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막 1장 - 울게 하소서(2)
12막 1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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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르 체렌도프는 교단과 제국의 관계 격변이야 어찌 됐든 마일스아이렌에서 보내는 한가한 시간을 즐겼다. 수도 로스키르헨과 인접한 데텔마인 지역의 사냥꾼으로서 쉴 틈 없이 바쁘던 가운데, 황제의 파문이라는 교황의 파격적 결정 덕분에 휴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다른 지역의 사냥꾼들이 대체로 야전을 치르게 되는 반면, 이고르의 주된 무대는 시가전이었다. 퇴로를 막고 치안청과 연계해 주변을 통제하면, 마물들이 인질을 붙잡고 발악하는 일도 허다했다.
별다른 임무가 주어지지 않아 교황청을 쏘다니는 동안에도 이고르는 습관처럼 문과 창문의 위치, 창문 밖으로 떨어졌을 때 충격을 완화시켜줄 만한 차양 따위가 있는지를 수시로 확인했다.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아래를 살피던 이고르는 종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이 점심 미사를 놓쳤음을 깨달았다. 미사에 참석하는 일은 교황청에서의 한가한 시간에 조금이나마 의미를 보태어 보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그는 고어로 부르는 찬송가의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선율만큼은 끔찍이 아름다웠다.
“에께쏘스피리···음- 음음, 베르따······.”
찬송가를 들리는 대로 따라 부르면서 그는 오늘 아침에 돌려보낸 소녀를 떠올렸다. 끝까지 자신은 스무 살이고 영양이 부족해 키가 크지 않았을 뿐이라며 바락바락 우기는 소녀를, 이고르는 알았으니 오 년 뒤에 다시 찾아오라고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오 년 뒤면 소녀는 ‘진짜 스무 살’에 근접해 있을 테고, 또 그쯤이면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소녀의 목표도 조금은 희미해졌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체구가 작으니까 더 유리한 점도 있을 거예요.’
‘너 변호사 하면 잘하겠다, 야.’
‘글을 몰라요.’
‘배우면 되지. 열다섯이면 아직···’
‘스무 살이라고요!’
‘그래, 알았다. 소리 좀 지르지 마라.’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사냥꾼은 계속 필요할 터였지만 아이들까지 동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한 선을 그어두지 않으면 제멋대로 증식하는 시대가 있었고, 이고르는 자신을 사냥꾼인 동시에 파수꾼이라고 여겼다.
“루, 이거 오랜만이야. 병실에 살림 차려놓고 두문불출이더니 바깥 공기가 필요했나?”
모퉁이를 돌았을 때 이고르는 낯익은 동료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동료의 퀭한 두 눈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술이라도 한 잔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이고르는 동료, 뤼시앵의 어깨 너머로 복도를 살폈다.
“부단장님 뵙고 오는 길인가?”
“에스트룀이 날 찾았나?”
뤼시앵의 반문에 이고르는 로스키르헨 최신 유행의 짧게 깎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기색이 되었다.
“그럼 데텔마인 지역의 사냥꾼들만 부르신 모양이로군. 아니네, 신경 쓰지 말게.”
부단장의 호출이 혹 새로운 임무의 하달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뤼시앵에게서 귀띔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두 겹의 기대를 품고 있던 이고르는 아쉽게 되었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오펜하른 얘기는 들었어. 난 자네가 화려하게 복귀할 줄 알고 있었지. 악수 한번 하자고. 그럼 나도 후작을 해치우는 일에 손을 보탠 게 되지 않겠나.”
뤼시앵은 이고르가 내민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맞잡으려다 멈칫하고 대신 주먹을 쥐었다. 이고르가 자신이 실수라도 저지른 건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뤼시앵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 자네가 다리 한 쪽 잡고 있었던 걸로 해둬.”
이고르의 농을 받아친 뤼시앵은 웃고 있었다. 개선장군이 전리품을 나누어주듯, 뤼시앵 특유의 귀족적이고 거만한 미소였다. 이고르는 고개 젖혀 웃고 나서 호쾌하게 말했다.
“자네가 허락한 거야. 베르자크가 용병들이랑 자작을 잡았다고 했을 때 면이 안 섰는데, 이걸로 이제 됐군.”
이고르는 뤼시앵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린 뒤 놓아주고 말했다.
“그럼 난 가봐야겠네. 늦는 걸 싫어하시는 분인데 이미 충분히 늦고 말았거든.”
