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막 1장 - 울게 하소서(1)
12막 악야(惡夜)(*)
우라질 머저리 같은 놈들! 에이든 선장이 소리쳤다. 폭풍우란 말이다, 폭풍우! 네놈들이 인어와 떡을 치고 해신의 수염으로 뒤를 닦지 않는 한 폭풍우는 지나간단 말이다! 하지만 선장님. 그렇게 외친 건 작살잡이 요아힘이었다. 뱃전에 부딪는 파도 소리를 이기려고, 그가 부르짖었다. 우리에겐 지금이 영원 같단 말입니다!
- 헤르만 말러, 『짐승의 바다』
일어나는 동안 그 의미가 만인에게 분명히 지각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흙탕물과 같아 불순물이 모두 가라앉고 난 뒤에야 비로소 분명해지는 일도 있다. 혹은 영영 알 수 없는 일도 있다. 혼란만이 유일한 질서로서 규정되는 이런 일들은 대개 그 일에 관여한 이들이 모두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결과이다.
- 마누엘라 카우프만, 『근대적 조직체제의 발전과 맹점』
1장 울게 하소서
“드웬다이크 씨가 제 도움을 거절했어요.”
“그래서?”
이븐은 약실에 화약을 재우며 말했다. 그는 또 다시 화약을 덜어냈다. 손은 정직했고 우둔했다. 손이 기억하는 표준은 마물에게 맞춰져 있었다.
“이븐이 그런 거예요?”
“뭘?”
이븐은 은탄환이 아닌 일반 탄환을 약실에 넣으며 반문했다. 그는 여전히 로지아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로지아는 이븐이 탄환을 꾹꾹 눌러 장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총열 아래에는 꽂을대 역할을 하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헤르돈의 연구 자료를 살피는 일에 제가 관여하지 못하도록···”
“그래.”
이븐은 약실을 밀어 넣고 허공을 겨누었다. 사람 잡는 총은 이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게 느껴졌다.
“내가 했어.”
“왜요?”
이븐은 이제 더 큰 권총으로 손을 옮겼다. 회전식 연발 권총은 손에 익은 무기였지만, 세 개의 총열을 겹친 경우는 그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공방의 벤야민이 쥐어준 것이었다. 약실을 옆으로 밀자 벌집 같은 구멍들이 드러났다. 구멍은 열여덟 개였고, 이븐은 탄환을 고민했다.
“그 사람이 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로지아 당신을 믿을 수 없으니까.”
이븐은 공이치기를 매만졌다. 세 갈래로 나뉜 공이치기는 지나치게 거창했다. 이븐은 장갑 낀 손으로 은탄환을 집어 들었다. 이븐은 로지아의 잠긴 목소리를 들었다.
“···왜요?”
“에드가드 바이스게르버는 헤레틱스의 일원이었어. 그는 결국 후작의 손에 죽었지.”
사이를 두고 로지아가 답했다.
“몰랐어요.”
바이스게르버의 정체와 죽음 가운데 무엇을 몰랐다는 것인지 이븐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둘 다이리라 생각했다. 이븐은 책상 위에 놓인 서신에 시선을 두었다. 마일스아이렌으로 향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변경되어 잔베르를 거쳐 갈 수밖에 없었다.
다모크와의 싸움에서 재생력을 비롯한 마물의 능력을 끌어 쓴 탓이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적절하게, 잔베르에 도착하자 연락원인 코리나가 서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헬하우젠의 스타샤가 보내온 것이었다. 이븐은 권총을 내려놓고 앉은 몸을 돌렸다.
“나도 네가 헤레틱스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분명히 연결점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지.”
“설령 에드가드가 헤레틱스였다고 해도 감염을 억제하는 실험과 연구는 제 의지에 의한 것이었어요. 이븐,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 남겨두기 위해 전력을 다했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은 절 믿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네요. 외람되지만······.”
로지아의 입술이 무언가 말을 뱉어냈다가, 다시 삼켰다. 그러나 의지를 다져 그녀는 결국 하고자 했던 말을 내뱉었다. 마주한 로지아의 두 눈에 눈물이 차 있었다.
