트가 별로 중요치 않은 일로 대화를 방해해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누가 따라오는데요?”
그제야 마차의 뒤를 따르는 말발굽 소리가 이븐의 귀에도 들어왔다. 이븐은 마차에 난 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이어서 팔도 밖으로 뺐다.
탕-
이븐의 갑작스런 총격에 베른트가 놀라 펄쩍 뛰었다. 그도 반대편 창으로 머리를 내밀어 따라오는 이를 확인했다. 그건 다모크였고 그가 타고 있는, 총에 맞은 게 분명한 말이 피를 흘리면서도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슬로언!”
이븐은 다시 다모크를 겨누며 소리쳤다.
“마차를 멈춰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다모크는 한 손에는 낫과 고삐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창을 든 채 맹진해오고 있었다. 창은 아블린의 것이었다. 이븐은 다모크의 입가에 묻은 피에서 아블린의 운명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다모크가 창 든 손을 높이 치켜들자, 이븐은 얼른 마차 안으로 돌아와 베른트를 끌어 당겼다.
챙-
금속성 충격음이 울리고, 마차가 요란하게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급격히 오른쪽을 향해 틀어졌을 때, 이븐은 다모크가 노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바퀴에 뭐가 걸렸습니다!”
마부석에서 슬로언이 소리쳤다. 말들이 거친 숨을 토하며 흥분해서 울었다. 이븐은 다시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지만 이쪽에서는 더 이상 뒤가 보이지 않았다.
“마차를 멈추십시오!”
이븐의 고함에 슬로언은 숫제 말의 목을 꺾어버릴 듯 고삐를 머리 위로 들어 당겼다. 마차가 돌연 오른쪽으로 기울고, 무엇인가 둥근 것이 빠르게 구르며 슬로언의 옆을 지나갔다. 그건 마차 바퀴였다.
말들과 마차를 연결했던 접합부가 부서져 나가고 한쪽 바퀴를 잃은 마차는 그 자리에서 반 바퀴 회전했다. 슬로언은 이제 자신을 향해 말을 달려오고 있는 다모크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슬로언으로서는 눈으로 쫓을 수도 없이, 추가 날아들었다.
“켁-!”
목깃을 잡아끄는 힘에 슬로언은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다. 귀의 바로 옆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마부석에 앉아있던 그의 몸은 자신도 깨닫지 못한 사이 흙바닥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땅에 닿은 부위가 모조리 쓰리고 아렸다.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듯, 이븐은 슬로언의 목깃을 움켜쥐고서 그의 몸을 멀찍이 뒤로 내던졌다. 이븐이 권총을 뽑아들며 외쳤다.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권총을 조준해 쏠 틈은 없었다. 다모크의 낫은 이미 이븐의 목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이븐은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입을 벌렸다.
캉-
이븐은 이를 세워 낫을 물었다. 날이 뺨을 찢어 입안에 피가 흥건히 고였다. 말에서 떨어진 다모크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모크는 사슬낫의 다른 쪽 끝을 잡은 채 버텼다. 그러나 당기지 않고, 다시 한 번 다모크는 이븐을 향해 접근했다. 그는 암벽을 등반하듯 양팔로 사슬을 차곡차곡 접어 오고 있었다.
이븐은 낫을 그대로 문 채 권총을 발사했다. 다모크의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회수한 사슬의 길이에 여유가 생기자 그는 추로 이븐의 얼굴을 갈겼다. 이븐은 물었던 낫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추가 스친 콧잔등이 화끈거렸다.
노력도 헛되이 부러뜨리려던 낫은 멀쩡했다. 이븐은 다모크와 대치하면서 눈으로는 베른트를 찾았다. 베른트는 다모크가 타고 왔던 말을 때려죽이고 있었다. 말은 대가리가 으깨져 형체가 사라질 때까지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감염된 것이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저더러 북부의 다모크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븐은 교단의 가장 위대한 사냥꾼 중 하나를 마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잔베르에서 늑대인간들을 잡아 죽이기 전에, 당신은 벤하우에서 흡혈귀들을 죽였었죠.”
피에르벤에 그림자가 있다면 그웬돌라드엔 늑대사냥개가 있다고, 북부의 호사가들은 자랑스레 말했다. 지금의 일도 흥미 본위의 이야깃거리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븐은 입맛이 썼다.
“그때입니까? 감염된 게?”
다모크는 머리 위에서 추를 돌릴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반걸음을 내디뎌 이븐을 향해 다가왔다.
“마물을 사냥하는 마물로 살아왔군요. 나처럼. 아니, 나보다 앞서서.”
이븐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것이 거울이 아니기를 빌었다. 미리 들춰본 책의 결말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븐은 팔을 내뻗어 다모크의 머리를 겨눴다. 그는 입안에 넘치는 피를 삼키고, 따가운 목으로 말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그리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붕-
신호를 받은 베른트가 망치를 휘둘렀고, 스파이크는 다모크의 옆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다모크는 몸을 틀며 내던진 추로 베른트를 가격했다. 가슴을 움켜쥐고, 베른트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다모크가 다시 베른트를 향해 추를 던지려 할 때, 이븐이 뒤에서 그를 덮쳤다. 권총의 사용법 따위는 잊어버렸다는 듯, 이븐은 다모크의 등에 올라타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이미 찢어져 있던 뺨 덕분에 물기가 수월했다.
탕-
바닥에 메다꽂힌 이븐이 다모크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일어나면서 이븐은 총을 바꿔 들었다. 이어지는 총격에 처음으로 다모크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븐은 놓치지 않고 연달아 방아쇠를 당겨 약실을 모조리 비웠다.
다모크가 이븐에게 덮쳐들었다. 둘은 어느새 무기도 놓쳐 버리고 맨손으로 치고받으며 엉켜서 굴렀다. 네 개의 손이 모두 인간의 것이 아니어서 살을 찢고 뼈를 부러뜨리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퍽-
올라탔던 다모크의 몸이 갑작스레 무너지고, 이븐은 자세를 틀어 상하를 뒤집었다. 베른트가 뒤로 물러났다. 인간다운 데 하나 없는 마물의 눈동자. 이븐은 그 눈을 감기기 위해 다모크의 목을 움켜쥐었다. 힘주어 위로 밀자 목이 뽑혀 나왔다.
이븐은 옆으로 쓰러졌다. 목을 잃은 다모크의 몸이 흙바닥 위에서 버르적거렸다. 베른트가 망치로 내리쳐 그 몸을 잘게 부수었다. 육편이 땅에 흩어졌다. 이븐이 천천히 일어나 베른트를 붙잡았다. 그는 떨고 있지 않았다. 상대를 부수고 또 부수는 데에 열중한 몸에서는 열기만 피어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븐은 허리에 차고 있던 기름통을 꺼내들었다.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븐은 다모크의 몸 위로 기름을 부었다. 다져진 고깃덩이 위로 기름이 섞여들었다. 사냥꾼은 두 번 죽는다. 죽음에 이를 만한 공격을 받더라도 아주 죽어버릴 때까지 싸우는 것이 사냥꾼의 숙명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뜻이어야 했다.
이런 식은 아니어야 했다.
이븐은 시체에 불을 붙였다.
11막 마침.
*교황을 뽑는 전 세계 추기경들의 모임. 교황이 사망하거나 물러나면 16~19일 사이에 교황청의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새 교황을 선출한다(표준국어대사전).
- 작가의말
11월 2일 금요일은 휴재하고, 다음 주 월요일 12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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