“또 창문 개수 세고 다니느라 그랬나?”
“그래. 창문이 좀 많아야지. 닦는 것도 일이겠어.”
그보다 더한 근심은 없을 거라는 듯, 이고르가 복도를 둘러보며 퍽 진지하게 답했다. 목례로 작별하고 다시 어슬렁어슬렁 복도를 따라 걷던 이고르를 뤼시앵이 불러 세웠다.
“이고르.”
그렇게 불러놓고서 뤼시앵은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목을 가다듬고 천장을 살피는 뤼시앵을 따라 이고르도 고개를 들었다. 이고르가 천장의 높이와 그 전략적 유용성을 가늠하는 동안 뤼시앵이 줄어든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유리 세공업자 쪽으로 아는 사람 좀 있나?”
이고르는 맥락 없이 던져진 뤼시앵의 질문이 조금 전 창문을 두고 나눈 잡담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인지 고민했다. 그러다 곧 그는 뤼시앵이 살다시피 하고 있는 병실을 떠올렸다. 병실은 안체를 덩치 큰 어린애 정도로 여기는 어느 원로 사냥꾼이 보내온 인형 따위로 비좁았다.
“안체 때문이로군. 글쎄, 교황령에서는 자네나 나나 이방인이긴 매한가지라서······.”
남의 일을 제 것인 양, 부탁한 사람이 무안할 만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이고르의 특기였으므로, 그는 묘수를 떠올려내느라고 얼굴까지 찌푸렸다. 이고르는 곧 신통한 방법을 찾아내서 흐뭇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연구소에 가보게. 거기 샌님들은 마물을 잡아다 박제해두는 걸 필생의 업쯤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이니까, 필요한 물건도 찾을 수 있을 걸세. 유리로 만들면 깨지고, 깨지면 다치고, 내가 뭘 알겠느냐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듯싶으이.”
“그렇겠군.”
뤼시앵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정말 그렇겠어. 고맙네.”
이고르는 겸양의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뤼시앵의 등을 보다가 문득 무엇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중얼거렸다.
“고맙다고?”
자신이 알던 안하무인의 교만한 동료가 사라져 못내 섭섭하다는 투로 그가 덧붙였다.
“저 친구 변했군.”
*
“자문회의라니. 무슨 말을 할지 안 들어봐도 뻔해.”
나이로드는 벗은 몸으로 침대 위에 누워 허공에 팔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상대의 목을 조르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손을 움켜쥐었다.
“진즉에 자리보전했어야 할 늙은이들, 지금 앉아있는 자리를 못 지킬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야. 국왕 놈들이 떠미니까 겁에 질려서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맥혼을 조른 거겠지. 차라리 잘 됐어. 그렇잖아도 불러 모아 놓고 한바탕 할 생각이었거든.”
교황으로서는 퍽 경건하지 못한 말투로 나이로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요약했다. 동조를 요구하는 것처럼 그는 고개를 돌려 살리오든 대주교를 보았다. 그녀는 가운을 걸친 채로 침대에 걸터앉아 빗으로 엉킨 머리를 풀고 있었다.
나이로드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녀가 나긋한 말씨로 입을 열었다.
“회중에 품으신 뜻은 여전하시고요?”
“물론이지. 확신이 없는 이들이나 부화뇌동하는 거야. 뜻이 있으면 길도 있고, 뜻도 길도 있는데 내가 그쪽으로 안 갈 이유가 없지.”
“이번 일이야 한때의 소나기라 하여도, 앞으로 뜻을 펼치시는 가운데 황제와 부딪칠 일이 적잖을 텐데요.”
나이로드는 상체를 일으켜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댔다. 베개의 위치를 조정하면서 그가 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장기적으로 볼 때 대부님 의견을 좇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말씀이었어요.”
“헬바르드 대공 지젤.”
나이로드는 맥혼 로덴치오 추기경이 말했던 대안을 소리 내어 읊었다. 앞만 보고 가는 그의 성미가 전진교황이라는 별명을 안겨줬음에도, 나이로드는 좌우를 전혀 살피지 않는 위인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것이 나이로드 자신의 대부이자 가장 가까운 조력자의 제안이었다면 충분히 검토해볼 가치가 있었다.
“그 여자 성정이 포악하다던데.”
“그래요? 무척 겸손하고 배려심 깊은 여인이라고들 입을 모으던데요.”