“배신당한 기분이에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로지아와 달리 이븐은 망설임 없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배신감의 연유에 대해서는 그도 확신하지 못했다. 자신의 피와 살 속에 맞서 싸우려 했던 적의 술수가 배어 있다는 사실? 그러나 그건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았다. 빼앗아 든 칼로 상대를 찌르는 일 따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런 배신감은 멋대로 희망을 가졌던 대가일지도 몰랐다. 이븐은 다모크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헤르돈 연구소의 협조 요청을 죄다 반려했던데. 이유가 뭐지?”
로지아의 모아 쥔 손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답하지 않았으므로 이븐은 재차 물었다.
“의지야, 능력이야?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믿었던 거야, 아니면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거야?”
이븐은 로지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래 전에는 저 얼굴과 저 머릿속에 그가 기다리는 답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이븐은 대답하지 않는 로지아의 침묵 속에서 앙상한 결말을 확인했다.
“로지아, 넌··· 아무것도 모르는군. 넌 그저 감염의 진행을 늦추는 것밖에, 그것밖에 몰라. 그마저도 헤레틱스의 연구에 기대고 있는 데다가 바이스게르버까지 죽어 버렸으니 이젠······.”
“저도 최선을 다했어요!”
로지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븐은 온몸을 떨면서 서 있는 연구원을 보며, 안아주고 싶은 기분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은 충동을 동시에 느꼈다. 끌어안아 으스러뜨리고 그 시체에 입을 맞추고 싶은 기분을, 이븐은 참아야 했다.
“모든 걸···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봤다고요! 하지만 감염된 신체를 영영 되돌리는 법은 고사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법도 없는 걸 어떡해요! 저라고 에드가드의 연구를 빌려와서 마음이 편했겠어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의 연구 자료를 계속 들여다보면, 그 연구를 제 방식대로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고백을 듣고 있는 것이 괴로워 이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진실은 언제는 그렇지 않았냐는 듯이 또 다시 가능한 한 최악의 형태로 추했다.
“맞아요. 전 남의 연구를 빌려와서 제 것인 양 떠벌리고 다니는 반쪽짜리 학자예요. 학자라고 불릴 자격도 없죠. 이 년 동안 기껏 이루어 놓은 거라곤 그 고철덩어리 투석기(透析器)에 기름 치는 요령을 발견한 일뿐이었으니······. 그런데 어떡해요, 이븐. 여기까지 와 버린 걸, 이렇게까지 멀리 와서 돌아갈 수 없는 걸······.”
“아니, 네가 이뤄놓은 건 그것보단 많지. 가령 죽어가는 환자를 인육 농축액으로 바꿔버리는 법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야.”
“알고 계셨군요.”
모든 진실을 폭로한 뒤 로지아는 오히려 담담했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르실 거예요. 성당의 병동을 찾아가서 곧 죽을 사람들에게 당신은 죽을 운명이니 청컨대 당신의 목숨을 더 값진 곳에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잔베르의 영웅을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달라고 말하는 저를 상상해보신 적은 있으세요?”
“난 그런 걸 요구한 적 없어. 내 이름을 그런 데 팔아도 된다고 허락한 적도 없고.”
이븐은 로지아가 한 말을 이해했다.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에, 자신이 구차한 변명을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부터 그는 로지아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아뇨, 이븐. 당신은 그렇게 했어요. 어린애처럼 굴지 마세요. 이런 문제는 계약서를 작성해서 도장을 찍어야만 효력이 발생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살기를 원했고, 마물들을 사냥하기를 원했죠. 그래요. 한 번도 인육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적은 없죠. 당신은 고결하니까. 잔베르를 단신으로 지켜낼 만큼 고결해서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는 몸이니까.”
이븐은 더러운 일을 도맡는 건 언제나 자신이라고 여겼다. 로지아가 그를 고결하다고 말할 때, 그는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븐은 흉터를 내보여 자랑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불행의 전시 아래 깔린 치기를 알았고, 로지아가 감당해야 했던 더러움이 무엇인지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호전과 회복을 더욱 간절히 열망하게 되는 이들을 찾아가, 그런 기대가 허상임을 확인시켜주는 일. 당신의 육신을 삶고 끓이고 끝내 잘게 부수어 당신보다 위대하고 훌륭한 마물에게, 아니 사냥꾼에게, 어쩌면 둘 다에게 먹잇감으로 던져 주겠노라 어르고 달래고, 으르대고 사신처럼 병상 옆을 지키고 서 있는 일.
“당신이 고결해지는 만큼 저는 지저분해졌죠. 당신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동안, 지저분한 일은 오롯이 내 몫으로 남겨졌죠.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이븐. 감염된 신체를 가진 채 사냥꾼으로서 계속 살아가겠다고 고집하면서 대체 뭘 기대했던 거예요? 기적이라도 바랐나요?”
“나는 네가, 네게 방법이 있을 거라고, 너는 언제나 내게······.”
희망을 심어주었으니까.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이만큼 멀리 오지도 않았겠지. 첫 발을 떼기도 전에 목을 맸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이븐은 자신이 걸어온 길 위에 놓인 시신을 등 뒤로 느꼈다. 묵인한 희생, 은근히 요구해온 헌신.
그런 희생을 딛고 설 배짱은 있었어도 그 사실을 인정할 만큼의 용기는 없었던 자신이 가증스러워 이븐은 주먹을 쥐었다.
“조물주 노릇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죄악의 모든 조건을 마련해두고서 이제는 제게 죄를 물으시네요. 네, 지옥이 있다면 그리로 뛰어들게요.”
로지아는 그렇게 말하고 돌연 허리띠를 끌렀다. 그녀가 바지를 벗어 맨다리를 드러낼 때까지도 이븐은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로지아가 돌아섰을 때 이븐은 아연해져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가··· 그런 건가···?”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이런 걸 요구한 적이 없었죠. 하지만 나는 그래야만 했어요.”
관자놀이가 부르르 떨리고, 그 소리가 귀를 울렸다. 욕지기가 치밀고, 울음기가 목을 삼켰다. 이븐은 울음을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로지아의 허벅다리에는 살을 적출해낸 흔적이 있었다. 왼다리의 무릎 위에서 둔부에 이르기까지 움푹 팬 자국이 선연했다.
“이븐 당신 덕분에 잔베르는 안전해졌고, 마물에 의해 다치는 사람들도 줄었어요. 시신 기증 희망자를 찾을 수 없었던 날, 당신이 역겨워 하는 그 약물이 다 떨어진 날, 당신은 또 다시 엉망으로 다쳐서 잔베르로 왔어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는 것처럼 로지아가 주섬주섬 바지를 올렸다. 눈물을 모조리 짜내고 나면 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로지아는 이 상황의 희극성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내가 달리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이븐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지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품에 안으며, 이븐은 애초에 이런 만남이 존재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로지아의 가냘픈 몸이, 살을 내어줘 더 줄어든 몸이 떨림을 다 토해낼 수 있을 때까지 이븐은 그녀를 껴안았다.
등을 덮고 남은 팔이 이븐 자신까지 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날 포기할 수도 있었겠지.”
“무책임한 소리 하지 마세요.”
이븐의 품속에서 로지아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살아줘요. 계속.”
재세(在世)는 이제 명령이었고 의무였다. 희망의 빈 바닥에서 이븐은 도리어 위안 받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희망과 숨바꼭질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안도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벼락같이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한, 이븐은 계속해서 타인에게 목숨을 빚지고 빌린 생을 저당 잡혀 연명할 터였다. 그러다 어느 날, 어느 순간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며 방금 내디딘 한 걸음이 마지막이었음을 깨달을 터였다.
처음에는 살갗만을 얇게 저미고, 그 다음엔 살을 조금씩 발라내며, 마침내 핏속에서 질식해 죽을 때까지, 감염된 몸은 제 몸을 깎아나갈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그는 숨을 쉴 것이었다. 자신의 숨으로 세상을 덥힐 것이었다.
(*)1.폭풍우가 휘몰아치거나 공포에 떨며 새우는 밤. 2.악몽을 꾼 밤. (표준국어대사전)
-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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