“세간의 평가야 헬바르드 대공만큼 콧방귀 좀 뀐다는 이들이 만들어낸 걸 테니까. 귀족들은 서로 추어올려 주기 바쁘지. 사교계에서의 처신이 궁금하지 않은 이상 그런 평가는 하등의 쓸모가 없어. 그 사람의 밑바닥을 보려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봐야 하지.”
“하인들은 뭐라 하던가요?”
나이로드는 자신의 정보원이 물어온 정보를 살리오든에게도 전했다.
“어쩌다 한 번씩 사나운 성깔이 도지는 모양이야. 하인들에게 매를 든다더군. 한 번은 뜨거운 차가 담긴 잔을 던져서 하인 팔에 흉을 지게 만들었다던가. 맥혼이 말한 영지 내에서의 인망이라는 것도 기실 생트바이룬의 독립투사들이 만들어낸 말일 거야. 그치들이야 리카드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니까.”
“설령 대부님의 말을 따르더라도 개악이라는 거군요.”
“그렇지. 개악이지.”
살리오든 대주교가 한 말을 음미하듯 개악이라는 단어를 입 속에서 곱씹어보던 나이로드는 침대 머리에서 등을 떼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데.”
“각지에서 성직자들이 모였으니 당분간은 시끌벅적해도 참으셔야 할 거예요.”
“이렇게 늦은 밤에?”
살리오든이 빗을 내려놓고 천천히 등을 돌렸다. 걱정할 일 없다는 듯 그녀는 편안하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교단의 늙은이들이 얄망궂게 구는 거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잖아요? 벨레몽 추기경은 오밤중에도 요리며 성찬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일이 잦다더니 그 사람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나이로드는 대주교의 얼굴 아래 깔린 부자연스러움과 불안한 기색을 읽어냈다. 애써 지어낸 미소로 상황을 눙치기에는 그들이 함께 해온 시간이 너무 길었다. 나이로드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가로질렀다. 가운에 팔을 꿰며 교황은 창문으로 향했다.
“별일 아닐 거여요.”
그렇게 말하는 살리오든을 향해 나이로드는 부릅뜬 눈으로 경고를 보냈다. 그는 숫제 창밖으로 뛰어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 댔다. 어둠 속에서 덩이져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무리를 확인한 나이로드는 문을 향해 소리쳤다.
“리로댕 사제! 장!”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장 리로댕 특무사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이로드는 장의 이토록 빠른 대처에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다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바깥의 소란이 무엇 때문인지 알아 오게.”
장은 조금도 조급한 기색 없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는 손으로 안경을 조심스럽게 추켜올린 뒤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알아보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마물 하나가 흘러들어온 모양입니다. 엽사들이 나섰으니 안심하십시오.”
“마물이?”
“그렇다 합니다. 그웬돌라드에서 몰아내니 교황령까지 내려온 모양이지요.”
장이 전한 말의 진위를 가늠해보듯 나이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손을 내저어 장을 물리쳤다.
“나가 보게.”
장이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그것 보세요. 걱정하실 일이 아니지 않아요? 하필 엽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오다니 그 마물도 죽을 자리를 찾아······.”
나이로드는 다시 한 번 눈빛으로 살리오든의 입을 막았다. 그는 창문에 붙어 서서 아래를 살폈다. 짙은 구름에 가려 달은 무리들의 정체를 밝혀야 할 책무를 배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로드는 저들 새까만 무리의 흐름이 안에서 밖이 아니라 그 반대를 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근위병!”
다시 문을 열고 나타난 건 근위병이 아니라 장이었다. 그는 문을 등지고 섰다.
“성하께서 염려하실 바가 아닙니다.”
나이로드는 장의 근심 없이 평온한 얼굴과, 이제 더 이상 불안감을 감추고 있지 못한 살리오든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뿌드득, 하고 교황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방의 한구석에 놓인 서랍장을 향해 다가갔다.
서랍 속 물건들을 되는 대로 벌려놓던 나이로드의 손에 곧 권총이 들렸다. 그는 탄환을 장전하고 해머를 젖혔다.
“케드······.”
살리오든의 말을 묵살하고, 나이로드는 장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비키게.”
“엽사들이 곧 마물을···”
“장.”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나이로드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비켜.”
나이로드는 천천히 옆으로 비켜서는 장의 몸을 밀어치우고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가운 자락을 펄럭이며, 한손에는 권총을 든 채로 복도를 가로지르던 나이로드의 활보는,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복도를 막고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무리를 봤을 때 나이로드는 안도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근위대 제복 때문이었다. 무리를 이끌고 오는 남자까지 모두 다섯이었고, 나이로드는 저들과 함께 바깥의 소란을 확인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이로드는 곧 그들이 근위대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소속을 밝혀라.”
“교황 성하의 충성스러운 근위대입니다.”
“소속!”
나이로드는 버럭 일갈했다. 그러나 그의 고함 소리에 조금도 주눅 든 기색 없이, 근위대 제복을 빼앗아 입은 남자가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로 응수했다.
“변고가 생겼으니 교황 성하를 안전한 곳에 뫼시라는 명입니다.”
“누가 감히 나를 대신해 명을 내린단 말인가!”
남자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근위대 제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와 나이로드의 양팔을 하나씩 붙잡았다. 교황의 손에 들린 권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팔을 잡아채는 몸짓이 주저 없이 모질었다.
탕-
그리고 그런 경솔함은 물론 교황의 성정을 몰랐던 탓이었다. 팔을 붙잡았던 남자 하나가 펄쩍 뛰었다. 그는 무릎을 움켜쥐고 벽에 기대어 신음했다. 나이로드는 자유로워진 팔을 들어 반대편 팔을 붙잡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먹였다.
팔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남자를 발로 차 뿌리친 나이로드는 묵직한 물체가 관자놀이를 가격하는 것을 느꼈다. 머스킷의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교황이 비틀거렸다. 이어지는 공격에 손등을 얻어맞고 그는 권총을 떨어뜨렸다.
“이걸 쏴 버릴 수도 없고······.”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는 나이로드가 다시 달려들자 개머리판으로 안면을 찍었다. 그는 깨진 코에서 피를 흘리는 교황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말썽 피우는 개를 끌고 가듯 잡아끌었다. 남자 두 명이 다시 팔을 붙잡았다. 그들은 교황의 팔을 뒤로 꺾고 등을 밀었다.
나이로드는 옆머리에 피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복도 위로 피를 점점이 뿌리며 나이로드는 남자들에게 끌려갔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로덴치오 추기경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팔을 붙잡은 남자들이 멈춰 섰을 때, 나이로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얻어맞은 일로 귀가 먹먹했다. 다만 이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은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도 곧 먼 데서 들려오는 총성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가 이렇게 함부로 총을 쏘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청각이 천천히 돌아오면서, 나이로드는 총성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는 것임을 깨달았다. 다리를 절며 따라오던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이건 머스킷 소리가 아닌데······.”
앞장선 남자가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우고 모퉁이를 살폈다.
탕-
모퉁이를 살피던 남자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머리가 박살이 나있었다. 그건 사람을 잡는 데 쓰는 총이 아니었다. 남자들이 나이로드를 뒤로 집어던지고 머스킷을 빼 들었다. 나이로드는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댔다. 흐린 시야 속에서 모퉁이에 놓였던 시체가 뒤로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나이로드는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그는 곧 살아 움직이는 시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시체를 방패 삼아 앞세우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조심성 없는 이들이 시체를 겨누어 머스킷을 발사하고, 그보다 생각 깊은 이는 다리를 겨냥했다. 전자는 시체에 막혀 무위로 흩어졌고 후자는 신속성에 반격을 허락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로 악귀 같은 형상을 한 사내는 시체를 내던지고 남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츠컥-
머스킷을 내던지고 환도를 뽑아들려던 남자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쓰러지는 남자의 배에 다시 칼을 박아 넣은 사내는 이번에는 그를 방패로 이용해 이어지는 공격을 막았다. 동료의 어깨에 환도를 내려친 남자의 머리가 이내 총격에 터져 나갔다.
뇌수가 프레스코 벽화를 흠뻑 적셨다. 또 다시 사내의 손에 들린 칼이 번뜩이고 이어서 피가 뿌려졌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나이로드의 몸 위로 시체가 넘어졌다. 나이로드는 갑작스레 가해진 시체의 무게에 눌려 뒤로 넘어졌다.
사내가 다가와 시체를 걷어치웠다. 드리운 암막을 걷어낸 듯, 나이로드는 돌연 빛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밤중이었고, 주위를 밝힌 건 촛불뿐이었으므로 나이로드는 그럴 리 없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사내가 교황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힘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케넌이었다.
- 작가의말
최근에는 줄곧 9시에 올렸는데, 오늘은 쓰는 데 애를 먹어서 조금 늦어졌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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